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지 못하는 자의 화두
- 한 소운 시집 『그 길 위에 서면 』
1. 시인의 길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있다. 시는 대중화되지 않았는데 시인은 대중화 되었다. '시는 많아도 시인은 없고 시인은 많아도 시가 없네'라고 읊은 어느 시인의 토로는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지나침이 없을 터이다. 한소운은 이제 막 그런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새내기 시인이다. 새내기라고 하지만 그는 지난 오륙 년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시를 쓰고, 시인됨에 대해서 방황과 좌절을 겪으며 정진을 거듭해 온 사람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다. 그렇지만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를 만들어내는 단순한 제작자가 아니다. 전통적인 동양의 사유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예술 행위는 道에 이르는 한 경로이다. 道는 인간이 체득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자유 상태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 노릇 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자연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넓히는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일인가,역사 속의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일이 한갓 재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그러므로 시인이 갖는 詩心은 이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앞마당에 내린 풀씨에도 생명의 약동을 감지해내며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기웃거려야 하는 남다른 정서의 큰 울림통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시심만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일상은 시심의 영역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은 너무 어둡고 불안하여 세기말의 탈출구를 아예 봉쇄하려고까지 한다. 지하철에서 경제신문을 들척이며 주가를 검색하는 사람은 많아도 시집을 펼쳐읽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인가 ? 자본주의는 효율과 능력을 그 덕목으로 삼고 거기에다가 정보의 초속화를 통해서 권력의 독점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반성적 사고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한 평론가의 우울한 진단은 이 세상에서 추방당할 운명에 처한 시인의 미래를 암시해 준다. 따라서 오늘의 시인은 그 어느 때 보다 이 땅에서 시인됨에 대해서 거듭 성찰을 거듭해야 하는 고투를 감내해야 한다.
시인의 책무는 무엇이었던가 ? 숲에서 떠난 새들의 노래를 인간의 목소리로 재생해내는 일,더 이상 동경과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별들을 빛나는 마음의 보석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 아니었던가. 정해진 도착지도 없이 바람처럼 떠돌며 이야기를 전해 주되 자신은 스스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느 시인은 자신의 마음속을 헤매다 끝내 스러지고 또 어느 시인은 역사의 지평선을 훌쩍 넘어 신화의 세계로 잠적해 버린다.이와 같이 시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인으로서의 소명감과 믿음을 지켜내면서 먼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한소운은 결코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는 미덕을 지녔다. 페미니즘의 열풍이 지나가고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많은 여성 시인들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를 테면 性에 대한 공격적 담론,정치와 사회현상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과 참여를 자신들의 시적 화두로 삼음으로서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그 자리로 부터 한걸음 빗겨 서 있는 것이 한소운이 지닌 한계이자 미덕일 수 있다.
2. 사랑의 원형을 찾아서
『그 길 위에 서면』의 시집 제명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 한소운의 시쓰기이다.
떠난다는 것은 현실적 결핍상태로부터의 탈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회귀의 법칙에 종속되는 삶의 여러 양태들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① 바람을 안고 돌아오는 길 ② 모두 한 곳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인데 ③ 처음과 끝이 하나인 동그라미 사랑 ④ 어디 사냐고 묻길래/ 종점이라고 말했지요
①과 ②는 「길 위에 서면」 ③은 「차를 마시며」 ④는 「종점에서」에서 거칠게 뽑아본 구절인데 한소운의 시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관의 일단을 조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즉 한소운은 우리네 인생이 모두 (죽음이라는) 한 곳을 향하여 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걸음은 바람(허무)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과 끝이 하나이면서 완전함을 이루는 원융의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예 떠나시렵니까
