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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의 철학(1)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 21:31

버클리의 철학


 

 조오지 버클리 George Berkeley 1685 - 1753는 철학에서 물질의 존재를 부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여러 가지 독창적인 주장으로 이 물질을 부인하였다. 그에 의하면, 물질적인 대상은 오직 知覺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한다.

 이 경우, 예컨대 어떤 나무든지, 아무도 그 나무를 보는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기를 중지할 것이 아닌가 하는 반대 의견에 대하여 그는 신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물질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직 단편적인 생애를 갖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주목하면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가 우리가 보지 않으면 갑자기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신의 지각으로 말미암아 나무나 바위나 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로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였다. 로날드 녹스 Ronald Knox 의 오행 민요 와 이에 대한 버클리의 답변은 그의 물리적인 대상에 관한 학설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신은 무척 신기하게 여기리라.

뜰 안에 아무도 없을 때

,

거기 전과 다름없이

나무가 그냥 서 있는 것을 보고


버클리가 대답하기를


친애하는 선생이여,

당신이 놀라는 것이 이상하구려

나는 언제나 이 뜰에 있어요.

그리고 이 나무는 계속해서 존재하겠지요,

당신의 충성스러운 신이

언제나 이 나무를 보고 있으므로.


버클리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22세 때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다. 그는 궁정에서 스위프트로부터 선사로 재산의 절반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는 미국에 가서 버뮤다에 대학을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로데 아일랜드Rhode Island에서, 3년 동안 지낸 다음에 1729 ~ 1731 이 계획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의 유명한 말은 그가 쓴 것이다.


帝國은 서쪽으로 옮겨 갔다.


이 말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1734년 크로인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콜타르 수 tar -water 때문에 철학을 버렸다. 그에 의하면 이 콜타르 수에 병을 고치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원기는 주면서도 취하지 않는 술을 공급한다고 말한 것은 이 콜타르 수였다. 후에 추우퍼가 차 tea에 적용시킨 것과 같은 情趣라고 하겠다.

 

 그의 훌륭한 저술들은 , 다 그가 젊었을 때 쓴 것이었다. 『신 환상론』(A New Theory of Vision)은 1709년에 쓴 것이다. 『인간 지식의 모든 원리』(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는 1710년에,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 』(The Dialogues of Hylas and Philonus)는 1713년에 쓴 것이다. 그의 28세 이후의 저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대단히 재미있는 작가로 매력 있는 글을 썼다.


 물질을 부인하는 그의 주장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가운데서 첫 째 대화와 둘 째 대화의 첫머리만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 뒤에 서술되어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버클리는 내가 고찰해 보려고 하는 부분에서 어떤 중요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럴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내리려는 결론을 위해 전개하는 완전한 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모든 실재가 정신적 mental 인 것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가 논증하려고 하는 것은 아렇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character을 지각한다. 그리고 성질은 지각하는 사람과 상대적이다.


 나는 우선 이 대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그대로 설명하고 나서, 다음에 비판을 하고, 끝으로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내 견해를 밝히려고 한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하일라스는 과학적으로 교육을 받은 상식을 대표하고, 필로누스는 버클리 자신이다.

 두 사람이 몇 마디 정다운 말을 주고 받은 연후에, 하일라스가 하는 말이, 자기는 필로누스의 몇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견해, 즉 물질적인 실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외친다.


 ‘대관절 물질과 같은 것을 믿지 못하다니, 이런 잠꼬대가 어디 있어요. 그건 상식에 어긋나요. 이따위 회의주의가 어디 있어요?“

 필로누스가 대답하는 말이 자기는 감각적인 사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색깔의 원인을 보는 것이 아니고, 소리의 원인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두 사람은 감각이 추리와 다르다는 데 의견이 일치된다. 필로누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즉  우리는 視覺을 통해서는 빛과 색깔 및 모양 등을 지각할 뿐이고 청각으로는 오직 소리를 지각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속성을 제외하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남지 않으며, 또한 감각할 수 있는 사물은 이 감각적인 속성이나, 혹은 이 감각적인 속성의 결합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필로누스는 하일라스의 존재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견해에 반대하여 「감각되는 사물의 실재는 지각된 것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 所與은, 정신적이라는 것이, 필로누스가 여러 가지 감각을 상세히 검토하고 나서 주장하려는 첫째의 문제이다. 그는 뜨겁다거나 차다는 것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몹시 뜨거운 것은 고통을 준다. 그리고 이 고통은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뜨거움이란 정신적인 것이다.

 진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논의는 미지근한 물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로 강화된다. 한 손은 뜨겁고 한 손은 찰 경우에, 이 두 손을 동시에 물에 넣으면, 한 손에는 물이 차게 느껴지고 또 한 손에는 뜨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물은 동시에 뜨겁기도 하고 차기도 할 수는 없다.

 하일라스는 「뜨겁고 찬 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것을 인정하고 말문이 막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감각적인 속성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한다.

