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때로는 시간도 멈추어 선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 23:04

때로는 시간도 멈추어 선다

 

   

  낙엽처럼 몇 장의 사진이 책상 위를 굴러다닌다. 어느 老 시인은 자신의 늙음을 보기싫어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나는 추억하기 싫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을 찍은 날짜는 기억에 없지만, 그 장소는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공주 공산성, 송산리 6호 고분군, 그리고 남은 한 장은 갑사 경내에서 찍은 것들이다.

 

 公州, 熊津, 고마나루, 천 오백 년 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4만 대군으로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百濟는 서기 475년, 이 곳 錦江 가 公山城에 고단한 몸을 누인다. 외적이 두려워 머리맡에 금강을 둘러놓고 멀리 계룡산과 오목조목한 구릉지역에 도읍을 정했던 황량한 마음들은 보이지 않고 뻥 뚫린 고속도로가 단걸음에 달려나가는 곳. 낡은 한 장의 손수건에 찍힌 눈물자국 같은 公州.

 

 쌉싸한 초겨울의 공기를 맡으며 서울에서 출발한 지 3 시간 만에 공산성에 닿는다. 국문학자, 사학 교수, 미술사학자, 대학생 몇몇, 답사 안내를 맡은 고고학자 김희찬 교수의 안내로 공산성 입구 언덕배기 길 옆에 옮겨놓은 수 십 기의 공적비를 지나친다. 牧使, 觀察使, 그 옛날 힘께나 쓰던 이들의 공적이 메아리가 되지 못한 채 不忘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官과 民은 물과 기름 같은 것인가? 백제 때에는 토성이었음직한 산성이 조선조 때 石城으로 개축되고, 경내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2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성곽을 둘러보면서 손바닥 만한 터에 宮을 만든 弱小國의 비애를 한 몸으로 느낀다.

 

 삼 백 미터가 조금 넘는 정상에서 바라보면 전라도 무주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용트림하듯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강경 쯤에서 서해 바다로 西進하는 금강이 발 아래를 적시고 그 너머에는 공주의 신시가지인 신관동이 한 눈에 잡힌다. 워낙 좁은 공주 시내를 감당하지 못하여 터미널이 옮겨가고, 공주대학교도 자리를 옮긴 후 모래성 같은 아파트들이 볼쌍사납게 조망을 흐린다. 공북루 拱北樓, 쌍수정 雙樹亭, 임류각 臨流閣, 광복루 光復樓, 진남루 鎭南樓, 여기저기 솟아오른 누각들은 쓸쓸하다. 발밑에 수북히 쌓여있는 가랑잎들만큼이나 과거의 흔적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법, 멀리 떠나 있는 벗이나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이지만, 죽어도 잊지 못하는 戀慕의 情으로 서성거릴 때 지나간 시간은 歷史의 존재를 비로소 손 내밀어 주는 것이다.

  

 김희찬이나, 김용은은 전공은 다르지만, 내가 좋아하고 기꺼이 배움을 청하는 젊은 사학자들이다. 길섶에 아무렇지 않게 나뒹구는 瓦當 조각들을 들어 지붕의 형식과 쓰임새를 설명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너울처럼 출렁거릴 때, 울컥 솟구치는 눈물 한 방울이 차갑기 이를 데 없다. 기와 조각을 길 섶 제자리에 다시 놓아두며 '고고학자의 최대의 임무는 발굴하지 않는 것'이라는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공수래 공수거의 어느 설법 보다 더 가슴에 저려오기 때문이다.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익었다. 아무도 감을 따지 않는다. 감을 따서 팔아보았자, 인건비도 건지지 못한다는 현실, 그저 도시 아이들은 막대기로 감을 따는 일이 신기하기만 하다. 주먹 만한 맑은 햇살이 바람과 섞여 달기 이를 데 없다.

 

公山城에서

 

평생을 땅파는 일에 투신한 고고학자와 공산성에 오른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 꼭 앞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볼 때 파묻힌 것들의 숨결을 듣는

수없이 많았던 그의 屈身을 생각한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눈물 떨어지던

초겨울 오후에 공산성 꼭대기에 올라 그대를 바라본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까치발을 들었지만,

높은 곳에 올라야 그대가 잘 보인다는 말은 거짓이다.

고고학자의 꿈은 될 수 있으면 땅을 파헤치지 않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문득, 그가 몇 백 년 전의 비바람이 묻은 기와조각을

다시 풀섶에 내려놓듯이

내 가슴에 깊이 그대를 내려놓을 때, 그대가 내 눈에 창으로 다가선다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떨어지는 햇살이 아름답던 초겨울 오후    

 

 

  발걸음을 돌려 우리는 곰나루로 가는 길목 송산리 고분군으로 간다. 오늘날의 공식 지명은 금성동이지만, 소나무가 우거진 얕은 산 松山이 더욱 정겹다. 일 곱개의 발굴된 고분, 그 밖에도 아직도 인간의 손길을 거부한 채 땅 밑에 잠들어 있는 고분들이 무수할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무령왕릉에 닿는다.

 

 1971년 7월 5일, 고분 6호분의 배수로를 파다가 발견된, 남한에서 최초로 매장자의 신분이 밝혀진 무령왕릉으로 오늘의 공주는 역사의 도시로 다시금 각광을 받게 된다. 그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김원룡 박사는 그의 저서『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몇 시간 만에 발굴을 마친 졸속함에 대해서 회한을 술회하고 있다. 매장된 유적을 발굴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과의 대화이며,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며 그러므로 죽은 사람과의 대화는 침묵과 정적 속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촉수가 얼마나 끈기 있고, 조심스러워야 하는 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웃나라 중국에서도 진시왕릉 발굴이수 십 년 동안 진행되고, 때에 따라서는 후대에게 발굴의 기회를 약속하며 아예 발굴조차 하지 않는 예가 수다하지 않은가!

  

 우리가 수습해 낸 널 조각, 誌石과 買地券, 왕과 왕비의 冠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매장물들이 의미하는 멈춰 선 시간과의 숨막히는 대면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한 줄기 바람처럼 지나쳐 가는 관람의 행적은  역사를 의식하고 체화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툼한 역사책을 통독하고, 전문지식을 익힌다 하여도 찰라로 다가서는 유물, 유적과의 소중한 눈 맞춤을 기다리는 것은 많은 인내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공주 박물관과 계룡산 甲寺를 둘러보는 것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어스름 속으로 천안, 논산 간을 잇는 고속도로가 한참 공사 중이었고,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우금치는 이제는 점점 옛길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주

  * 공산성 앞 주차장 건너편의 음식점 고마나루는 부여에 본점을 두고 있는 한식전통음식점이다. 돌솥밥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데, 가격도 싸고 상차림도 푸짐하다.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 조용한 맛은 없다.           

 

 ** 우금치는 1984년 동학혁명의 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참담한 패배를 한 역사의 현장이다.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다.

  

 http://www.khu.ac.kr/~museum 에 관련자료가 풍부하다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산에서 서천까지  (0) 2009.01.11
절벽을 우러르며  (0) 2009.01.09
알곤퀸 파크 Algonquin Park  (0) 2008.12.27
인제의 생명. 환경 예술제  (0) 2008.11.13
오타와에서의 편지  (0) 200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