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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유교 윤리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6. 22. 18:37
칸트와 유교 윤리 /나호열


1. 들어가는 말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동양과 서양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묶여져 가는 추세에 놓여져 있다. 이는 물론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의 문명이 동양을 포섭하는 양상이고,대부분 후진국인 동양의 여라 나라들은 서양의 발전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화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슈팽글러 Oswald Spengler 는 그의 저서 서구의 몰락 The Decline of the West를 통하여 필연적인 서양 문명의 몰락을 예견하였다..슈펭글러는 서구의 제국주의와 산업주의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으로 거대금융자본만이 전적으로 자유롭고 아t무데도 묶여 있지 않으며 결국에 가서는 돈과 피의 대결을 통하여 서구는 몰락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산업혁명으로 부터 출발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데올로기를 통합하고 문명을 통합하려고 하면서 충돌을 야기한다.후꾸야마 Francis Fukuyama 는 자본주의를 통하여 인간의 자기실현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자유민주주의 꼽는다.또 헌팅턴 Samuel Huntington 은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에서 서구는 개인주의,자유주의,의회주의,인권,평등,자유,법치,민주주의,자유시장에 가치를 부여하여 이를 전 세계에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반면,다른 문명들은 이에 저항하므로 문명간의 충돌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문화나 문명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지리적,환경적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구화를 지향하는 동양의 전통은 쉽게 와해될 수 없는 것이다.
헌팅턴은 서구문명과 기타 아프리카,중남미,중국과 한국,일본의 문명을 대별하면서도 서구인들은 ‘문명인’의 범주에 기타 지역의 문명권을 ‘야만인’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후꾸야마는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문명관을 들어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들을 저신뢰사회로,미국과 같은 나라를 고신뢰사회로 나누고 있다.그럼에도 그는 미국사회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로 인해 사회의 친화력이 저해 당하고 있고,신뢰가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친화력의 원천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관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기독교 신앙에 관대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중국과 일본의 오랜 유교의 전통은 따라서 더 이상 배타적일 수 없다..
과연 개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그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공동체의식을 지닌 고루하다고 폄하되어온 유교의 전통윤리가 상호 보완적이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은 없는가?
월러스턴 Immanuel Wallerstein은 역사적 자본주의 Historical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며 만물의 상품화는 인간의 욕망을 幻影化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물질적 풍요 또한 소수의 선택된 사랍들만의 잔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렇다. 서구의 기계화된 문명과 그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성을 되살릴 길은 없는가?
근대 서구 시민사회의 계몽주의적이고 엄숙주의자인 칸트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를 비교하는 것은 동,서양의 융합을 꾀하는 하나의 시도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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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양과 서양의 인간관


인간도 생물인 이상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환경의 지배를 받고 환경을 극복하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지리적 특성에 의해서 인간을 정의하는 방식이나 , 사회를 구성하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방법이 틀려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 서구의 인간관

희랍인들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이전에 생성변화,유전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그 생성의 기본이 되는 ‘존재’가 있음을 탐색하였다.자연의 근원을 찾는 태도는 과학적 사고의 잉태를 예견케하며,과학적 사고를 논리화 하려는 욕구를 가졌다.희랍철학의 출발은 바로 ‘무엇이 있음’에 있는 것이고 그 ‘존재’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 계속 되었다.이러한 앎에의 열망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로 극명히 드러난다. 만물의 척도란 무엇인가? 인간 이외의 사물에 대한 인간의우월성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의미는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상대적 존재‘라는 사실일 것이다. 만인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진리의 기준이 있는가? 인간 개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의 원리가 있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구를 제시한다.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혼과 이성을 통하여 도덕성을 감지하므로서 이성적 영혼의 불멸성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기독교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신이 부여해준 自由의 남용에서 비롯되었다.그로부터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에의 의지에 속박 당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고대 희랍의 사회는 농업을 영위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불안과 미래에의 공포에 휩싸이는 한편 초월적인 神에 의존하는 경향을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삶의 浮動性,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열열한 탐구는 분석적이고 명증적이며 선택적일 수 밖에 없었다.인간 사이의 격렬한 투쟁과 갈등이 첨예화 할 때 이것들을 아우르는 도적적 요구가 점증하게 되고 만인에게 공평히 요청되는 正義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고대 서구사회의 상업주의적 경향은 인간의 평등과 補償에 관심을 두는 태도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인간의 존엄성을 개인의 자유와 독립,그리고 계급적 평등에 두면서 최고의 도덕원리로서 正義를 위에 두고 그에 따르는 인간간의 투쟁을 심화시키는 한편 자연과의 화해와 교류 보다는 도전과 정복이라는 측면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2) 중국적 인간관