간곡한 만류 뿌리치고
그예 가시렵니까
가는 길이 없으니
오는 길이 어디 있으며
마음 밖에 마음 없으니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귀막고 눈감고 가는 길이니
사막도
설산도 두렵지 아니한 까닭입니까
오늘 홀연히 길이 보인다 한 치 문 밖도 나서지 않은 채 한평생 살아 섬긴 서성거린 발자국 모아 글을 이루나니 그대들이여 부처를 보지말고 눈을 찔러 나를 잊게 하라
그저 바람의 흔적을 옮겨 놓았을 뿐이니 누가 이 세상을 온전히 보겠는가
- 「혜초,왕오천축국전」 전문
시집 모두冒頭에 배치된 위의 시는 혜초로 상징되는 구도적 떠남이 결국 한평생 서성거린 발자국이 쌓인 이 마음과 같은 것임을 갈파하므로서 인생의 허무함 ,허무를 느끼는 마음 다스림의 중요성을 직관한다. 바람의 흔적으로 표상되는, 부초와 같은 삶의 대상성을 예리하게 파헤침으로서 한소운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시집 『그 길 위에 서면』은 시인의 그러한 시적 귀결을 향하여 마음의 미로를 헤맨 시인의 족적이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일별을 요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 행복한 날에도/ 마음껏 웃지 못하는 까닭은 작은 풀꽃처럼 숨어서 우는/ 그 누가 있기 때문입니다//아, 슬픈 날에도/울음을 다 울지 못하는 까닭은/ 울음 속에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기쁨이/ 태양처럼 다시 솟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 「길 위에 서면」4,5연
사랑은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시금석이며 세계인식이다. 종교적 용어로 사랑은 자비이며 아가페이며 인이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크면 클수록 상처와 아픔이 배가하는 한편 세계에 대한 인식은 깊고 넓어진다. 위의 시는 바로 그러한 존재와 존재간의 상대성을 자각함과 동시에 타자에게 능동적으로 다가서는 '크나큰 사랑'과 끊임없는 타자와의 교섭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출발점인 것이다. 사랑의 근원이 생득적인 것이냐 아니면 후천적인 것이냐에 대한 논의를 이 자리에서 펼칠 수는 없겠다. 단지 시집에 나타난 바에 충실히 따라가 본다면 시인이 체득한 사랑의 근원이 어머니임이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있다. 어머니는 '부재중인 어떤 대상'으로서 현존하지 않으므로서 그리움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일정부분 삶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집에서 어머니는 새벽달, 가을, 지는 꽃, 강과 바다, 길 등 소멸의 심상으로 드러난다. 어머니는 수 많은 시인들에 의해서 다루어진, 희생, 무조건적 사랑의 소여자 등으로 익숙해져 있거니와 새롭게 그러한 주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소운이 인식하는 '어머니'는 통상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형상으로 시집 전체에 산견된다.
목화를 닮은 어머니 하얀 머리
밭고랑을 따라 절을 하듯 지나간 뒤로
광주리엔 하얀 꽃이 소복하게 쌓이고
그렇게 세월도 쌓이고
- 시 「목화밭」 2 연
백색이 주는 순결과 평화의 이미지는 목화의 포근함과 어머니의 백발과 오버랩 되면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과 절을 하듯 땅에 땀을 쏟는 절박한 노동의 힘겨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는 노동의 힘겨움과 가난으로부터 비롯되는 슬픔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달과의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셨고
그 모습이 너무도 엄숙하여
나는 또 하나의 달맞이꽃이 되어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 시 「어머니.1」 4연
달과의 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길흉화복이 다 저렇게 차고 기우는 것임을 알아 마음의 노여움을 녹여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달은 빛을 주지만 태양과 같은 열기는 없다. 열기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애써 감추려는 성향과도 맞아 떨어진다.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또 하나의 달맞이꽃이 되어 바라보는 화자는 이미 어머니의 운명이 자신의 것임을 일찌감치 체득한 것은 아니었겠는가. 삶의 고단함을 안으로, 안으로 새기되 결코 눈물이나 한스러움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강건한 여성상을 추출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의 시 「존재의 이유」에서 표현된 바대로 나는 수많은 타자에게 아내, 어머니, 고모, 올케, 숙모 등등의 이름으로 관계 지워지고 그에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이름의 무게 때문에 억눌리며 허명과도 같은 누구의 그림자로 남을 뿐이라는 허망함과 소외감으로 남는다. 시 '주말 오후' 에서 남편은 야유회를 떠나고 아이들은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가버린 주말 오후에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젼을 켜고 앉아 만만세를 부르는 시니컬한 상태로 빠지는 정황을 묘사하지만 그 때에도 일상적 삶의 권태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어머니로 표상되는 사랑을 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골무」라는 시는 손으로 손수 꿰매어 만든 골무를 시집갈 때 예물로 주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무심코 반짇고리를 열어 보면서 깨닫는 시간을 노래한다. 