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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 破邪顯正 또는 현정파사 顯正破邪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1. 00:20

파사현정 破邪顯正 또는 현정파사  顯正破邪

                                              -탁석산 저, 한국의 주체성


나는 지금  인터넷으로 CBC라디오 채널 1 의 뉴스를 듣고 있다. 해비 스노우..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뉴스가 끝나고 음악이 흐른다. 자정, 토론토 현지시각 오전 10시. 수 만 킬로 떨어진 지구 저 편의 삶들, 마리화나를 피운 6명의 젊은이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나와는 무관한 사건들이 비집고 들어오는, 생소한 단어를 찾기 위해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몇 권의 영어사전을 뒤지다가 목마름을 느낀다. 신 김치 밖에 반찬이 없다는 아내의 말에 탕수육,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아마 음식이 짰던 모양이지?

물 한 컵을 마신 후 이 글의 제목의 한자표기를 확인하기 위해 옥편을 꺼내어 보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인터넷과 영어방송, 자장면과 한자숙어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무엇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산다. 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얼굴 표면을 어떤 다른 매개체 없이 직접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거울이나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만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거울 속의 나의 얼굴은 허상일 뿐, 나의 얼굴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남의 얼굴은 자주 볼 수 있고 진짜 얼굴을 보는 것이므로 우리는 남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남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나마 거울을 통해 허상을 보게 될 뿐이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얼굴이 박힌 사진을 보고 낯섦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자신이 생각한 자신의 모습이 사진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체성』의 저자 탁석산은 책의 맺음말에서 자신을 모르고 궤변을 일삼는 소피스트들을 향하여 '너 자신을 알라'고 일침을 가했던 소크라테스의 절규를 들려준다. 이 땅의 정치인과 자본가, 수많은 석학과 지식인들, 그리고 먹고살기 바쁜 민초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 는 절규는 과연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인가?


핵 처리물 폐기에 관련된 부안 군민들의 장기간 농성, 대선 자금을 둘러싼 검은 돈의 실체 규명과 책임문제,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갈등, 아파트 시세를 중심으로 한 강남과 강북의 격차,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친미와 반미세력 간의 논쟁, 호주제 폐지를 놓고 벌어지는 유교권과 진보적 여성집단간의 대립 등등의 국내 문제와 북핵 문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의 국제적 현안이 산 너머 산으로 이어지는데, 어디에서도 속 시원한 전망이나 대책이 나오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개혁을 외치는 공허한 메아리가 유령처럼 떠다니는 이 땅에는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도 없고 잔 다르크도 없다.


본디 서양의 철학은 항구불변한 세계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다. 그 세계법칙은 보편적 진리이고 누구나 수긍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이성 자체는 전인류적인 보편성을 갖지는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논리학은 전인류적인 보편성을 지닌 사고의 법칙을 찾는 낭만적 유랑이다. 일반적인 사고에서 파생되는 오류를 찾아내고, 사유의 법칙을 확립하는 논리학은 베이컨이 지적한 네 가지의 우상, 즉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갖거나,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듯 인간 사이에 파생하는 기질과 능력의 차이를 간과하여 지식의 상대성에 빠지게 되거나, 언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오해나, 권위나 힘에 의존하게 되는 정치적 행위들의 우상 idola을 극복한다 하여도 딜렘마라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임을 주장한 소피스트이다. 만물의 척도는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뜻으로 새기지만 그 보다는 '인간에 있어서의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것에 더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알려진 프로타고라스를 찾아 왔다. '선생님, 저는 웅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 수중에 있는 돈은 수업료의 절반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선생님께서 저를 가르쳐 주신다면, 나머지 절반은 최초의 소송에서 승소하면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훌륭한 웅변술을 체득한 후에도 청년은 법정에서 변론을 하지 않았고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의 반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청년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이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간에 청년은 나에게 수업료의 반을 지불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재판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내가 이긴다면 법원의 판결에 따라 당연히 돈을 지불하여야 할 것이고 내가 진다고 하여도 청년이 최초의 소송에서 이긴 것이 되니 약속대로 수업료의 반을 지불하여야 할 것이야"

이 말을 듣고 청년은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내가 이기든 지든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긴다면 당연히 법원의 판결에 따라 프로타고라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진다면  처음의 약속대로 최초의 소송에서 이긴 것이 아니므로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자, 누구의 말이 옳은가?