동아시아 특히 중국대륙은 농경문화가 자리잡은 지역이다. 농업은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섭과 교감을 필요로 하고 자연과 인간의 생명이 동일함을 터득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현상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아니라 바로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농경사회의 토착성은 자연히‘ 가족’의 의미를 강화 하였고 사회의 각 단위도 가족의 확장으로 인식되었다.이러한 가족 단위는 개인간의 충돌과 갈등을 완화 시키는 역할을 떠 맡았다.
삶의 도덕 양식들은 신에 의해서 내려진 것도 아니고 경험적 지혜의 소산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것 이다. 인간만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존재라는 의식,자신의 생명이 우주의 생명과 하나라는 萬物同體에 있다.




중국 고대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 마음 속의 도덕성인 仁과 그 仁을 따라가야 하는 길인 義를 행하는데 있다. 자연의 질서를 인간사회의 질서로 대치하고 자연과 인간과의 화해를 인간 사이의 갈등 사이에 끼워 넣으므로서 중용의 미덕을 일깨우는데 있었던 것이다동서철학에 대한 주체적 기록 239 쪽 -247쪽 김형효 1985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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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칸트의 윤리 체계道德과倫理의 어휘사용에 있어서 도덕은 개인의 본성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의 형성적 의미로 윤리는 사회내에서 성립하는 공동체적 의미로서 사용하고자 한다.



칸트와 儒家는 어느 면에서는 일치하면서 또 다른 면에서는 불일치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칸트와 유가는 다같이 普遍性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의 측면을 보인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향해 있고 궁극적인 人類愛를 形成하는 것이라면, 유가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仁의 존재라는 점이다.
또 도덕을 함양하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는 노력과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윤리는 그 윤리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적,지리적 배경에 의해서 영향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칸트는 근대적 서구 계몽주이적 입장에서 인간과 자연, 이성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적인 기조하에서선험적이고 추상적 원리에 의한 도덕체계를 수립하는 반면에 유가의 도덕체계는 美德指向的인 체계라는 점에서는 불일치를 보인다.


칸트의 윤리사상 체계는 道德形而上學 原論 1785,實踐理性批判 1788,道德形而上學 1797의 저서를 통해서 확립된다. 칸트는 좋은 것의 분석으로 부터 善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란 능력에 의해 발휘된 것 이며 발휘된 내용이 어떤 의지로 이끌어진 것이냐에 따라 善과 惡이 派生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자체로서 善한 것은 그러므로 “ 이 세상에서 있어서나 이 세상 밖에서나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善意志 밖에 없다. 선의지야말로 이 세상에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므로 선의지를 개발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어야 한다.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의식은 불행을 초래한다. 오히려 선의지를 통해서 향수된 행복이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선의지는 어떻게 인식되어지는가? 칸트는 義務意識을 통하여 의욕하고 행위할 때 나타나는 것이 선의지라고 한다. 행동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종종 의무의식에 맞는 행위를 목격할 수 있다.그러한 예는 자선의 형태로 판별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의 경향성 즉 이타심,동정,애착심 등은
의무의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의무의식은 인간의 경향성을 떠나서 행위의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판별되는 것이다.의무의식 다른 말로 인해서 개인적 성향을 떠난 상태에서의 행위야말로 내면의 淨化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의무의식은 그러므로 의무를 자각하고,의무이기 때문에 의무를 다하려는 행위인 것이다.의무의 자각은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다.
일반적으로 법칙에는 自然法則과 道德法則의 두 가지가 있다. 자연법칙은 지금 있는 자연의 구성원리이며 도덕법칙은 當然의 법칙이다 자연현상이 자연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면,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법칙을 自覺하여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능력 곧 의지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가진 이중적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의 準則 즉 개인이 세운 의지의 주관적 원칙은 객관적 법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도덕법칙은 명령 또는 강제의 형식을 취한다.명령 즉 命法은 무엇인가? 명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假言命法으로서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당한 수단을 충고하는 조건이다. 定言명법은 무조건적인 명령으로서 행위의 결과나 목적에 상관없이 그 명령 자체가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은 정언명법이 될 수밖에 없다.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에 의해서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 칙에 의해서만 행위하라

