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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의미를 묻는 사진 예술 (1)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1. 08:48

재현의 의미를 묻는 사진 예술 (1)

                                                       

  우리가 스쳐 보내는 수많은 사물들, 풍경, 인물, 장소를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눈으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대상물이 지니는 히스토리를 작가의 눈으로 읽어내는 것, 숨겨져 있는 사물의 히스토리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사진예술이다.

                                                           - 구본창



 사진 촬영은 더 이상 작가들만의 성역이 되지 못한다. 사진기의 매커니즘은 사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진화되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는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소형화되고 경량화 되었다. 더 나아가서 휴대전화까지 카메라가 장착되고, zoom 기능과 뛰어난 해상도, 전송과 저장의 기능의 향상으로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는데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촬영된 영상의 다양한 편집과 수정을 가능하게 하고, 블로그와 같은 인터넷의 기능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개인의 기록을 多衆에게 쉽게 전파할 수 있는 일상적 도구로 친숙해졌다.

 

 이와 같은 디지털기술과 결합된 사진은 우리 생활 곳곳에 그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게 됨으로써 오히려 그 자체의 존재나 의미가 은폐되거나 무의식의 세계로 가라앉아 버리는 현상에 직면하게도 된다. 다시 말하면 사진이 수반하는 이미지의 자극이 강렬해지고 트릭이 정교해지지 않는다면,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은 사진이 주는 이미지에 눈을 돌리지 않게 된다. 수만 분의 일초동안의 운동을 느린 화면으로 잡아내거나 정지시켜 볼 수 있다든 지, 신체 깊숙한 곳까지 카메라가 들어가서 촬영한 세포조직의 현란한 화면을 접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경이로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이제 대중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 창조의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기를 열망한다.

 대중들은 그들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던 간에. 그들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는 동안에는 사진예술에 대한 구본창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이 촬영 보턴을 누를 때, 보턴을 누르고자 하는 의사결정 구조 속에는 그들이 촬영한 사진이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인지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기록에 대한 욕구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본창이 말하고 있는 것 '히스토리'이다. '히스토리'는 대상물이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구조와 그 구조의 연속성에 대한 탐구이다. 사진이 수행하고자 하는 이러한 탐구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볼 때 가장 강력하고 이상적인 재현의 수단이 된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임을 수락하는 한, 그 이성의 기능이 관념이라는 독특한 정신 현상을 생성하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은 재현이라는 難題를 풀어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인간의 재현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어 내려져 왔다. 언어를 통하거나, 그림, 소리, 더 나아가서 인간이 만든 어떤 구조물에서도 인간이 꿈꾸어 왔던 실재의 증명은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고, 지금도 그런 열망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재현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사진작가와 아마튜어의 길이 달라지고, 재현 작업의 연속성과 논리성에 따라서도 그 구분은 명확해진다.

하여튼 재현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고, 사진은 찰라적이고 직관적인 작업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재현은 단순한 표상행위를 넘어 자신의 이해를 제시하고 묘사하는 것 일반에 관계한다. "무엇을 그 자체로 생동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규정할 때 재현은 모사, 상징, 기호, 그림 등은 제시의 형태는 물론 그 내용과도 관계된다. 그러기에 이미지의 세계는 표상이란 의미보다는 제시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지란 말은 그리스어 "eikon"에서 라틴어 "imago"로 옮겨진 개념에서, 또는 simulacrum"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실재보다 상징을, 수단적 가치보다 상징가치에 주목한다.  

    