 필로누스는 다음에 味覺인 경우를 예로 든다. 그는 말하기를 달콤한 미각은 쾌락을 주고 쓴 미각은 불쾌를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쾌락이나 불쾌감은 정신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주장은 嗅覺에도적용된다. 왜냐하면 후각도 쾌. 불쾌를 느끼기 때문이다.

 하일라스는 소리 자체만을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는 말하기를 소리란 공기 속에 있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것은 진공 속에는 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와 그 소리 자체를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직접 듣는 소리와 우리 밖에 있는 소리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로누스는 말하기를, 하일라스가 실재 하는 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운동이므로 이것을 보거나 느낄 수 는 있지만, 들을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소리가 아니다.  하일라스는 이 점에 대해서도 “소리도 마음이 없이는 실재할 수 없다는‘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어서 생각에 대하여 논의한다. 하일라스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 봐요, 색깔의 경우는 매우 달라요. 우리가 색깔을 대상에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일이 어디 있나요?”

 마음 밖에 있는 실체는 색깔 - 그 위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 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로누스는 이 견해를 무난하게 처리해 버린다. 그는 저물녘의 구름을 예로 든다. 그것은 금빛으로 불그스레하게 보이지만, 거기 가까이 가면 그런 색깔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같은 물건도 현미경으로 보면 달라지고 黃疸病에 걸린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노랗게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곤충들은 우리보다 더 작은 물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일라스는 이에 대하여 , 색깔은 대상에는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광선에는 있다고 한다. 광선이란 하나의 가느다란 액체와 같은 물질이라는 것이다 필로누스는 지적해 말하기를, 색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색깔은 하일라스에 있어서는 우리가 보는 붉거나 푸른 것과는 다른 어떤 무엇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하일라스는 제 2속성의 전반에 대하여 양보를 한다. 그러나 제 1속성에 대하여, 특히 모양이나 행운 같은 것은 외부의 실체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한다. 필로누스는 이에 대하여 사물은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 볼 경우에는 크게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작게 보인다. 그리고 같은 운동도 어떤 사람에게는 빠르게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게 보인다고 하였다.

 하일라스는 여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자기는 감각과 대상 object 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과오를 범하였다고 한다. 그도 지각하는 행동 자체는 정신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각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색깔은 마음 밖의 어떤 비사고적인 실체 unthinking substance 속에 하나의 실체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필로누스는 이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감각의 직접적인 대상 - 즉 어떤 관념이나 또는 관념의 결합-이 비사고적인 실체 속에 존재하거나 전혀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된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필로누스는, 몇 페이지 내려가서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직접으로 지각되는 것은 관념인데 관념이 마음 밖에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들은 얼마 동안 실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 하일라스가 다시 視覺의 문제로 화제를 돌린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볼 때에, 일정한 거리 란에 잇는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필로누스는 그것은 바로 꿈속에서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꿈도 역시 정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距離는 시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결과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경우에, 그에게는 시각의 대상이 거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일라스는 두 번째 대화의 첫머리부터 두뇌 속의 어떤 形跡 이 감각의 원인이라고 말하자 , 필로누스는 이에 대하여 “두뇌도 역시 감각적인 사물이며, 따라서 마음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대화의 나머지 부분은 별로 재미가 없으므로 고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버클리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버클리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은 물질적인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색깔이나 소리 같은 것을 지각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정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마음 속에」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 가운데서 첫째 부분은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런데 둘째 부분에는  「정신적」이라는 말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그는 실제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물질이 아니면 정신이며, 물질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은 없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견해 속에서 성질을 지각할 뿐이며, 사물이나 또는 물질적인 실체 같은 것을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흔히 하나의 사물에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다른 성질들도 이 성질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실체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전혀 없다는 주장은 인정할 만한 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주장, 즉 감각적인 속성 - 제 1속성도 포함하여 - 이 정신적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되며, 그 진리성도 생각해 볼일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는 논리적으로 입증하려는 부분과 경험적으로 증명하려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먼저 전자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필로누스는 ‘무엇이든 직접 지각되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다. 그런데 관념이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여기서 관념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긴 논의를 필요로 한다. 만일 사상이나 지각이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 되어있다면, 마음을 주관과 동일하게 볼 수 있을 것이며, 마음 「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마음 「앞」에만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해야할 것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우리는 지각하는 행동과 지각되는 대상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는 정신이고 후자는 정신이 아니라는 견해를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매우 애매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적인 실체를 버클리처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견해를 반박할 만한 적당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감각의 어떤 직접적인 대상은 , 비사고적인 실체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마음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라고 한다.

 여기에는 다음의 비유와 같은 오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카는 아저씨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제 그를 한 조카라고 하자. 이 경우 그에게는 논리상 한 사람의 아저씨가 있어야 한다」

  그가 조카라는 것은 논리상 필연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와 같은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것이 감각의 대상일 경우에는, 마음이 이와 관련되어있다. 그러나 그 사물이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

 버클리는 상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일라스는 말하기를, 자기는 남이 지각하지 않는 어떤 집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마음 속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필로누스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하일라스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그의 마음 속에 있으며 결국 이 집은 정신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하일라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B. 럿셀,  최민홍 역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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