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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의 생명. 환경 예술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1. 13. 13:55

인제의 생명. 환경 예술제


                                                 나호열


인제 가는 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에는 한 뼘 길이, 어른 팔뚝 보다 조금 굵은 향나무 토막이 있다. 지난 3월 진부령 너머 건봉사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손홍기 시인에게서 건네받은 선물이다. 손홍기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어림잡아 10년쯤 된 듯 싶은데 만해마을 운영과장을 하면서 노루목 산장을 부부가 함게 일구고 있다.

 

 만해마을을 그냥 지나치기가 서운해서 잠시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마침 그는 토요일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그예 당직 교대를 하더니 노루목 산장으로 나를 데려 갔다. 지리산에도 노루목 산장이 있지만 인제에서 내린천을 따라 올라가는 곳에도 카페 겸 음식점으로 노루목 산장이 있다. 내린천이 인제에서 북천과 합강을 이루기 직전의 구비치는 물빛을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맛이 일품인 곳이다. 그는 술을 들고 나는 모과차를 마시며 몇 달 뒤에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K대 석사학위 논문인 『박인환 연구』를 한 권 내놓았고 겨울용 장작으로 쌓아놓은 고사한 향나무 토막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향기가 좋아요, 머리도 맑아지고요”


 그리고 반 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연락이 왔다. 열 번째 맞이하는 생명. 환경 예술제 프로그램의 하나인 전국 여성 환경 백일장에 심사를 맡아달라는 것. 그러니까 지난 10월 18일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시원하게 뚫린 길을 내달리며 생각에 잠긴다. 칠, 팔십년 대만 해도 인제 가는 길은 참 멀고 멀었지.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국토 곳곳의 길들은 볼상사납게 파헤쳐지거나 넓혀지고 있다. 그만큼 자동차가 늘어나고 이곳저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반증이다. 꼭 필요할 때만 도로를 이용하여야 한다면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이유 없이, 그저 바람처럼 뭔가 시상을 건질만한 게 없나하고 두리번거리는 일이란 생산의 효율이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백담사에서 개최하는 만해시인학교에 올해는 꼭 참석해야지 하는 마음에 달아있을 때 마침 또 다른 일이 걸려들어서 백담사행은 쉽게 결정되었다. 광복절을 앞 둔 시점이어서 동해로 가는 피서객들의 수가 적어서인지 길은 그런대로 수월해져 있었다. 양평까지는 완전히 도로확장이 된 상태이고 홍천에서 인제 가는 길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난 해 여름에는 진부령을 넘었는데 그때는 백담사를 힐끗 곁눈질 할 뿐이었기 때문에 백담사로 향하는 마음은 한결 간절해져 있었다.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1999년 백담사」라는 기행문이 눈에 띈다. 십 년 전의 기억인데, 지금처럼 길이 직선화되고 확장되기 이전의 풍경이 아슴거린다. 옛길은 구불거리고 산등성이를 간질이고 강에 빠질 듯 말 듯 한데 요즘 길들은 돌진의 미학을 가진 괴물 같다. 터널을 뚫고 긴 다리를 놓아 협곡을 가로지르면 그만인 것이다. 하동 벚꽃길이 그래서 망가졌고, 양수리 건너 서종리에서 청평 댐으로 가는 길이 볼 품 없어졌고,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로 꼽혔던 경주에서 감포 가는 길은 풍취를 잃었다. 길은 신속한 소통을 꾀하지만 그만큼의 단절과 조급한 심성을 키워주는 것은 아닐까?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는 삶의 질을 높이려면 도시의 팽창을 막고 주차장과 도로를 확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 말은 아마도 길은 인간과 인간을 닿게 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과 마을을 스쳐 지나가게 만드는 허물을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는 뜻일 것이다. 차는 쏜살같이 달려 점심 무렵이 되어 행사장인 인제 산촌 민속박물관에 닿았다. 그동안 수 많은 풍경과 차들이 지나갔지만 그 누구와도 나는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입을 악다물고 있었다.