이것은 주관적 개인적 행동원리가 만인이 承認하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언명법을 기초로 하여 세 개의 실천 원리가 등장한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따라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 처럼 행위하라

법칙의 보편성은 일단은 자연법칙에 어긋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또한 자연법칙에 적용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자살하는 행위는 자연법칙 즉 自愛의 원리에 따라 自己保存의 慾望을 지닌 자연법칙에 어긋난다.


너의 인격 및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할 것 이며,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두 번 째의 실천 원리는 자기와 타인의 인격을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지 말 것을 주장한다.왜냐하면 인격은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적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인격은 존중되어야 한다.


보편적 입법의지로서의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개념

의지는 법칙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그 법칙을 立法하는 자이다.

의지가 그 준칙에 의해서 자기자신을 동시에 보편입법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인간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하여야 한다. 각 개인은 인격성을 지닌 평등성을 부여받고 있다.이것은 국가의 일원으로서도 확대할 수 있다.

우리는 의지에 따라서 도덕법칙에 따를 것을 자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自由여야할 이유는 의지가 어느 한 국면에 종속되거나 지배를 받는다면 의지는 바른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우리의 인식능력이 곧바로 인식할 수 있는 현상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해야한다 라고 의식할 때 그것을 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자유를 의식한다. 의지의 자유는 도덕율의 存在根據이며, 道德律은 자유의 認識根據가 되는 것이다.
자유는 이성이 없는 존재가 자기 이외의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즉 自律인 것이다.
자유는 자율의 존재근거이며 자율은 자유의 인식근거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한다.선한 사람이 행복하고 악한 사람이 불행하여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사례가 무수히 많다. 오늘날 겪는 가치의 顚倒 현상을 보라!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최고선의 개념을 도입한다. 최고선은 최상선 - 의지와 도덕율이 일치하는-과 완전선 -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이중성은 최고선에의 도달은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으로 최상성을 향하여가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의 불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한 편으로 이러한 최상선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완전선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다 오직 神의 존재를 상정 할 때 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서 요청되어야 한다.


4. 고대 유가의 윤리본고에서는 원시유교의 공맹을 중심으로 중용과 대학에 드러나는 도덕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1)인간성의 자각

중국에 있어서 상고시대 사람들은 모든 현상은 인간의 의사가 아닌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하늘에 대한 畏敬으로부터 벗어나서 周 나라의 몇몇 사람들로 부터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자성이 일어나게 되었다.만물의 주재자로서의 하늘도 백성들의 바라는 바에 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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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고 풍부해지면서 天은 의지와 好惡을 지니고 있고 懲罰을 내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능력을 恣意的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인간이 바라는 바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左傳 襄公 31年 : 民之所欲,天必從之

天神萬能主義에서 인간중심주의로의 전환은 ‘하늘은 편애하지 않고 오직 덕있는 사람만을 돕는다’左傳 僖公5年:皇天無親 有德是輔
는 천명론으로 변화한다.
전국시대(480-222BC) 이후에는 오히려 인간이 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 의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화하였으며 춘추시대에는 인간이 천명이나 鬼神보다 중요하고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재자라고 하는 인본주의의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2)孔子와 孟子

