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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愚衆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들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6. 11. 16:11

우중愚衆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들소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금세기초 스페인의 산탄데르 州에 사는 한 젊은 기사 技師는 사냥꾼이 발견한 부근의 한 동굴에 깊은 흥미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첫 번째 답사에서 그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학생들의 서투른 솜씨 같은 그림 몇 개를 동굴 벽에서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좀 가벼운 기분으로 어린 딸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들이 동굴 입구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촛불을 들고 뒤따라오던 어린 딸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여기 소가 있어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측면 동실 洞室의 넓은 천장이었다.

 

소설 「들소」의 끝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이 달려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에 대해 사학자들은 그것이 후기 마그달레니언期 이전의 구석기 문화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는 권력과 私有의 발생을 보기 위해 신석기 문화로 꾸몄다.

 

이문열의 소설 「들소」는 1981년에 발간된 소설집 『젊은 날의 초상』에 수록된 작품이다. '하구(河口)', '우리 기쁜 젊은 날', '그 해 겨울'의 삼부작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 「젊은 날의 초상」과 단편소설 「서늘한 여름」사이에 끼어 있는 중편소설이다. 작가가 밝혀 놓았듯이 「들소」는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에 자신의 상상과 추리력을 불어넣어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은 무엇이며, 사유의 욕망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소설집이 발간되고 2년 뒤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역사적 자본주의Historical Capitalism」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창비신서.119' 시리즈로 1993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이 논문의 주된 논점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資本은 세계체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극성(極盛)하는 자본주의는 따지고 보면 축적의 욕망을 갖게 되고 그 축적이 바로 자본과 자본주의를 발생시킨다는 관점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결코 근대만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인간의 기계적 능력을 극복하고 안락한 물질생활, 그리고 인간에게 닥쳐오는 여러 위험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자본주의라는 주장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일 천년 전의 사람들보다 높은 질의 생활을 누린다는 것은 환상이며 자유, 평등, 박애 등 인간의 이성으로 이루어 왔다고 판단되는 덕목들이 완전히 구현되었는가 하는 점에서도 비관적인 견해를 펼쳐 보인다. 일 천 년전 보다 절대적 빈곤층은 오히려 증가되었으며, 전쟁의 잔혹성과 무모성은 더욱 극렬해졌다. 오늘날의 아노미 anomie 현상, 소외, 정신질환 등 현대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더욱 열악해 지고 잇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다.

 

「들소」말미에 적시된 권력과 사유(私有)는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관념이다. 500만 년 전에 -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 인류가 침팬지로부터 분화되었을 때부터 인류에게는 권력과 사유의 문제가, 성질을 달리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늘상 한 묶음으로 따라 다니는 숙명으로 남겨졌다.

 

니체Nietche가 말한 바 '권력에의 의지'나 '초인(超人)'의 의미는 인간의 사유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보편적인 안전보장의 욕구의 기저에는 축적이 함축되어 있다.

개개인의 사유의 욕구는 재화(財貨)의 한정성으로 말미암아 투쟁을 유발하게 되고, 투쟁의 최상층에는 이른바 지도자라 일컬어지는 권력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권력자는 개개인에게 사유를 허락하고 개개인은 지도자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들소」는 혈족(血族)사회(社會)에서 씨족사회(氏族社會)로 이행되어 가는 인류사의 한 장면을 압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혈족사회에는 수렵과 채취가 중요한 생활수단이 된다. 혈족사회에서는 사유(私有) 로 분화되기 전의 공산제(共産制)의 시스템이 작동한다.

여기서 소설 「들소」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은 혈족사회에서 무능력자로 낙인찍힌 자이다. 15년 살이 되던 해의 성년식 의례에서 들소를 공격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도망하여 <소를 겁내는 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와 같이 성년식을 치룬 <뱀눈>은 교묘한 술수를 이용하여 <뿔을 누른 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공산제 사회에서 모든 남성과 여성은 성(性)을 공유한다. 내가 좋아하는 <초원의 꽃>은 <뱀눈>에게 가버리고 볼품없는 <산나리>만이 그를 따른다. 무능력자인 나는 <손의 동굴>로 보내어져 도구를 만들거나 제의(祭儀)에 필요한 문양이나 그림을 그리는 존재로 전락한다. 나는 <초원의 꽃>을 빼앗기고, 절망감으로 <산나리>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얻는다. <뱀눈>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재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농경(農耕)족(族)과 전투를 벌인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많은 재화를 약탈하므로서 <뱀눈>은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지만, 유목(遊牧)족(族)과의 전투에서 커다란 손실을 입어 그들과 화평의 조약을 체결한다. 그 징표로 <뱀눈>은 <초원의 꽃>을 유목족장에게 보낸다. 나는 사제자 - 오늘날의 무당이나 주술사- <큰 목소리>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하고 그가 틈틈이 그렸던 들소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산나리>와 자식들 곁을 떠난다.

이 소설에는 <붉은 노을 >, <큰 목소리>, <날렵한 손>, <뱀눈> 등의 인디언식 이름이 등장한다. 소규모의 혈족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형상을 이름으로 정한다. 각각의 이름은 그 사회에서의 책무와 자부심을 대변한다. 일견, 그들의 명칭은 그 사회에서의 억압과 통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오늘날, 나의, 그리고 우리들의 호칭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개성을 보장받고 자신의 책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자명해진다. 인구의 증가는 나의 개성을 함몰시키고 나를 기호화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를 특징 지울 수 없는 성(姓)과 이름으로는 불가능하다. 나의 주민등록번호가 컴퓨터에 입력되는 순간, 나의 은행통장은 작동된다. 그 우연에 불과한, 조작된 이상한 숫자에 의해 내가 범법자가 아님을 확인 받고, 기호화된 내가 순간적으로 존재하고 소멸한다. 그리고 나의 존재는 이 거대한 세상에서 증발되어 대중(大衆)이라는 괴물로 재생산된다. 「들소」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말없는 대중들이 <뱀눈>이라는 권력자 앞으로 모여드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뱀눈>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기름진 음식과 재화에 눈이 멀어 <뱀눈>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비열한 존재가 대중이다. 따라서 「들소」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은 수많은 '그들'이다. 그들은 우중(愚衆)이다.