걷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과의 대화이다

                                           - 도법

 봄 가을로 수많은 축제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역의 특성을 알리는 축제, 경제적 사회적 시너지 효과를 노린 기획된 축제는 축제의 깊은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행화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인제의 생명 환경 예술제는 주최가 내린천 예술인회이고 후원은 환경부, 강원도, 인제군, 인제문화예술단체 연합회 등으로 되어 있는 다소 색다른 축제이다.

 주요행사 내용은 내린천 댐 반대투쟁 기념행사, 환경부장관상패 전국여성환경 백일장,  하늘내린 강원환경백일장, 녹색시화전 및 기록 사진전, 내린천 댐 반대운동 기록사진전, 내린천 생태문학기행 등으로 행사장에는 이미 백일장에 참가한 군인, 학생들이 이곳저곳에서 삼삼오오 글을 짓고 있는 모습이 따사로워 보였다. 내린천 예술인회 회장은 손홍기 시인으로 그의 성품과 걸맞게 행사장에는 그 흔한 화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곳곳에 생명, 환경과 같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뭔가 우리의 일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구호가 마음의 깃발로 펄럭이고 있음을 느끼면서 이 축제의 속살을 더듬고 싶은 호기심으로 행사장을 기웃거렸다.


 생명 환경 예술제는 내린천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내린천은 길이가 약 70킬로미터에 이르고 홍천군 내면의 소계방산에서 발원하는 계방천과 자운천이 합류하여 북행하고 인제군 기린면 단목령 부근에서 발원한 방대천이 인제군 현리에서 마주쳐서 인제읍 건너로 흘러 들어와 저 백담계곡을 굽이쳐 내려온 북천과 만나 합강으로 잠시 불리우다 소양강으로 몸을 합치는 강이다. 홍천과 인제는 깊은 계곡과 인간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아 청정과 수려함을 잃지 않은 삼림이 우거진 지역이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마을 이름이 美山里 일 것이며, 그 아름다운 산 속에 사는 사슴이 백년이 지나면 신비롭고 성스런 상상의 동물로 변한다는 麒麟面이라 하였을까! 일급수 청정수에만 산다는 열목어가 서식하고 온갖 약초와 산나물이 사방에 그윽한 한반도의 허파 구실을 하는 내린천은 인제만의 보물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끼고 보듬어야 할 자랑거린 것이다. 자근거리는 냇물이 바위와 조약돌과 부딪쳐 내는 소리와 그 물에 어리는 지나가는 구름과 나무들과 그 나무에 기대어 둥지를 보듬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움직임은 비행기 위에서, 쉬임없이 굴러가는 자동차 안에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다. 오직 느린 걸음으로, 느리게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숨소리이고 몸짓이다. 그래서 도법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리산 길은 어디를 가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걷기 위해 만든 길이죠. 걷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대인은 걸음을 잃어버렸어요. 걸음을 통한 성찰의 기회도 상실했죠.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누구나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숲길 순례는 걸음 자체를 즐기면서 이 길 위의 모든 것을 만끽하게 합니다. 길 위, 길 주변의 자연, 문화, 사람, 문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요. 시를 외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환경이냐 개발이냐