                                「매트릭스적 상황에서 인간의 실존」, 신승환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재현의 의미는 몇 갈래의 조류를 형성해 왔다. 위의 인용 또한 재현을 "제시성"으로 보는 한 갈래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현과 짝을 이루는 사진의 위치를 "제시성"으로 보는 관점은 사진의 영역을 설정하는데 유용한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시성"을 재현으로 정의하는 갈래 이외에도 사진의 의미와 친근하게 접근 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음은 분명하다. 인간을 표상하는 주체로 설정하고 우리 앞에 표상된 것을 객체로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은 측정되고 계산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에 의해 장악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재현의 의미는 우리 앞에 주어진 표상을 매개된 현실로 인정하는 "매개성"의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재현의 의미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변과 대리의 관점으로서 군주를 신의 통치를 대변하는 존재로, 국회의원은 민중의 의사를 대리하는 존재로 사제를 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들을 재현의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재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벗어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재현" 그 자체야말로 인간의 이성을 구성하고 이성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같은 口述 경전, 헤로도토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기술, 방대한 철학적 사유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암각화를 포함하는 회화의 양식, 고인돌, 음악 등등의 모든 인식 활동은 움직이지 않는 어떤 현상 - 철학적으로는 진리-을 포착함으로써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사진기의 발명이라는 획기적 사건으로 인식의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진이 가지는 複寫의 실체는 오랫동안 인간이 염원해 왔던 理想에 근거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훗날 영국의 헛셀 경이 명문화한 '사진 photography'이나, 니엡스가 명명했던 '헬리오그래피 heliography' 그리고 또 다른 사진 발명가 탈보트가 명명한 '光線化 photographic drawing'등도 모두 빛에 반응한 화학성분 혹은 상을 고정시킨 화학적 원리에 종속하고 있다. 사진이란, 빛이 화학적 감광물질 위에 자연적으로 그린 그림이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카메라(발명)보다 화학적인 원리(발견)가 더 크게 작용했다. 사진은 결코 카메라가 아니다. 포토그램처럼 카메라 없이도 사진이 만들어지듯이 사진은 빛 그림 그 자체다. 포토그램이 발명이 아닌 발견으로 말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이야기』, 진동선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인 다게르 L.J. M Daguerre1789 - 1851에 의해서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진'은 재현에 관련된 관념이거나 원리이기 때문에  발명될 수 없는 것이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세상을 이해하는 발명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듯이 '사진' 그 자체는 발견이다. 죠셉 니엡스가 J. Niepce 1816년 그의 형 클로드 니엡스에게 쓴 편지의 첫 문장이야말로 사진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난 발견했어. 종이 위에 음화로 영상을 재현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완전히 빛에 의해 그려진 영상을 약산으로 고정시킨 것이야"


다게르나 니엡스는 다같이 사진을 발견했다고 언명했다가 후에 사진을 발명했다고 정정했다. 분명히 사진의 원리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니엡스였고, 그 사진의 특허권을 최초로 획득한 사람은 다게르였다. 발명품이나 기술은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발견된 원리 그 자체는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과 발명의 중대한 차이점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단순히 대상을 복사하는 기술로 단정해 버린다면, 인간이 수 천 년 동안 사유해 왔던 진리의 문제는 이성의 영역을 훌쩍 넘어서 버리는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인간의 사유는 진리의 존재 여부와 확정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지 발명해낼 수는 없는 것이며 발명의 영역에 인간의 사유를 편입하는 순간에 인간은 기계와 같은 物化의 과정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진을 예술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근거는 카메라가 지니고 있는 기계적 엄밀성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구현해 내는 이미지가 인간 사유 활동의 중추적인 기능인 직관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관은 오관이라는 신체적 매커니즘에서 일으켜지는 반응이지만 그것을 수치로 계량화하거나 도식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신경조직의 활성화나 내분비 물질의 변화라는 과학적 修辭는 너무 공허하지 않은가?

인간의 관념을 재현해 주는 기능이 단지 '피사체를 찍는다' 라는 행위뿐 만 아니라 찰라와 찰라의 틈에서 빚어지는 직관의 빛으로 던져짐으로써, 바로 그 때. 사진은 인간의 삶을 가치화하는 예술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한 편으로 사진의 눈부신 발전은 여러 방면에서 그 위력을 더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초록으로 물들어 있는 지구를 촬영한다든가, 지구 표면의 구석구석을 정밀하게 정찰할 수 있게 한다든가 하는 테크닉은 동영상이라는 진일보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선물로 안겨 주었다. 이렇게 사진이나 사진의 원리는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의식 자체를 마비시키거나 더 큰 자극을 요구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사진의 위상은 앞으로도 더욱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이 틀림없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사진의 무한한 합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인간이 꿈꾸어 왔던 환상의 무한한 창조를 실현하게 되었고, 또 한 편으로는 예술로서의 사진의 경계를 어디로 삼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기도 한다.


사진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문제는 다시 철학적 영역에서의 재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작품으로서의 사진 작업에서 디지털 기술의 어디까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허용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단지 작가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진의 프로세스process에 있어서 아날로그 방식만을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포토샵 등의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디지털 방식을 배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이미 상업 사진분야에서 상당 부분 진행되어오고 앞으로도 확산되어갈 것이 분명한 디지털 프로세스를 예술의 영역에서 제어할 마땅한 근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사진 작업이나 뉴 웨이브의 경향은 사진을 '피사체를 찍는' 행위에서 사진을 만드는 행위 making photo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과 같은 인접 예술과의 혼합, 장르 파괴 등의 기법을 사용하는데 디지털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전개될 '사진의 영역 확대와 예술성'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기형사진이야말로 내가 가장 많이 찍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대상중의 하나로서 내게는 지독히 흥분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곤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 중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들은 수치심과 경외심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기형인들에 대해서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형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