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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7번 국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6. 8. 14:07
 

7번 국도


 길은 사람을 떠나게도 하고 돌아오게도 한다.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도 한다. 길은 흘러가는 강이고 흔적 없는 바람이다. 사람은 길에 몸과 마음을 적시고 이윽고 길이 되어 사라진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에 이르는 길이다. 지금은 그 끝까지 가볼 수가 없다. 휴전선에 막혀 발걸음은 513킬로미터쯤에서 멈추어야 한다. 부산에서 몸을 일으킨 7번 국도는 양산, 울산, 경주, 포항을 지나 영덕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해바다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울진, 삼척, 동해, 강릉, 속초, 화진포를 지나 통일전망대 앞까지 넘실거리는 동해의 푸른 파도를 가슴에 담아 올리게 한다.


 7번 국도가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蒼海를 바라보고, 버리며, 우리네 삶의 시린 구석을 쓰다듬어주는 파도에 언제든지 손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7번 국도는 결코 그런 여유를 즐길 만큼 한적한 길은 아니다. 곳곳에 설치된 과속감시 카메라는 우리의 시선을 날카롭게 만들고 제한속도를 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뒷 차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왕복 2차선이 200킬로쯤이고, 왕복 4차선 도로가 그보다 조금 길고, 왕복 6차선 도로는 약 30킬로쯤이다. 왼쪽 오른쪽으로 유연하게 굽이치다가 화살처럼 곧게 날아가는 길은 속도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빨리 빨리의 못된 습성은 어쩌면 우리의 가난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선택한 근대화의 열망은 우리의 조급증을 부채질했고, 그것이 교통문화에 그대로 나타났다. 꽉 막힌 일상에서 체증 내리듯 무의식적으로 가속페달을 밟게 되는 의식 밑에는 가난과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처연한 몸짓이 울컥울컥 솟구쳐 나는 것이다. 교통사고왕국의 오명은 그런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왜 우리는 천천히 우리의 삶을 음미하며, 되새김하며 걸어갈 수는 없을까. 속도를 늦추고 더디게 걷고 싶은 사람들은 포항쯤에서 7번 국도를 버리고 청송, 영양으로 다가가는 31번 국도를 잡아볼 일이다. 내륙의 오지답게 느릿느릿 앞서가는 경운기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사과 과수원도 보이고, 울울한 적송도 만나게 된다. 바람이 푸른 빛이라는 것도 철이 드는 것처럼 알게 된다.

 

 7번 국도의 진정한 매력은 무작정 내달리는 것에 있지 않고, 그렇다고 천천히 걸어가는데에도 있지 않다. 그저 가다가 길을 내려서서 한나절도 좋고 하루 밤도 좋고 이름도 낯선 작은 포구나 해변가에 걸터앉아 끊임없이 밀려왔다 뒤로 물러서는 파도와 이야기하는 것. 처음에는 그냥 철썩거리는 단음이다가, 句가 되고 문장이 되다가, 파도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들을 듣다가 어느새 스르릉스릉 파도와 회통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 갑자기 끼룩대며 대화의 마침표를 찍는 갈매기를 따라 수평선까지 가보는 것. 번잡한 여름철보다는 크고 고독한 동해의 갈매기와 더불어 과매기와 오징어가 해풍에 해탈하는 겨울에, 분단을 알리는 해안초병의 군화소리와 바다를 향해 길게 뻗는 탐색등을 오래 바라보다 운좋게 해돋이를 맞이하는 것. 동해바다 사람들도 일년에 30일 정도 밖에 보지 못한다는 동명일기의 해돋이.

 

 일제가 토끼꼬리라고 애써 깎아내렸던 호미곶에서, 간절곶에서, 수로부인을 둘러싼 헌화가와 구지가의 전설로 헌화길, 그 너머 정동진에서, 월송정, 망양루, 죽서루, 의상대, 경포대, 청간정, 아 , 지금은 갈 수 없는 북 쪽의 삼일포와 총석정..그 관동팔경 그 어디에서나 희망이 간절히 필요할 때 바라보고 싶어하는 동해의 해돋이.

 

 동해는 우리 역사의 아픔과 슬픔과 희망으로 푸르고 깊다. 감포 앞바다 문무왕의 호국의 염원이 담긴 대왕암을 품고, 남북분단의 동족의 相爭으로 좌초한 북의 잠수정을 품고, 수로부인을 삼켜버린 해룡을 잠들게 하고, 그 해룡을 잠들게 하기 위해 구지가를 부르고, 7번 국도는 통일전망대 앞에서 철조망에 걸음을 멈추지만, 동해물은 하나고, 동해물은 푸르고, 그 동해는 울릉도를 높이 세워 왜적을 막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도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고, 태평양으로 떠났던 연어들이 회귀하는 곳.

 

 7번 국도는 동해를 빨아들여 푸른 길이 된다. 푸름이 흐르고 흘러 대관령을 넘고, 한계령을 넘고, 일월산을 넘고  이 땅 구석구석 동해의 실핏줄을 퍼뜨려 놓는다.

 

 7번 국도를 지나가려거든 시계를 버려라. 억세기 보다 투박한 경상도, 강원도 사투리를 넘나들며 한기 스며드는 2층 객창 난로 곁에서 삼국유사 만파식적을 읽어라

 

 서비스 빵점인 객주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동해를 동해로 바라보아라


어촌의 밤



창들은 한결같이 바다를 향해 귀를 세우고 있다

모래 속으로 스며들던 파도는

밤이 깊어지면서 둑을 넘고 길을 건너

귀속으로 시퍼렇게 밀려들어오고 있다

어쩌다 하룻밤 바닷가에 머무는 사람들은

파도소리에 가슴을 상해

못내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철석이는 저 소리에 몸을 적시고

아이를 낳고

아침이면 방안 가득한 모래를 쓸어내고

등짝 넓은 사내의 뒤로

밤새 덮고 깔았던 바다를 털어내는 아낙네는

지금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 있다

손님 끊긴 바닷가 횟집 겸 민박집 좁은 수족관 속에

도다리 광어 민어 쥐치들 몸 부딪치며

먼저 목을 매려고

탐조등에 쫓겨 성급히 돌아서는 바다를 향해

넘어가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쉰다

내일까지 실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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