 우리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지만 그만큼의 값비싼 대가와 교훈을 얻었다.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환경 파괴는 단기적으로는 공익을 주지만 결국에는 인간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발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다. 일찍이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연을 지배하려든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베이컨 역시 자연의 지배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가 배운 바로는 발전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환경의 파괴는 불가피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기술의 발달과 재화의 넉넉함으로 파괴된 환경을 치유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매력적인 개발론자의 주장은 자연은 장기적으로 볼 때 스스로의 복원력을 가지고 있으며 수 십 년 수 백 년의 단기적 관찰로 자연 환경의 파괴를 가늠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대로 우리는 절대 경작지의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개펄을 메우고 간척사업을 시행하며, 과도한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터널을 뚫고 도로와 철도를 직선화하려 하며, 주택난을 덜기 위하여 농지와 녹지를 허물어 공룡과 같은 아파트 단지를 소금기둥처럼 세워 놓는다. 완공을 목전에 둔 새만금 방조제 공사, 천성산 KTX 철로 터널 공사, 사패산 터널 공사 등을 위시하여 인천과 서울을 물길로 잇는 경인운하와 현 정부의 공약이었던 대운하 건설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갈등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뇌리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내린천도 개발의 시퍼런 칼날을 받아야 했던 아픈 기억을 안고 있다. 내린천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린천 댐 건설을 둘러싼 공방과 그 공방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 적지 않음을 볼 때 내린천 댐 건설 백지화는 환경 지킴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커다란 성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정부는 내린천에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주민뿐만 아니라 환경 운동 단체, 일반시민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은 댐 건설을 백지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환경보호와 개발의 대치는 그 내면에 다 같이 이기적 인간의 심리를 숨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궁극적 해결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용수의 부족을 해결하고 홍수조절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의 논리는 공리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수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개발논리는 강자와 약자의 이분 논리에서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또한 강자만이 존재하여 그 힘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할 때에는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소위 님비현상이라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린천에 댐을 건설할 경우에 인제읍 인구의 다수인 1 만 명 이상이 이주하여야 하고,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의 확대로 수많은 희귀 동식물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며, 생태계의 변화로 재해로 인한 고통이 증가할 것이라는 점이 댐 건설 반대론자의 일관된 입장일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린천 언저리에서 생활의 터전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생활 근거가 박탈된다는 것이다. 소수인 그들이 댐 건설로 이익을 보게 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할 마땅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인제를 가다보면 <하늘내린 인제> 라는 광고판을 보게 된다. 또 <병영 추억의 고장 인제>라는 푯말도 익숙하다. 그 옛날 포장도 되지 않은 인제 길을 가며 얼마나 많은 신병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 백 평 땅 백 평’이라는 산간오지의 궁벽함을 이어 내려온 땅에서 나물 채취와 띄엄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신고는 경험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제사람들의 사람답게 살 권리를 그 누구도 속박할 수 없다.

 

 인제에서 현리로 넘어가는 길은 걸어가 보라 . 그 길은 아직도 한산하고 고즈녁하다. 그러나 내륙 깊숙이 들어갈수록 팬션과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여름철이면 레프팅, 낚시를 즐기는 외지인이 늘어나면서 진정으로 내린천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내린천 댐 건설 백지화 운동의 경과는 우이령 보존회 http://cafe.naver.com/uircc 에 실린 김학성 우이령 보존회 감사의 다음과 같은 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내린천댐 반대경과는 1997년 4월 24일 정부 내린천댐 건설계획 발표로 26일 내린천댐 건설 결사반대 인제군 대책위 발족하였고 6월 2일 각 읍면 대책위원회 공식출범하여 기린면 상남면 일대를 중심으로 댐건설 반대 현수막을 걸고 본격적인 반대운동 돌입했다.

6월 14일

현리에 있는 기린 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기린면 주민 1,000여명 참석하여 최초로 내린천댐 결사반대 결의대회 후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7월 7일

춘천 경실련 주최 시민토론회에 기린면 대책위원장 및 도의원 등 주민 225명 참가로 댐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7월 19일

인제 종합운동장에서 인제군 사상최대인 8,000여명이 참석하여 궐기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승호 군수를 비롯한 도의원 및 군의원 등이 삭발식을 가졌다. 이 대회에 전국환경단체 다수가 참석하였으며 우이령보존회에서도 참석하였다.

7월 24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환경운동연합과 경실련 공동주최로 ‘인제 내린천댐 백지화를 위한 상경결의대회‘를 YMCA, 녹색연합, 우이령보존회, 그린훼밀리 등과 군대책위 및 시민 200여명이 참석하여 내린천댐 백지화를 촉구하였으며, 내린천댐 문제를 전국적으로 이슈화하였다. 

7월 26일

내린천댐 결사반대 대책위에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8월 8일 인제사거리에서 청년사수대 발대식이 삭발식과 시가행진으로 이어져 주민들에게 투쟁의식을 다지는 감동의 계기가 되었다.

