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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영화 또는 인터넷 영화 (1)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9. 01:51

인터넷과 영화 또는 인터넷 영화 (1)

                                     

속도의 시대에 내면의 표현은 허구이다.

1999년 칸 영화제에서 <로제타>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후 갑자기 세계적인 작가 영화의 총아로 떠오른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신작 <아들>은 한국 시장에서 실컷 욕만 얻어먹을게 틀림없다. 개봉을 앞두고 다른 영화처럼 일반 시사회를 개최한 <아들>의 관객 반응은 썰렁하다 못해 적대감마저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일부 관객이 극장을 나가기 시작했고 영화 상영 동안 조금씩 크게 표나지 않게 꾸준히 관객들이 자리를 떠났다. 40여분이 지나서야 객석의 당혹감은 진정된 듯 보였지만 진짜 웃기는 일은 참을성있게 남아 끝까지 영화를 본 관객들 대다수도 이미지의 영화에 호의적이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 끝날지 지켜보리라는 오기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나는 영화에 대한 객석에는 야유와 한탄과 허탈감이 섞인 한숨이 퍼졌다. 아마도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상당수의 관객들은 공짜로 표를 구해준 친구를 원망하면서 주말을 앞두고 기분을 잡쳤다고 투덜댔을 것이다.

 사실 <아들>은 데이트용으로 편하게 볼 영화는 아니다. 온 가족이 동반해 기분전환용으로 즐겁게 관람할 영화로도 최악의 선택이다. 무인도에 영화 평론가들을 모아놓고 거듭 상영해야 할 영화라고 누군가 농담을 했다. 이 영화로 2002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올리비에 구르메의 빛나는 연기도, 다큐멘타리로 잔뼈가 굵은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엄격해서 감정이 북받치게 만드는 연출도 다 소용없었다. 관객은 자신들을 친절하게 안내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명확히 설명해 주지도, 이야기를 매듭짓지도 않는 영화에 화를 낸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다. 그건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관객에게 모욕을 주는 건방진 태도일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날 <아들>의 시사회장 분위기는 그랬다.


                             -FILM2.0 (2004. 3. 2 70쪽) -



  손을 꼽아 보니 일 년에 서너 편의 영화와 한 두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 내 형편인 것 같다. 그렇게 어렵사리 본 영화나 연극은 뇌리에 오래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 자리에서는 연극을 제외하고 영화에 국한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영화 매니아가 아닌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거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할 때, 시간이 남아 거리를 쏘다니는 것보다는 점잖게 한 자리에 버티는 것이 나아보일 때 등등이다. 조금 더 한 세대나 두 세대 밑으로 내려간다면 데이트용으로, 기분전환용으로 영화를 본다는 답변이 우세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니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영화는 생각보다 많다.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는 영화들을 비롯해서 공중파 방송으로 쏟아져 나오는 영화들을 알게 모르게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래서 '당신은 일 년에, 한 달에 몇 편의 영화를 보십니까?' 라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에 빠지는 젊은이들을 마주치게 되는 경우는 그리 낯설지 않다. 4, 50대 이상의 중 장년층에게 영화는 '영화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행사'이었는데, 젊은 세대들에게 영화는 '언제, 어디서건 마주 할 수 있는 소모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다. 큰 스크린과 웅장한 음향시설이 갖추어져야만 영화를 보는 맛이 난다는 사람들은 계속 영화관에서 영화보기를 고집할 것이지만, 영상 매체의 발전은 굳이 영화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화질과 현장감을 구현하는 시스템을 안방에서, 거실에서 눕거나 엎드린 자세로 오징어 땅콩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타인의 간섭이 배제된 방임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므로 이제 영화관은 사교와 친교의 장으로, 쇼핑이나 다른 오락시설의 부속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째든 영화관에 가서  영화보기는 나에게는 큰 행사에 속한다.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틈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년 이맘 때 어렵게 본 영화가 <아들>이다. 지치고 연약해진 사색의 힘을 되살리고 뭔가 오랫동안 곱씹을 것이 남아야 좋은 영화라는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은 화려한 수사로 가득한 팜플렛과 현수막의 마수에 걸려들어 표를 사게 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졸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십 여분이 지나면서부터 내가 상상했던 영화의 줄거리나 메시지는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속고 있다는 - 사실, 무엇을 속고 있는 지 알지도 못하면서- 불쾌감이 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서두에 인용한 試寫會 풍경은 내가 보기에 아주 的確한 표현이다. 아무리 예술적인 감각과 논리적 상상력을 훈련한 사람이라도 <아들>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다. 


