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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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당신이 필요합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8. 7. 15:43
 당신이 필요 합니다
 

밖에는 무릎 가까이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폭설주의보 속에 길도, 마음도 모두 묻혀버린 날, 어디선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차를 마시다가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아주 먼 곳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눈 내리는 소리이거니 했지요, 고요함이 가득하면 먼지 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법이니까요. 나무 가지에, 지붕에 길 위에 내리는 눈잎들은 아주 맑은 소리를 냅니다. 아, 그렇게 당신이 내게로 온 것이지요. 모든 길을 막아버리고 세상과 면벽한 나에게 당신은 하늘을 날아 눈처럼 다가온 것이지요. 온기가 닿으면 사라져 버리는 꽃처럼, 눈물처럼 늘 나의 손을 비워두게 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외로움은 더 큰 외로움으로 넓어져 가고 기다림은 해바라기 보다 몇 배나 더 키가 자라버렸지요. 가을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낙엽들이 떨어졌고, 눈 감고도 별에서 별로 가는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기다림이 길어져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넓어져 호수가 되어 버렸지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구름이 되기로 했어요. 산중턱에 걸리기도 하고 바람을 만나면 쏜살같이 한걸음에 달려가기도 했지요. 비가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했지요.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기도 했지요. 행복은 오랜 인고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짧은 반짝임이기에 소중하고, 유한하기에 우리의 삶은 안타까움의 빛깔로 고운 것처럼 만남보다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이 깊어 가슴은 간절해질 수 밖에 없는 것 이었지요. 당신은 아마도 내 마음의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風磬(풍경)인지도 모릅니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소리는 어떤 꽃보다 부드러운 향기를 뿌려 줍니다. 그 소리는 소유할 수 없지요. 그 향기는 담아둘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지요. 그러나 나는 압니다. 그 풍경소리를 어디에 담아두고 어떻게 어루만져야 하는지를 이미 알아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 香囊(향랑)은 내 가슴에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의 가슴이 살아 있는 한 그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하여도 우리는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돋이를 보고 깨어나고 ,해너미속에 잠들며 광주리에 가득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따오는 일, 이른 새벽 안개를 헤치며 산정으로 오르는 숲길을 헤쳐가는 일, 몇 시간이고 숲 냄새 기득한 책방에서 서성거리는 일 그윽한 촛불을 어두운 길에 켜 놓는 일 그 모든 일들은 당신과 내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영혼의 지도에 숨어 있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과 가장 넓은 바다 가장 황량하고 끝이없는 사막을 굽이굽이 지나가는 길을 그려놓고 그 긴 여행을 함께 떠나는 꿈을 꾸는 것이 당신과 내가 해야할 일입니다. 조금씩 늘어가는 눈가의 잔주름과 희끗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급류처럼 지나가버리는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신비롭기조차 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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