이와 같은 딜렘마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신념이나 의지와 같은 비논리적인 사유를 주장하므로 사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극한적인 대립으로 빠져 들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립과 논쟁은 이와 같은 딜렘마에 다름 아니며, 딜렘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채용하고, 그 다수결의 원칙은 대중에 대한 선전과 광고, 또는 대중주의라 불리우는 인기전략으로 변모해 버리기 십상이다. 정작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고,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아량과 여유일텐데 말이다.

'내 탓이오' 스티커를 앞 유리창에 붙여놓고  그 경구를 날마다 바라보아야 할 사람은 그 스티커를 붙인 사람인데도, 애꿎게 뒷 차에게  '내 탓이오'를 되내이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영어권 방송을 듣고. 한자를 쓰고 자장면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지 않는다고 누가 나를 비난한다면 화를 벌컥 낼 것이다. 나는 영어방송을 듣거나 한자를 쓰거나 자장면을 먹거나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내게 느끼는 낯 설은 감정은 어쩌지 못 한다.


『한국의 주체성』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오늘의 한국인들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 보인다. 누구보다도 주체적이어야 할 젊은 세대들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원정출산을 감행하면서 '다들 그러는데 뭘'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공교육의 부실을 탓하면서 영어권 연수나 유학을 떠나보내는 한편으로 양키 고 홈을 외치는 이중적 사고, 잘못된 행동은 자신이 하면서 네 탓으로 돌리는 비겁함에서 저자는 한 치도 비켜가지 않기로 작정한 듯 하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그의 논지는 거칠고 반론의 여지가 많다. 그의 주장은 과도한 비약과, 과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은 결합과 분해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위선으로 가려졌던 우리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솔직하고 담대하다.

그는 파사현정은 잘못된 점을 고치면 바름이 나타나는 것이지만, 자신은 현정파사 즉 올바름을 적시하면 곧 잘못된 것들이 제거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지엽적인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기에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없다.  세계는 너무나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고, 우리나라를 둘러싼 환경은 느리게, 아름답게 변화해 나갈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현정파사는 그런 점에서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주체성』은 150 여쪽의 작은 문고판이다. 많은 문제거리, 생각거리들을 작은 책자에 응축해서 넣다보니 사고의 잔 물결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의식의 아킬레스건을 때리는 탁석산의 의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쾌하다. 탁석산은 정말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를 캐묻는다.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왜 아니다인가? 주체성이란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인데 그가 바라본 우리는 주인행세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힘이 없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하고 미국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현실이 그렇고, 영어 스트레스로 온 나라가 부산을 떠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거역할 수 없는 세계적 물결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길을 안내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고, 외국인 한 명 타지 않은 지하철에서 코맹맹이 영어 안내방송을 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뉴욕이나, 파리로 내가 달러를 쓰고 루블화를 쓰기 위해서 방문한 관광객이라고 그들이 우리 말로 지하철에서 길 안내를 해주는가? 인사동에 외국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것은 우중충하고 처마가 낮은 골동품가게나 전통음식을 파는 허름한 음식점에서 한국의 맛과 멋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 현대화된 빌딩 안에서 피자나 코카 콜라를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탁석산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하고 그 힘을 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반문한다. 왜 미국이나 강대국들이 갖는 핵은 평화적 도구이고, 인도나 파키스탄, 기타 나라들이 핵을 가지면 악의 축이 되는가? 힘이 없어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아수라장이 되고, 미국과 중국의 싸움에 6.25가 터지고, 왜 남북한의 통일에 중국과 일본, 미국과 소련이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가? 탁석산은 그에 덧붙여 한글전용화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언어는 그 민족의 얼이고 한글이라는 탁월한 문자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홀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영어는 필요하다. 그렇다고해서 온 국민이 영어에 능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한 문화의 집적물이고 시간의 퇴적물이다. 한 언어에 능숙해진다는 것은 그 문화에 길들여진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젊은이들이 듣는 음악에 한 구절 정도는 꼭 영어가 삽입되어 있다. 별 뜻도 없고 꼭 그래야할 이유도 없는데 그저 멋으로 듣는다. 영어는 멋있고, 연변 우리동포의 어투는 코미디감으로 적격인가?