9월 5일

북면 원통사거리에서 부녀사수대 발대식 및 사랑의 헌혈 선포식이 1,100여명이 참석하여 대규모로 집회를 가졌다.

9월 27일

내린천댐 건설반대 전국문인 시낭송회가 내린천 솔밭유원지에서 전국의 문인 500여명, 환경단체회원, 지역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 성황리에 마쳤다

11월 16일

댐건설 및 주변지역 지원등에 관한 법률 입법저지 전국연대를 구성하여 성명서 채택하고 광화문에서 가두시위를 가졌다.

 

드디어 1998년 1월 30일 정부의 내린천댐 백지화를 발표하였다.

2월 6일

정부의 댐건설 백지화가 공식 발표된 후 내린천 댐 건설반대 인제군 투쟁위를 내린천 지키기 운동본부로 전환하여 환경보호 생태관광육성 활동을 전개키로 방안을 논의하였다.

4월 27일

기린면 회의실에서 전국투쟁위원등 주민 100여명이 참석하여 내린천 사랑보존회를 결성하고 향후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내린천 보존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환경운동은 반대를 위한 투쟁인가


  최근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성정해 왔던 시민활동이 점차 정치화 되고 조직의 비대해져서 조직의 경직성으로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점을 제시하고 고발하는 것 만으로도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보지만 많은 사람들의 욕심은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안을 내놓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 희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자칫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인식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 환경 예술제를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내린천 예술인회 손홍기 회장은 내린천 댐 건설 반대 운동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한국주민 운동사, 환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부하고 있다. 그 근거는 김학성의 글에 정리되어 있는 바와 같이 관과 민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애향적 차원에서의 자발적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 내린천 댐 문제를 전국적인 환경문제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환경운동 단체의 네트워크 구축에 구심점을 만들었다는 점, 댐 건설이 백지화된 이후에도 네트워크가 내린천 사랑보존회로 탈바꿈하여 내린천 보존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반대 운동 초기에 내린천 댐 반대 전국문인대책회의를 결성하고 문인서명 운동을 펼쳐 황금찬, 민영 시인 등 680 여 명의 서명을 받고, 자연과 생태의 존엄을 알리는 시선집  < 내린천 너 영원하리>를 발간, 배포하므로서 예술인들의 현실고발의 책임과 실천의 위의를 드높인 점에 있어서도 손홍기 시인은 깊은 감회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생명 환경 예술제가 포괄하고 있는 백일장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있는 점,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 축제의 경향과는 달리 관 주도의 행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제에 터전을 둔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소비지향적이고 전시적인 축제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환경운동은 사회 고발적 차원이나 투쟁과 계몽의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개발이라는 달콤한 유령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으며 도구주의적 관점에서의 삶의 안온함은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삶의 미덕이기 때문에 삶의 생태적 접근은 개인으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즉, 환경지킴이가 따로 있고  일반인들이 따로 있는 그런 사회에서 쾌적한 환경을 꾸려나가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한강물을 믿지 못해 생수나 정수기 물을 음용하면서 향기롭고 빛나는 머릿결을 매만지기 위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샴푸나 세탁용제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환경파괴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인식만큼 절박한 문제가 또 있을까?


 

환경운동과 생명사상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이어내려온 사상이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강박함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였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우리들은 선대들의 삶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딜타이이 견해를 따르면 문화적 유전자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명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수 백년 동안 자연과학을 통하여 삶의 풍요를 누려 왔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삶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무릇의 생명체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값 비산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서양이 오히려 동양적 사고에 충실하고 역으로 동양은 서양의 물질적 가치에 경도 되어 있다는 역설이 전혀 충격적이지 않은 세태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유의 생명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잠시 뒤로 돌리고 서구 사회가 그들이 이룩했던 소비적 사회에 대해서 어떤 자각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우니는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탐욕적인 사회라고 규정햇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연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기슬이나 재산을 이용해서 자신이 욕망하는 재화나 물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욕망을 키우고 그만큼 소비하라고 조장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밴스 패카드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50년대 중반이 되자 미국의 소비재 생산업체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새안고를 이룩했다. 더구나 자동화는 생산고가 점점 더 엄청나게 증가할 것을 예견했다. 1940년대 이래로 국민 총생산량은 400%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매 25년 마다 시간당 생산성이 두 배로 증가했다.