공자는 중국 최초의 인본주의자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仁이며 인의 구체적 내용은 愛人이다 묵자가 주장하는 것 처럼 만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親親과 孝悌 즉 차별적 사랑이다.가까운 부모형제로 부터 출발하여 점차로 仁의 대상을 확충하는 것이 훨ㅆ닌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공자에게 있어서 이상적 인간형은 修己安人이다.이는 성인이며 君子이다 즉 나를 위하기 보다는 남을 위하는 마음을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존재이다.이러한 실천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思學並進의방법이 채택된다.자기자신을 탐구대상으로 삼아 심사명변하여 인생의 대도를 자각하려는 것과 타인의 경험을 탐구의대상으로 삼아 博學.審問하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論語 爲政: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또 하나의 도덕적 인간형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克己復禮가 있다 즉 ‘자기를 이기어 예에로 돌아가는 것이 仁을 구하는 방법이다.하루라도 극기복레하면 천하 사람들이 그에게 인을 돌릴 것이다.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말미암겠는가?論語 顔淵: 子曰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인간은 감관과 형상을 지니고 있어 욕망을 담지하며 그로 인하여 생물적 욕구를 지니게 되므로 禮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행위를 도적적인 표준에 부합시킬 수 있다.예는 성인이 제정하여 외재적으로 규범화한 것으로서 훈련ㅇ늘 통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禮를 자각하고 그것의명령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孟子는 인간에게는 仁義禮智를 구유하고 있는데 이를 반성적으로 사색치 않음으로서 그것을 구현하지 못한다고 본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는 인의예지의 擴充에 있으며 이러한 확충를 통하여 大我즉 남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는 이타적 행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不忍人之心.을 통하여 사회에의 봉사와 이타적 행위가 발현되는 것이다.由仁義行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인의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고 行仁義는 외재적 규범에 따르는 것이다.공자의 성인이나 공자의 개념과 유사한 맹자의 大人은 행위의 장소와 입장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지지만 그 근원에서는 같다.紂임금을 정벌한 周公과 이를 반대한 伯夷의행위는 표면상 대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적 행위로 따져 본다면 동일하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불초한 임금을 섬기지 않은 백이와 다섯 차례나 湯王에게 나아가고 다섯 차례나 桀王에게 나아간 伊尹,더러운 군주도 싫어하지 않고 하찮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은 柳下惠는 모두 같은 것이다.즉 외적 행위로 본다면 그 결과가 모두 다르지만 대인의 본성에 따랐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孟子 告子編: 居下位,不以賢事不肖者 伯夷也,五就湯,五就桀者,伊尹也,不惡汗君,不辭小官者 柳下惠也,三子者不同道,其趨一也,一者何也?曰仁也.君子亦仁而已矣,何必同

이런 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성적 사고로서 道를 밝히고 본래 타고난 良知,良能을 존양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3)중용과 대학

인간의 성품은 天으로부터 주어지는 天命之謂性이다. 天은 만물의 주재자로서 전지전능하고 至善至美한 것이다.천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성은 천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을 통제하고 지혜를 갖춘 도덕적 선이다.
인간 심리가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가 中이며 이것이 만물의 근원이다.사건이 일어난 후에 절도에 맞는 것이 和인데 이러한 중화를 실천하므로서 만물의 질서와 만물의 자연 그대로를 실현시키는 바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인간 본성은 誠이다. 이 誠은 인간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의 공통된 근원이다.
誠은 모든 事物事件의 始終本末이니 誠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어질 것이다中庸:誠者,物之終始,不誠無物

중용에서 말하는 군자는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한 쪽으로 치우침 없는 행위를 평범하게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향하여 가는 길이다.그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군자의 덕을 베풀고 평이한 일로부터의 실천이며 이것이 忠恕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것은 誠이며 자기의 인격만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타물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은 仁이고 他人他物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智이다中庸: 誠者 비自成己而已矣 所以成物也 成己仁也 成物智也

중용에서는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기 위해 尊德性과 道問學의 두 가지 綱領을 든다.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은 도문학의 방법이고 愼獨은 존덕성의 방법이다.