 주인공 올리비에는 소년원에서 출소한 청소년들에게 기능을 가르치는 직업훈련원에서 목공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올리비에는 프랜시스라는 학생이 몇 년 전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을 잃은 뒤 올리비에는 아내와의 갈등으로 이혼을 하게 되고, 직업훈련원에서 쳇바퀴 도는 듯한 규칙적인 일상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프랜시스는 올리비에에게 차츰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그에게 목공을 배우고자 한다. 올리비에는 복합적인 애증에 휩싸이게 되고 애증으로 빚어지는 분노와 광기, 슬픔과 연민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이혼한 부인이 재혼을 한다는 소식과 이미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프랜시스를 徒弟로 삼기로 결심하지만, 그 결심이 꼭 전 부인의 재혼과 임신으로부터 빚어지는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화는 그 정도에서 끝난다.

  이 영화는 철저히 카메라를 주인공 올리비에의 등 뒤에 위치시켜놓고 올리비에의 시선을 좇아가고 있다. '등'으로 표현되는 주인공 배우의 근육의 움직임, 연기인지 평범한 일상의 동작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풀어져 있는 演技力, 거기다가 영화의 현장에서 들리는 숨소리, 발자국 소리, 기계톱 소리 등등의 자연음 이외에는 음악을 배제하고 있는 리얼리티가 이 영화를 더욱 더 재미없고 지루하게 만든다. 미국 시카고 선 타임즈의 기자 로저 이버트 Roger Ebert가 ' 당신이 이 영화에서 감흥을 받을 수 없다면 그건 당신이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척도가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나, 샌프랜스코 익재미너의 앤더슨 Jeffrey. M, Anderson의 "단순한 이야기를 힘있고 절제된 스타일로 풀어낸 영화이며, 음악을 전혀 쓰지 않고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라는 찬사는 고전적 예술의 복고를 부르짖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드러난 형상만이 존재한다


 영화 <아들>은 조용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가 천 만 관객을 불러모으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들>을 외면한 우리 관객이 자기 존재에 대한 탐색과 생의 모순에 대해서 치열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도 우리의 역사를 이루었던 한 시대의 광기와 폭력을 다루고 있으며 결국은 개별적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再現의 문제'를 떠올린다. 재현은 철학에서, 예술의 분야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재현은 지나가 버렸거나, 현존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아들>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보여주는데도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는 6.25 전쟁과 공군 특수부대 684 부대를 모델로 한 논픽션이지만 <아들>에 비해서 리얼리티가 훨씬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흘러가 버린 과거의 풍문이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현실의 삶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른 나라와 견줄 수 없을 만큼 넓은 인터넷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지금의 십 대나 이 십대 들에게 컴퓨터나 인터넷은 어릴 적부터 장난감처럼, 아니 장난감으로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인터넷 망에서 실현되는 사이버스페이스와 익명의 네티즌들과의 조우, 이모티콘, 수많은 게임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세대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인터넷 세대는 찰라에 환호한다. 어차피 드러나는 것들은 순간 속에 명멸하는 것, 컴퓨터 상에서의 존재는 어차피 감각적 이미지로서만이 광휘를 발휘할 뿐이다. 오늘날의 유행병처럼 번진 얼짱, 몸짱 신드롬은 내면적 본질보다는 드러난 형상에 자신의 존재를 투여하여 확인하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인터넷 게임에 열광하는 세대들에게 이 세계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추구나 인간의 내면 탐구는 허상을 좇는 그림자 놀이일 뿐이며 인터넷 게임보다도 훨씬 종속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견되는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바로 오늘의, 우리의 자화상이다. 세대 간의 의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 원인의 일부분에는 컴퓨터 또는 인터넷이라는 매체에 대한 호감도와 적응 능력의 차이가 존립한다. 오늘날 철학이나 예술의 일부분에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짚어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와 같은 영화가 전 인구의 1/4 이상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 먼저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철저하게 계산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한국형 버전이라는 것이다.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과거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오늘의 풍요를 자랑스럽게 확인하는 계기를 부여하며 전후 세대, 산업화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가족애라는 흘러가 버린 공동체 사회의 규준을 전쟁이라는 광기와 부조리의 세태와 버무림으로써 전 세대를 아우르는 성과를 이루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할 부분은 아래와 같은 문일평의 분석이다.


