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고흐의 낡은, 혹은 구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 22:55

고흐의 낡은, 혹은 구두

     

 고흐의 <구두>라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암스테르담이 생각난다.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운하들, 그 사이를 떠다니는 작은 유람선들, 안개 자욱한 유람선에 늙은 한 쌍의 남녀가 램프 불에 서로의 얼굴을 비추어보고 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한 사람이 웃으면 같이 웃고,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면 그 손짓을 따라 얼굴이 돌려지고…

  고흐처럼 불행했던 사람이 있을까? 평생을 그림을 그려 얻은 가난과 고독, <구두>는 포장되지 않은 길을 배경으로 낡은 가죽 구두 한 켤레를 통해서 그 구두의 주인이 걸어왔던 삶의 표정을 가장 편안한, 그러나 가장 어두운 자세로 보여주고 있다. 그 구두를 신었던 사람은 누구이고, 그 누군가가 끌고 갔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그 구두가 끌고 갔던 것은 육체를 가진 한 인간을 넘어서 그 인간의 영혼이 아니었던가?

눈부신 햇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날보다 앞으로 살아가야할 날이 적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아침 햇살은 삶의 경이로움으로 온다. 좋은 날이거나 흐린 날이거나 그 빛은 나에게 평화를 준다. 빈 곳을 채우려고 덤벼들었던, 소유함으로서 완성되는 것으로 믿었던 사랑이 공허와 무소유의 다른 이름임을 알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오래 살아보아야 할 것은 아닌지.



러닝머신 앞에서

그런 때가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어디론가 급히 떠나야할 듯한 자세로

벅차오르는 가쁜 숨을 두 손으로 모두었던 그 때가

거울 속으로 거울 속으로 바보같이 뛰어들어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그 때가

보일 듯 말 듯 굽은 불혹의 언덕을 넘어

마음 밖 초여름 밤나무 처럼 진득한 냄새를 풍기며

아직도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햇살로 세수를 하고 빗질을 하고 러닝머신 위에 선다. 반 바지에 소매 없는 셔츠, 그리고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조금은 우울해 보이고 피곤해 보이는  한 사내, 나는 거울 속에 갇힌 나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뛴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해서 달리고 또 달리지만 나는 언제나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얼굴이 땀에 젖고 숨이 가빠온다. 짐승처럼 달려가며 욕망에 불타오르던 그런 때가 있었는가, 그리움은 길이 없어서 생기는 병인가? 아닌 것이다.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그리움의 대상이 바로 나의  영혼 깊은 곳, 뒤돌아 볼 수 없는 등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의 노인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독일인, 영어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주고 받은 편지들, 그들이 암스테르담에서의 만남은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행복해 할 것이다. 고흐의 구두 한 짝씩으로 그들은 그리움이라는 보석을 가슴에  담았을 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