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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레이 사진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2. 16. 16:07

 

만레이 (1890-1976)

 

1. 초현실주의자 만레이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한 만레이는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다가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 1915년 마르셀 뒤샹과 처음 만났으며 같은 해, 첫 개인전의 카다로그를 복사하기 위해 처음 카메라를 잡은 것을 시작으로 뒤샹과 함께[뉴욕, 다다]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마르셀 뒤샹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만레이는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1920~1930년를 대표하던 세계적인 시인, 음악가, 화가들의 초상사진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1921년 파리로 옮겨간 후 본격적으로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 하였고 1924년경부터 앙드레 부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당시 프랑스 패션계를 주름 잡던 폴 푸아레를 소개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6년부터 37년을 기점으로 패션 잡지[하퍼스 바자]에 사진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진의 표현영역을 넓히는 여러 가지 혁신적 기법을 발명했는데,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다가 빛을 비추어 나타나는 이미지 레이오그래프, 솔라이제이션 기법 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다다이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만든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 ‘에미크 바키아’ ‘불가사리’, ‘이성으로의 회기’는 유럽 전역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1951년 미국의 척박한 문화적 풍토와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만레이는 그 후로 회화 작업을 했다. 프랑스 정부는 만 레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 하였으나 부조리와 기존 가치의 파괴를 신조로 하는 다다이즘 운동의 순수성과 동지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 했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 생일날, 주위 사람들이 훈장으로 메달과 리본을 교환해 달아 주었다. 1976년 사망해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아내 줄리엣이 평소 그가 즐겨쓰던 말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관심 하지는 않았던’ 이라는 비명을 새겨주었다.

 

  만레이는 미의 모험자이며, 미의실험자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작품을 제작한 멀티아티스트였으며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던한 작품으로 현대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화가, 오브제 제작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만레이는 20세의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예술가중의 한 사람이다. 전시를 통해 소개될 110점의 만레이의 작품과 함께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싹을 틔운 현대 예술이 걸어온 있는 그대로의 발자취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질문한다. 더 이상 고안하고 싶고 더 이상 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남아 있는가? 그것들은 고안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창조적 행위에 관한 한, 나는 평생을 외로운 섬에서 살아온 은둔자임과 동시에 톱니바퀴의 한 톱니일 뿐이다.’ - 만레이 -

 

 2. 만레이 약력  

  

   1890 이매뉴얼 루드니츠키(만 레이의 본명), 8월 27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1908 고등학교 졸업. 미술가가 되기 위해 건축과 장학금을 거절. 뉴욕에서 소묘가와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함.

   1910 뉴욕 국립 디자인아카데미 인체소묘반에 등록.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의 화랑을 방문.  

   1915 뉴욕 다니엘 화랑에서 첫 개인전.

   1916 애렌스버그, 뒤샹과 함께 ‘독립미술가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설립. 다니엘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

   1920 뒤샹, 카트린 드레예(1877~1952)와 함께 최초의 현대미술관 설립을 위한 ‘익명의 모임’(Societe anonyme)을 창립. 『하퍼스 바자』의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 시작. 파리의 ‘살롱 다다 국제미술전’에 사진작품 전시.

   1921 뒤샹과 함께 창간호로 끝난 『뉴욕 다다』발간. 6월에 뒤샹이 파리로 떠나자 7월에 뒤샹을 따라감. 뒤샹이 그를 파리의 다다이스트 그룹에 소개하고 만 레이는 그들의 사진을 촬영함. 리브레리 시스에서 개인전. 키키(알리스 프랭, 1901~53)를 만나 사진을 찍고, 곧 동거에 들어감.

   1922 초상사진가로 활동하며 유명인사들의 초상으로 인정받기 시작. 의상 디자이너 폴 푸아레(1870~1944)가 그를 패션 사진에 참여시킴. 최초의 레이요그래프(카메라 없이 완성된 사진)가 만들어짐. 『바니티 페어』 11월호에 레이요그래프에 관한 기사가 실림. 12장의 레이요그래프와 트리스탄 차라(1896~1963)의 서문이 실린 사진집 『매혹의 장』(Champs delicieux) 출판.

 

  1923 베레니스 아보트가 암실 조수로 일하게 됨(1926년까지). 표지사진을 실은 『브룸』3월호와 다다이즘 잡지『리테라튀르』에 레이요그래프를 발표.

  1924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 최초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 『리테라튀르』에 「앵그르의 바이올린」이 수록됨. 『보그』영어판과 불어판에 특집기사가 실림.

 

  1925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열린 최초의 초현실주의 전시에 참가.