 이렇게 부유하고 풍부한 삶을 바라보는 시각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항상 윤택한 생활 수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그림이었다. 사실 이러한 견해가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도 잇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제를 살리기 이해서는 점점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글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글의 지배소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이용되거나 약탈당하는 자연이다. 데카르트 이후의 이성주의는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기각했다. 모든 자연의 산물은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아니면 광물이든 간에 인간의 지배하에 있는 부속물이거나 잠재적인 인간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한 마디로 그것들은 영혼이 없으므로 생명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소외받은 생명체의 소멸이 종국에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아니면 생명 자체를 앗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백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 대립항으로 놓는 서구적 사고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인 관계로 엮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인들이 물질 획득에 어려움을 겪으므로서 어쩔 수 없는 내핍을 강요 받았다면 동양사회는 훨씬 더 예지적인 삶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동양사회는 자연으로부터 얻는 필요한 물질은 결코 무한하지 않으며 재생산되지 않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사회는 일찍이 서양인들이 내핍이라 생각했던 것을 절약과 절용이라는 미덕으로 가치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연친화적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는 동양사회가 갖는 자연관과 생명사상의 따듯함에서 오는 것이다.


 비록 우리만이 체득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받아들였던 유. 불. 선의 사상과 종교는 다 같이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다루고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을 의식했다. 우리가 토착신앙이라고 생각하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은 특정한 동식물이나 영적 존재를 적어도 인간과 동등하거나 인간을 뛰어넘는 신적 권위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관행적으로 부른 축제 祝祭도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만물에게 감사하고 즐기는 동시에 경건한 제의를 올리는 의식으로 받아들일 때 축제가 단지 소비하고 즐기는 양식이 아니라 생명을 중시하고 기꺼워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수 천 년 동안 우리들의 심성에 내재되어 왔던 생명존중의 의식을 단절하지 않은 기회가 남아 있다. 이제는 세계는 자원의 고갈과 인간을 위협하는 생태계의 반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소비지향적이고 욕망을 무한정 증폭시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로 나아가고 생명의 문제는 삶의 구조를 바꾸는 혁명적이고도 신선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서울로 오는 길


이 글의 처음 부분에서 밝혔듯이 생명 환경 예술제에는 지역의 기관장이나 유명 인사들의 화환 등이 보이지 않았다. 행사는 지역의 예술인들의 자발적인 지원 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린천 예술인회라는 일 개의 문학단체가 큰 행사를 주관하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고 전국적 공모 행사가 많았음에도 그리 많지 않은 인원이 행사에 참여한 것도 색다른 풍경이었다. 한 마디로 생명 환경 예술제는 앞으로 보다 튼튼한 조직력과 기획력으로 전국적 행사로 발돋음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보여진다. 환경 보호, 생명 사랑 운동은 인제와 내린천을 중심으로 발원하였지만 이는 공공교육의 현장에서 실현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축제와 지역주민이 유리된, 행사의 주체와 소비자가 이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제의 생산자이면서 소비자가 되는 신명나는 축제로 거듭나게 할 역동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라고 생각 되었다.

 

 저녁 무렵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아득해졌다. 휴일 저녁 어디쯤에서 길이 막혀서 공회전을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차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할 것인지 쓸데 없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뚫린 길 한 켠에 박인환 시비가 우뚝 서 있다.

우리 문학사의 모더니스트로 불리우는 박인환을 손홍기는 강하게 손사레치며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모순에 저항하고 도전한 시인이 박인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내린천과 인제 그리고 박인환의 이미지가 전혀 생소하지 않은 실루엣으로 남은 까닭은 무엇일까?



  

예술세계 2008년 11월호에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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