大學에서는 개인적으로 자기가 갖추고 있는 明德을 밝히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시키는 사람이다.명덕을 개인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을 명명덕이라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을 新民이라 한다. 명명덕은 修己 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고 신민은 治人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백성을 친애하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格物,致知,誠意,正心의 수신의 과정과 齊家,治國,平天下의 치인의 과정을 든다.
격물 치지는 지식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며 성의,정심은 덕성을 닦아 밝히는 것이다.이를 통해 자아를 완성하고 자아를 완성하여 修身하며 그 후로 齊家와 治國 平天下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5. 칸트와 유가 윤리의 논의점


칸트와 유가의 윤리를 비교 하면서 우리는 몇 개의 공통적인 논의가 가능한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본 章에서 다루게 될 주제는 이광세 교수가 <동서철학의 만남>에서 ‘유교를 다시 생각한다’의 발체본이다. 이광세 교수는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동양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서양인의 시각에서 근대사회의 萌芽期인 칸트의 논의점과 유가의 논리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그것은 행복한 동,서양의 윤리의 융합을 꽈하는 것이며 양자의 상호보완적 의미를 확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의 문제,프라이버시 그리고 관용Tolerance의 문제이다

1) 개인의 자유

개인주의는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큰 기둥이다.서구에서의 개인은 유가에서의 三綱五倫에 의해 규정된 유기체적인 질서를 벗어나 더욱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평등하고 자기실현과 완성을 기하기 위한 자유를 가지며 각 개인은 그런 이성적 목적과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에 대응하는 유가의 개념은 自任과 自得의 논리이다.자유는 방종이 아니다.자유에 의한 행위가 어떻게 합목적적일 수가 있는가? 행위의 선택이 전적으로 인간 이성에 의한 자율에 의거한다는 사실이 가능한가?
유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고 사회의 관습을 학습하면서 克己復禮를 하는 것이다’. 라고

우리는 개념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우리가 행위한다는 사실은,또 행위의 선택을 한다는 사실은,전통적적인 사변철학에 있어서 행위의 배후에 인식작용에 있어서 선택 즉 판단력을 행사하기 위한 개념의 정립이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칸트는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언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에서의 禮는 전통적 관습에 의거한 하나의 개념이면서 또한 상황에 따라 확장할 수 있는 유연성을 내포하는 것이다.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仁이며,인에 포함된 자기수양과 인격도야는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개인의 精華를 추구하는 근대 서양의 이성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언어에 의해서 파악하고 인지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그 개념이 지시하는 바에 따를 것 인지의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안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의 일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禮는 사회적 동물로서 제약된 인간이 수행하여야 할 것인데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유교에 있어서 예는 仁義에서 오는 것이다.인간은 이성과 육체를 가진 이원론적인 존재라고 하고 육체보다 이성에 우위를 두는 독일 관념론적인 입장에서 육체가 가진 함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이 ‘기계 속의유령’이라고 공격하였을 때 우리는 어떤 입


장을 취할 수 있을까?

“생각의 개념으로 (앵무새의 소리냄과 비교해서)이해력있게,공공연하게 사람들이말하는 것을 설명하듯,인의의 개념을 이론적 개념으로 받아들여 진정하고 참되게 에의롭게 처신하는 것(허례와 비교해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2)프라이버시와 관용

