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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의 철학 (3)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4. 00:24

버클리의 철학 (3)


나는 지금 이 네 가지 견해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설사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비논증적인 추리와 확률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한 연후에야 비로소 내려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루어 온 사람들이 흔히 범한 잘못을 지적하려고 할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버클리에 의하면 오직 마음과 정신적인 사건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또다른 이유로 헤겔과 그의 후계자들도 지지하였다. 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구 상에는 생명이 잇기 전에 시간이 있었다」는 말은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마치 「곱하기 문제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는 부인할 수 없다. 관찰 할 수 있고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관념론을 세울 수 없으며, 가능하다면 실천의 방법으로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증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실증은 지각대상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실제의 또는 가능한 지각 대상이 없이, 어떤 것에 관하여 명제를 세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와 같은 견해는 엄밀히 말해서 위에서 서술한 네 가지 주장 가운데 첫째 것에 속하며,  우리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留意한 것 이외의 사물에 대하여 운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논의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실용적인 근거에서 주장한다는 것으로, 이 학설에 있어서의 결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증의 문제와 또 그 지식과 관련된 문제는 어렵고 또 복잡하다. 그러므로 당분간 이 문제를 나는 보류하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학설 주에서 넷째 것은 아무도 지각하지 않은 사건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그릇된 주장에 의해 변호되는 경우도 있다. 즉 인과율은 선험적 a prioi으로 알 수 있으며, 만일 지각되지 않은 사건들이 없다면, 인과법칙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인과율은 선험적 것이 아니며, 어떤 규칙성이 관찰되더라도 지각 대상에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설사 물리학의 법칙을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각대상과 관련하여 기술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이상하고도 복잡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근가지 물리적인 법칙에서 기대하던 연속성의 성질도 없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결론은 이러하다. 즉 위에서 말하는 네 가지 학설에 대한 아 아프리오리한(선험적) 異論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실용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학설 사이에는 실용적이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어느 것이나 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언어상에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거론되어야 할 문제이다.

 정신이나 물질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부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잇다. 정신이란 관념론자가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물질이란 유물론자가 그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독자가, 관념론자는 덕이 잇고, 유물론자는 악하다는 것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을 것 같다.

 물질에 대한 나의 정의는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물질을 정의하여, 물리학의 방정식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정식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물리학도, 물질이라는 개념도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실체를 부정한다면 물질이란 하나의 논리적인 조직체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건 - 이 중에서 어떤 것은 추리된 것일 테지만-  들로부터 구성된 어떤 조직체일 수 있는가의 여부는 결정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정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실체가 부인된다면, 정신도 어떤 사건들의 무리 群  또는 조직체라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조직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정신적이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그러한 현상의 특질인 어떤 관계의 결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정신적이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그러한 현상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기억 memory 을 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 비록 너무 단순하기는 하지만 -한 정신적인 사건을 기억하거나, 또는 기억되는 사건이라고 정의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떤 주어진 정신적인 현상에 속해 잇는 정신이란, 기억의 사슬로 주어진 일련의 정신 현상과 관련된 事件群 일 것이다.


 위에서 내린 정의에 의하면, 한 정신이나 일련의 물질은 다 한 사건군 이라는 것을 볼 수 잇을 것이다. 모든 사건이 어떤 종류의 무리 group 에 속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두 무리에 속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도 없다. 따라서 어떤 사건은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닐 수 있으며, 또 어떤 사건은 정신이기도 하고 물질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세밀히 고찰 해 보아야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B. 럿셀,  최민홍 역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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