  애초부터 이 영화는 전쟁을 '전쟁놀이'로 여기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국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촬영하고 연출했으며, 그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에 열광하는 모든 젊은 관객들에게 한국전쟁은 상처가 아닌 볼거리이며 즐길 거리인 것이다. 이는 이 영화를 향한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 비난은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멋지게 가짜 수류탄을 던지고 비장하게 기관총을 쏘며 전쟁놀이하는 아이들에게 전쟁은 판타지이며 스펙타클이다. 그것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재현하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다. (중략) 이 영화의 의의는 바로 이 영화가 '전쟁'을 '전쟁놀이'로 여기는 최초의 한국영화이며, 이것이 젊은 세대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데 있다.


                  - FILM 2.0 (2004.3. 9 46쪽) -


 요즘의 인터넷 세대들은 판타지나 스펙타클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그림자 놀이로 영화를 선택한다. '전쟁'을 전쟁'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쟁놀이'로 치환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버스페이스 왕국 주민들의 권리이다.


 <실미도>는 또 어떤가? 체제유지를 위한 반공이데올로기의 도구로 김일성을 처단하기 위하여 차출한 특수부대원이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자 헌 신짝처럼 내버려지자 그중 20여명이 인천 앞 바다의 작은 섬 실미도를 탈출, 버스를 탈취하여 영등포까지 진출했다가 전원 자폭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어렸을 때 기억이지만, 그들은 공비라고 불렸다가, 곧, 무장탈영병으로 정정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삼십 여 년이 흐른 뒤에 그 실화는 <실미도>라는 영화로 재현된다. 그 어느 때보다 남북 간의 동질감과 통일의 열망이 고조되었을 때 <실미도>는 이데올로기의 허망함과 국가 나 권력에 의해 침탈 당한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표방하면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실미도>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사실의 재현이라는 이데아의 확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이다. <실미도> 또한 <태극기 휘날리며>와 다름없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차용하면서 상업적 휴머니즘과 내통하는 듯한 아쉬움을 던져주는데 그 보다도 깊이 새겨보아야 할 점은 사실의 왜곡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엄밀한 반성이다.  이도흠은 「현실의 재현과 진실 사이의 거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영화 <실미도>를 평가하고 있다.


  폭력의 근원이 가부장주의에 있다고 할 때 이 영화처럼 가부장주의를 미화한 영화도 없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늦게 일어나는 관객층은 중년 여성들이다. 눈물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작가와 감독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684부대의 현실은 그 현실의 한 요소인 가부장주의를 남성성의 신화로 미화하여 재현한다. 이렇게 재현된 영화는 남성성과 폭력의 과잉을 드러내고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먹어서 죽는다」는 법정 法頂의 글이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은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생기고 탈이 생긴다는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물이라 하더라도 그 음식물에 농축된 오염물질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 분명 <아들>과 같은 예술영화는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느림의 미학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적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우리나라와 같이 인터넷의 세상이 일찌감치 발화한 땅에서 <아들>과 같은 영화는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