피땀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영어연수와 유학으로 흘려버리는 대신 탁석산은 영어선생들을 연수시키자고 제안을 한다. 과도한 영어 사용은 우리의 얼을 빼버린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문제를 하나 내 볼 참이다. 한국(담배)인삼공사의 영어 명은 무엇일까? .코리아 타바코 앤드 진생이라고 답을 쓰신 분들은 아직 세계화가 덜 된 분들이다. 정답을 보게 되면 웃음보다 왠지 찡하게 코끝이 저려올 것이다.

 

『한국의 주체성』은 이와 같이 우리가 당연시했던 우리의 무지를 일깨운다. 엉뚱하면서도 그러나 한번은 곱씹어 봐야 할 우리의 자화상를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성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면서 고통이다. 우리는 약소국으로 살아오면서 겉과 속이 전혀다른 이중의 성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주체성이란 그 고질화된 틀을 깨고 그 겉과 속을 하나로 통합하는 참담한 반성이 아니겠는가?


탁석산은 『한국의 주체성』의 들어가는 말에서 우리들이 택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력갱생의 길, 미국의 51번째 주로의 편입, 현지고용인으로의 전락, 강대국의 길, 약소국이면서 주체적인 국가가 그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 같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생각의 깊이는 만만하지 않다. 자력갱생의 길은 북한이 택한 노선이다. 그러나 그 길은 이미 실패한 길임이 증명되었다. 미국 51번째 주로의 편입은 희극적이다. 차라리 이렇게 미국 경도의 길을 갈 바에는 아예 미국의 한 주로 편입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우리보다 못사는 중국동포를 우리 스스로는 조선족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 族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에 간다라는 표현보다 미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에 더 익숙해져 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국내에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보다 더 신뢰를 받는다. 한 쪽으로는 반미를 외치지만 미국에 물건을 못 팔면  그 날로 우리는 위기를 맞는다. 아엠에프 때 우리는 미국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실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는 많은 기업을 팔아 달러를 마련하고 국제화 세계화의 보무에 맞춰 많은 내국인들이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글로벌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의 알짜 기업들이 외국인들의 손에 하나 둘씩 팔려 가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도, 소주도 외국인의 소유가 되어 있다면 그 맛은 과연 어떨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강대국이 되는 것은 물 건너간 이야기라고 탁석산은 단언한다. 기분 나쁘고 속 상한 이야기이지만, 소득 1만불에서 멈춰버린 현실을 반추해 보면 우리에게 장미빛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음은 당연해 보인다. 자원도 부족하고, 중국과 일본이라는 거대하고 싸우기에는 힘에 부치는 강대국 틈에 끼어서 경쟁을 해 나가기란 그리 녹녹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탁석산은 우리가 약소국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몇 가지 덕목을 소개한 바 있다.

우리가 애써 버리려고 했던 외면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더욱 보듬고 아껴야 할 것들이다. 일본의 총리가 '독도가 자기네 땅이다'라고 망언을 거듭하고 한국이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 온 것이 자기들의 은공이라고 이야기해도 묵묵부답해야 하는 현실, 먼 앞 날을 내다보고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 앞에서도 의연하게 묵언으로 대처하는 관리들 앞에서. 친일파 척결의 사전 편찬에 한 푼의 예산도 편성해주지 않은 국회의원들과 네티즌들의 열화와 같은 모금운동이 불법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높으신 분들의 발 아래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인가?


탁석산의 『한국의 주체성』은 우리의 미래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신랄하게 오늘의 자신을 꼬집어 상처를 내는 면에서 가학적이다. 그러나 고통없이 상처없이 우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거칠어 다듬고 더 깊은 사색을 거듭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오늘의 우리들이 후손들에게 폄하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 학기 개강 초에 나는 성적에 매달려 사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한다.

   

너희들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되라. 힘있고 공부 잘하고 출세를 하는 사람들 보다 너희들이 더 소중하다. 왜냐하면 너희들에게는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컨닝을 하지 마라. 대리출석을 하지 마라. 출석 체크가 끝나고 수업 중간에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기지 마라. 그것들이 여러분의 의식을 좀 먹고 여러분들을 썩게 만드는 것이다. 컨닝이나, 대리출석이나 수업을 빠져나가는 일은 도둑질이다. 대학에서 도둑질을 배운 사람들이 대학을 나가면 대도 大盜가 되는 것 아니냐!

           

우리는 누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될 수 있다. 주체적인 삶에 대해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모든 세상 일에 내가 책임 질 수 있다는 결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