서구사회와 전통적 동양사회를 구분하는 개념으로서 프라이버시와 관용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구와 동양을 가르는 구획은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 중요시되는 프라이버시는 유교체계에서는 각 개인의 기능적인 분화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토마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사회를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개인주의에 입각한 개인들이 한 편에서는 상호존중의 원리를 행사하고 또 한 편에서는 이기심과 배타심에 의해 타인의 속박과 권리를 침해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그러므로 서양에 있어서 종교적 측면에서의 절대화,하나의 진리에 대하여 다른 형태의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 질서의식은 필연적으로 충돌과 대립을 융화하는 체계 즉 관용의개념을 채용하게 된다. 그러나 동양사회 특히 중국에서는 관용의 관념이 희박하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는 모든 사물과 인간은 陰과 陽의 조화로움을 추구하고 또 그러함의 가능성을 믿으므로 개인간의 대립, 또는 상이한 이념체제하의 충돌은 훨씬 더 유연한 양상을 띄게 되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인간 본성의 논의는 그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어려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물과 대비되는 인간의 본성이 생득적이냐 아니냐 하는 논의 또한 그러하다. 서구의 이성적 관점에서 자유주의의 발전은 개인의 자기창조의 능력을 중요시한다. 性이란 품성,인격,소질의 개념으로 한정한다면 인성은 주어진 원료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형성 발전 시키는 것이고 인성은 자기가 만든다는(成)맹자적 관점은 합의가 될 수 있다.
각자의 책임감,남의 강압보다는 자각과 의지,자기 신뢰,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발현되는 인간됨- 內聖外王之道-은 도덕적 개인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 것 이다.
앞서서 칸트의 자유를 이야기 하면서 그와 대립 또는 병치되는 개념으로서 自任과 自得을 들었다.
자임은 孟子의 萬章章句下에 언급된 것으로서 백이의 결백과 유하혜의 관후와 더불어 이윤의 책임감과 임무수행이야말로 개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득은 자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론을 말한다.공자에 의하면 15살에 큰 배움에 뜻을 두고 들어가고 30살에는 자립한 바가 있어 그것을 지키며,40살에는 사물의 당연한 바에서 의십하는 바가 없으며 50살이 되어서는 천명을 깨달아 6,70에는 物에 사로 잡히지 않는 경지를 갖춘다라고 한 점을 상기해 보자 공자는 인간은 배우고 익히는 단계(學習)와 학습과 道.觀을 겸비하여야 하며 종국에는 道.觀의 체계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카퍼만은 도덕체계를 정의중심형 체계와 관련중심형의 체계로 구분한다. 정의중심형은 公的世界- 일반적,개인적,추상적인-에 타당하고 관련중심형은 사적세계 즉 충분한 인간관계의 망을 형성,유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점을 두는 체계를 말한다.서양의 도덕체계는 대체로 정의중심형이라 할 수 있고 관련중심형은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의 체계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다



6.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상호 대립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던 서구의 윤리와 유교권의 윤리가 상당 부분 보완적이고 호헤적인 측면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식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구의 자본주의를 따라가는 후진 공업사회의 입장에서 서구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윤리상의 난점들을 회피하는 방안으로서 그토록 애쓰며 버리려고 했던 유가의 원리를 음미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윤리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칸트의 윤리체계는 근대시민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고 과학의 흥륭에 힘입어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시대의 산물이다.타락해가는 안간성을 바라보면서 종교적,과학적 허무주의에 빠져들어가던 시대를 바라보면서 칸트는 인간의 선험적 이성의 실천성을 믿으면서 그의 윤리체계를 확신했던 것이다.
앞서서 후꾸야마가 그의 신뢰 Trust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사회가 점차로 무정부주의적인,公的 사회의 연대감이 이완되어감을 감지하면서 다시금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근검과 절제의 생활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그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불화가 싹트지 않았을 때 오는 것이다.근검과 절제는 인간 욕망의 유한성과 그 지독한 파괴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월러스턴은 자본주의가 속삭이는 달콤한 속임수에 빠져드는 물신화된 인간을 경고한다.자본주의는 개인의 平等을 약속하지만 오히려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인간의 소외는 불가피해진다고 경고한다.자연은 말 그대로 그러한 것이다. 자연의 이루로서 인간을 의식하는 행위,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일치하는 경건성은 유가의 윤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칸트도 유가도 다같이 개인의 결단을 촉구한다.그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부터 빚어지는 결단은 개인의 고립성과 익명성을 더욱 가중 시킬 수도 있다. 자임과 자득의 논리는 시민사회를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로 부터 확충되어가는 유대감과 결속 속에 닦여지는 인간성과 고독한 단독자의 결단을 요구하는 이성적 윤리체계는 서로의 등을 돌리고 따뜻한 가슴을 맞대어야 한다.











참고문헌










동서철학의 만남 이광세
창작과 비평 1996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사
동서철학의 주제적 고찰 김형효 고려원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한국동양철학회 연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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