자칫 일상사에서 무덤덤하게 매몰되기 쉬운 사랑은 장식적이거나 현란하지 않으며 쉽사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은은한 그 무엇으로 인식하게 되므로서 삶의 건조함과 허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렇게 어머니로 받은 사랑은 살아가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지만 어머니의 부재와 사랑은 언제나 결핍으로 빚어지는 그리움을 수반한다. 이승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 주는 불완전성과 온전히 자신의 사랑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의 부재를 암시하면서 자아의 부단한 각성을 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 길 위에 서면』 3 부와 5 부에 제시된 많은 시편들은 화자가 기대고 싶어하는, 삶의 고단함으로 인하여 기대어야할 대상의 부재를 직정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①오랜 적막 아무 말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삶도 있거니: 「난,꽃을 피우다」
②긴 밤을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새벽달」
③머뭇거리다 그냥 지나쳐 버린 첫 사랑처럼: 「달밤」
④서운히 뒤돌아보면 그대 속삭임 물소리되어: 「겨울 강가에 서면」
어찌 보면 자폐적이기도 한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과 격정적인 진술은 시적인 긴장을 저해하면서 현실감을 저해한다. 머뭇거리다 지나쳐 버린 첫 사랑이나 바라보기만 하는 삶은 여성적이면서 수동적인 태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오늘날의 삶에 있어서 그리움의 정조는 한소운 시의 지평을 더 멀리 잡게 하는 첩경이 되기도 한다. 삶의 토양이 되는 사랑은 어쩌면 비극적으로 보여지는 강렬한 그리움으로 썩어가면서 새로운 삶의 뿌리들이 활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모하리만큼 개인적이고 사소한 감정을 맴돌면서도 그것을 헤쳐나가는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시의 건강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3. 길,저 편의 세계
『그 길 위에 서면』은 여러 방향의 세계를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지금까지 언급한 내재적이고 사적인 풍경 뿐만 아니라 자신과는 무관할 듯 싶은 떠나지 못하는 길 저편의 풍경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짚어 보아야할 사항이다. 즉 지금까지의 폐쇄적인 개인적 공간에서 거시적인 시공간으로 시적 관심을 이동시키는 저력도 눈에 띄는 것이다. 남북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자유로 가는 길」에서는 실향민 아픔을, 「어떤 해후」에서는 영변 조선족 친척과의 보호감호소에서의 해후를, 「아버지의 예감」에서는 용케 이산의 아픔을 모면한 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월정리 가는 길」에서는 관광지로 변모한 분단현장의 삭막한 풍경을 그리면서 만만치 않은 시적 관심을 표명한다. 특히 「허수아비」, 「유배지에서의 편지」는 또 다른 시적 변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보길도는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견뎌내면서 고독한 선비정신을 벼려내었던 역사적 고향이다. 시인은 그 옛날의 유형의 땅 보길도에서 누구나 이 세상으로부터 격절되어 있다는 성찰을 붙잡는다. 도시화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서울로 표징되는 대도시는 익명성, 몰개성, 해체되는 자아를 눈물겹게 바라보아야 하는 세계이다. 소나무와 같은 절개를 가진 친구가 없고,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 편지와 같은 존재의 부재, 그럼에도 참다운 인간과 세계를 무지개에 헛발 짚는 한 사람이 있음을 희망하는 이 시는 한소운 시의 미래지향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허수아비」는 「'유배지에서의 편지」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허망함을 허수아비에 빗대어 노래하므로서 통렬한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허수아비도 혁명을 일으킨다/ 바람아 불어라 살아봐야겠다/뒤뚱거리며 전원카페 입간판으로/ 큰 길가로 나선다 /쓴 웃음을 판다
-시 「허수아비」 일부분
이 시는 부지부식간에 허수아비로 전락해 버린 오늘의 삶을 우화적으로 그려냄으로서 비판적 사색을 거듭하는 시적 변모를 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길 저편에 자리 잡은 현실의 암담함은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길 떠남'의 판단중지를 요구하게 한다. 절 가는 길」 연작은 그런 면에서 여러모로 특이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시인은 국내의 여러 사찰과 중국, 베트남의 사찰을 순례한 경험을 연작시의 형태로 선보인다. 일상적인 생각으로 사찰을 찾는 행위는 佛力에 의지하는 發福과 祈願에 그 뜻이 있게 되고 고승대덕들의 수행을 參見하므로서 세속의 풍진을 씻고자 하는 정화의 의미를 담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절을 찾아가서 얻게되는 안정과 평화, 또는 종교적 진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찾아가는 도정에서의 범박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무게를 둔다.