우중(愚衆)의 정체는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란 환상이다. 우리들 극소수에게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오히려 저들 다수를 지배하는 것은 저열한 욕망이야, 어떤 강력한 힘에 복종하고 지배받으려는 욕망,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무력과 우둔을 잊고, 그 강력한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것일 게야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를 욕망하는 한, 우중(愚衆)의 허울을 벗을 수 없다. 우리는 썩어빠진 정치인들을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정치개혁의 책임이 오직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있음을 목청 높여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힘이 없으니까 하면서 자탄하는 순간에,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자들을 바라보면서 울분과 함께 느껴지는 동업자의 느낌에 낭패감을 맛보지 않는가? 원정출산이나 해외이민의 속내에는 끝내 버리지 못하고 권력을 향하는 도피의 슬픈 자화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또는 이 눈으로 그 생생한 계시를 보았다. 일찍이 내가 평원지방에서 겪었거나 예감했던 것 보다 몇 배나 끔찍한 그 실례를, 그 하나는 거대한 인간의 산이었다. 맨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고, 그를 세 사람이 받들고 있었는데, 또 그 세 사람은 아홉 명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또 그 세 배의 사람이 떠받들고.... 그런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 사람이 감당하는 무게는 늘어났다. 왜냐하면 첫 번째 층에서는 세 사람이 하나를 지탱하면 되지만 두 번째 에서는 아홉 사람이 네 사람을 그 다음은 스물일곱이 열 셋을 그 다음은 여든 하나가 마흔 명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 사람이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의 산은 끝나 있었다. ...하략

 

권력은 사유(私有)의 즐거움과 안락함을 우중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에게 소비의 미덕을 가르친다. 어느새 축적의 욕망은 소비의 욕망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일찍이 보들리야르 Baudrillard가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사회를 진단하면서 소비나 유통과정에서의 문화적 조작이 권력화 된다는 주장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리하여 현대인의 좌표는 시인 김승희의*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절대절명의 외침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권력에의 지향은 소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한 징후는 「들소」의 <초원의 꽃>의 언명에서 확인된다. <초원의 꽃>은 유목족장에게 끌려가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에게 나에게 타이르듯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현란하게 꾸며진 말을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쫓고 있을 뿐이에요. <뱀눈>은 권력의 소를 쫓고, <달무리>는 그 <뱀눈>이 나누어주는 부귀의 소를 쫓는 식으로...그런데 제가 쫓고 있는 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풍요와 안락의 소예요. 그리고 <뱀눈>을 좋아한 것은 그가 바로 그것들을 줄 수 있기 대문이죠. 이제 <뱀눈> 아닌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가 그런 것들을 줄 수 있다면 또 좋아질 수 있을거에요.

 

 

여기서 작가 이문열이 드러내고 싶은 '소'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현실을 넘어서 있는 우리의 감각적 쾌락과 안락을 넘어서 있는 Idea이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것은 변화하는 형상들에 불과하고 권력과 소비, 사유를 관통하면서 그것들의 핵심인 질료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우중(愚衆)인 까닭은 이상과 꿈으로 바꾸어 부를 수도 있는 인간의 이성의 최고점에 위치한 Idea를 신뢰하지 못하고, 이데아를 찾는 것의 난망함을 미리 알아채 버린 데 있다. 이른바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명제는 실제로 우리 대중들의 기획이나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교묘하게 조작된 권력층의 술수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대중의 우매함을, 인간이라는 종족의 편견과 아집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향연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고 독배를 감수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과연 합당한 것이었을까? 오 백 여명의 배심원의 판결이 옳았거나 그른 것이었다고 누구도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하여 철인(哲人)정치(政治)의 이상을 꿈꾼다. 사유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 편견과 아집을 제거해 버린 자, 그런 지도자가 있을 수만 있으면 이 세상은 과연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공자(孔子)가 말한 도의(道義)정치도, 맹자(孟子)의 민본정치도 대중(大衆)의 우매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들소」의 주인공은 그가 그리다 만 들소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의 터전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가 추구해 온 것은 <그림 너머의> 혹은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림은 하나의 종속적 가치로써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찾아낸 것은 그림 그 자체, 표상된 선과 색의 완전성이 가지는 가치였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암울하다. 도처에 깔린 투쟁의 구호와 현수막, 여론(輿論)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력에 자신을 맡겨야만 하는 우리에게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현명한 권력은 대중이 우중화되지 않을 때 더욱 현명한 결단을 내리고 순교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중이 우중화 될 때 권력은 여론의 장막을 치고 다수결의 게임을 즐긴다. 게임에도 규칙이 있고 논리가 있다. 그러나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게임에 맡겨둘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들소는 오늘의 우리를 상징한다. 오늘도 들소는 우리 곁을 무리를 지어 지나간다. 대지 위에 발굽을 힘차게 내딛으면서, 때로는 평화롭게 초원의 풀을 뜯고 있다. 나의 마음속에 저 거대하고 우직한 들소를 초대할 수는 없을까?

 

 

* 김승희 시집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계사 1991)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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