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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에서 생각하는 진화와 우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2. 21. 22:43

[생물학에서 생각하는 진화와 우연]


현재와 동일한 생명의 역사는 재현될 수 없어

 정민걸 공주대·생태유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루키포스(Leucippus)는 “아무것도 우연히(random)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은 이유와 필요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운이나 우연이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연의 사건들은 인과로 이어진 필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목적론은 완전성을 전제하는 본질주의로 중세 유럽의 신학과 결합해 신의 의도적인 창조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17~18세기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기계적 세계관과 이슬람 문화의 유입으로 종의 변화를 인식하지만 신학은 여전히 종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설령 종의 변화를 인정하는 경우도 지적 설계론처럼 신이 계획하고 안내하는 변화를 주장합니다.



한편 19세기 라마르크와 다윈은 종의 변화를 인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라마르크는 단순한 종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형태가 더 복잡하게 선형적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필연의 목적론의 주장입니다. 반면 다윈은 다양한 새끼들 중 일부가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하면서 한 종이 다양한 종으로 분기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여전히 필연의 결과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연의 현상으로 종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선택설의 기본적인 요건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종의 개체들이 서로 달라 변이가 있습니다. 이 변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유전되는 변이입니다. 둘째, 한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개체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새끼들이 태어납니다. 따라서 새끼들 사이에 생존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새끼들 사이의 경쟁에서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가 살아남아 새끼를 낳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대는 생존한 개체를 더 닮게 돼 종이 환경에 더 잘 적응하게 변합니다. 이런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선택의 설명은 종의 변화를 필연적인 변화로 오해하기 쉽게 만듭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적응 과정으로 정의된 자연선택은 분명 목적하는 결과를 낳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연선택에 의해 최적자가 생존한다는 극단적인 설명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생명의 역사를 획일적인 필연으로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순환논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특정한 종에서 관찰된 현상을 자연선택에 의한 유일한 적응 방식인 것처럼 사람 사회에 직접 적용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해 재미있는 우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종들이 처한 상황, 즉 환경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령 같은 상황이라도 현상은 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우연히 남는 것이지 필연의 유일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오해가 발생할까요. 자연선택은 관찰된 현상을 생존 목적을 달성한 결과라고 인과론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의도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우연히 하나가 남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벼락이 칠 때 용감하고 활발한 원숭이는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포효하며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이 더 큽니다. 하지만 소심한 원숭이는 숨었기 때문에 살아남아 우두머리가 될 확률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이 자연에서 관찰된 현상을 유일한 필연의 결과로 단정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다윈이 자연선택설을 발표한 19세기에 널리 인정된 혼합 유전 방식에 반해 신이 창조한 대로 유지되는 유전 입자를 입증한 멘델의 유전 원리가 발전하면서 종의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자연선택설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 것은 역설적입니다. 즉, 20세기 들어 집단유전학과 분자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 빈도를 직접 측정하고 유전자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면서 자연선택설은 더욱 널리 인정됐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자연선택설은 크로우(James F. Crow)와 기무라(Motoo Kimura)에 의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자연에 돌연변이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기무라는 돌연변이의 대부분이 자연선택에 대해 중립이라는, 즉 적응 면에서 중립적이라는 중립설을 주장하면서 종의 역사가 한 조의 돌연변이 군에서 다른 돌연변이 군으로 전이해 가는 확률적인 과정, 즉 우연의 현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전히 자연선택과 중립설설의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연선택설이 생명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된 이론으로 인정되면서 중립설이 부분적으로 인정되는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생물이 단순히 유일한 인과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 중 우연히 실현된 하나라는 점은 명확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조건이 같더라도 현재와 동일한 생명의 역사는 재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민걸 공주대·생태유전


오클라호마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이해하는 생태학: 자연과 사람의 본성을 찾아서』 등의 저서와, 논문으로 「환경철학에서 생태적 접근의 한계」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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