가까이 갈수록 불이문은 속세에 가깝습니다/요즈음은 내 마음 속 망월사에 갑니다: 「절가는 길. 2 - 도봉산 망월사」 라든지 ‘아! 드러눕고 싶었다 그 곁에/황홀한 절정의 뒤끝 같은 땀으로 범벅된 이 나른함’ (「절가는 길. 8- 중국 천산 대불」) 에서와 같이 절은 출세간이 아니라 그 곳 또한 세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혜초, 왕오천축국전」에서 이미 드러난 바 이 세상 모두가 내 마음이 가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출세간이며 또한 세간인 것이다.
무위로다/무위로다/ 나고 감이 무위로다 / 한 손은 하늘 가리키고/ 한 손을 땅을 짚으시는 /부처의 미소를 배우려다 / 한나절 주름살이 늘었다
- 시 「절 가는 길 13- 월출산 무위사」 2,3연
無爲는 有爲의 상대개념이다. 무위는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老莊에 가깝다. 불교는 끊임없이 마음 자체를 버리는 無我와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지만 노장은 無爲自然 즉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어지는 자연법칙의 체득을 요구하면서 욕망을 덜어내는 행위에 관심을 둔다. 영육의 안녕을 기원하면 할수록 그 기원 자체가 세속적인 이상 결국은 한나절 주름살이 느는 행위에 다름없는 일상적 삶의 삼독을 깨우치는데 이만한 경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절 가는 길」 연작은 이와 같이 불교적인 모티브와 노장적 사유를 넘나들면서 참신한 시선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은 자신의 내적 성찰과 길 저편의 세계에 대한 관조를 거듭하면서 삶에 대한 빛나는 예지 하나를 거두어들인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생명으로 가득찬 이 세계와 겨울들판으로 상징되는 죽음과 소생의 희망이 그리움의 끝으로부터 풀려나오는 건강한 생명임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 '겨울들판'은 자연은 모든 생명에게 무차별하다는 노자의 생각과 맞물리면서 봄은 文盲이라는 인간이 지녀야할 덕목 하나를 제시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하여
공손히 비어있는 찻잔을 준비하였습니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이름 모를 산골짜기
굽이 굽이 말없이 흘러
이리 합치고
저리 휘돌아온
물의 내력을 더듬어 봅니다
찻잔 속에
하늘과 구름
가난한 마을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숨소리들
맑게 어릴 때
찻잔 속에 가만히
동그라미를 그려 봅니다
처음과 끝이 하나인
동그라미 사랑
안과 밖이 없는
또 하나의 우주가
찻잔 속에 어립니다
- 시 「차를 끓이며」 전문
「차를 끓이며」 는 노자의 上善若水의 뜻을 제대로 빚어낸 빛나는 시이다. 물로서 표현되는 부드러움 속의 강함, 정화를 향하는 포용성과 시작과 끝이 하나인 동그라미로 표상되는 완전한 사랑의 구현을 보여준다. 그윽한 한 잔의 찻잔 속에 뒤섞이는 현실과 꿈의 화해, 나와 타자와의 우주적 결합은 한소운의 현실적 삶과 사색이 한껏 어우러진 성과를 거둠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시세계에 대한 기대를 높이게 하는 것이다.
4. 시인에게
한소운은 ' 아는 만큼, 관조한 만큼만 시를 쓰는' 절제력을 갖춘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사유의 범위 안에서 가진 것만큼 소화해내고 시류에 연연해하지 않고 질박한 시풍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긴 여정을 헤쳐 나가려면 더욱 준비해야할 덕목들도 필요함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너무 쉽게 드러나고 단선화 된 주제의식, 언어와의 사투 끝에서 건져 올려지는 표현의 긴장은 드러냄과 감춤의 경계에서 망설여야 하는 시인의 숙명임을 깊이 아로새겨야 할 문제이다.
한소운은 시인으로서 이제 첫 발을 내딛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지금껏 그래왔듯이 서두르지 않고, 큰소리 내지 않고 사람과 자연과 작은 감성들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만이 걸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우리 시단에 펼쳐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붕우로서 시집 『그 길 위에 서면』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임보 시인의 경구를 함께 되새겨 보고 싶다.
시인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을 모두 이르는 말은 아니다. 나는 시인을 수도사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세상에는 몇 편의 시만 가지고도 훌륭한 시인으로 받들어지기도 하고 수 백 편의 시를 만들고도 아직 시인으로 불리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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