  1929 조수이자 연인(1932년까지)이 되는 리 밀러(1907~77)를 만남. 시카고 아트 클럽에서 개인전.

  1934 105점의 사진을 수록한『만 레이의 사진 1920 파리 1934』출판.

  1935 코네티컷 하트포드의 워층워스 문화회(Watsworth Atheneum)에서 개인전. 폴 엘뤼아르(1895~1952)의 시와 만 레이의 사진작품 13점이 수록된 『쉬운 일』(Facile) 출판. 미술잡지『카이에 다르』(Cahiers d'art)에 「초현실주의 사진에 관하여」기고.

  1943 잡지『뷰』(View)에 「사진은 미술이 아니다」를 발표. 『미니캠 포토그래피』(Minicam Photography)에 5점의 사진이 게재됨.

  1946 만 레이와 줄리엣 브라우너, 막스 에른스트(1891~1976)와 도로테아 테닝(1910~)의 합동결혼식이 열림.

  1948 수학적인 사물의 사진을 기초로 한 회화연작「셰익스피어 방정식」을 제작. 비버리힐즈의 윌리엄 코플리 화랑에서 개인전. 로스앤젤레스 프레몬트 대학에서 명예 석사학위를 받음.

  1951 파리로 이주 1961 베니스비엔날레 사진부문 황금 메달 수상.

  1962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회고전.

  1963 자서전『자화상』(Self Portrait) 출판. 슈투트가르트에서 레이요그래프 전시.

  1966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회고전. 『마네킹의 부활』(Resurrenction des mannequins) 출판.

  1967 출생지인 필라델피아의 미술제 심사위원회에서 만 레이를 고향을 빛낸 유공자로 인정함.

  1968 뉴욕 현대미술관의 ‘다다, 초현실주의, 그리고 그 유산’, ‘기계 시대의 종말에 대한 조망으로서의 기계전’에 출품.

  1972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 레이전’

 

   1976 11월 18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남.

 

 3. 만레이와 함께 활동했던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인물 1 <앙드레 브르통>

 

   제1차 세계대전시 육군병원 정신과, 신경과 근무

   1917년 오토마티슴, 다다이즘 운동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 발표 오른현(縣) 탱슈브레 출생하였으며 초현실주의의 주창자로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 등 상징파 시인에게 열중했으며 발레리와도 사귀었다. 의학생(醫學生)으르 파리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지의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애독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를 통하여 계발된 인간정신의 무의식 영역에 관한 인식은 후일 그가 초현실주의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1917년 이후는 아폴리네르, 아라공, T.수포, P.차라 등과 지내면서 오토마티슴(自動記述法)에 의한 작품 《자장(磁場)》(1921)을 수포와 함께 지었으며, 다다이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꿈 ·잠 ·무의식을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발로로 보는 시(詩)의 혁신운동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 후 이 운동은 많은 동조자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등, 몇 차례 이합집산을 거듭하였으나, 브르통만은 끝가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학 Litterature》 《초현실주의 혁명 La Revolution Surrealiste》 등 중요한 기관지를 발간하는 한편, 소설 《나자 Nadja》(1928), 수필집 《연통관(連通管) Les Vases communicants》(1932) 등의 중요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4. 만레이와 활동했던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2 -  <뒤상>

 

  1915년 뉴욕에서 독립미술협회 결성

  1941년 브르통과 뉴욕 초현실주의전

  1955년 미국 시민권 획득 프랑스 태생인 뒤샹은 1913년 뉴욕의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큰 호응을 얻자 뉴욕으로 이주하여 반 예술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인생과 예술을 허무의 시각에서 본 작가이며 한 시대의 끝을 진지하게 인식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철학적이며 문학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특히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 made)’는 예술 개념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함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레디메이드는 오브제 장르 중 하나로서 기성품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별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1912년 뒤샹이 파리 작업실에서 의자를 받침대 삼아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오브제이다. <자전거바퀴>(1913)로써 의자가 조각 받침대의 역할을 하고 자전거 바퀴는 뒤샹의 말대로 '움직이는 조각 작품'의 기능을 한다(마르셀 뒤샹이 창조해낸 미적 개념으로). 이것은 오브제의 자율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재현과 추상의 문제를 교묘히 비켜갔다. 자전거 바퀴는 실제적이지 재현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전거 바퀴는 추상적 움직임을 개념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외에도 <병 걸이><눈삽>등의 레디메이드가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917년 제작한 <샘>이 있다. 이 작품은 기성품인 변기에 'R. Mutt'라는 작가 서명을 덧붙여 하나의 작품으로써 가리워진 채로 출품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들 중 하나인 ‘샘’은 미술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반역이었다. 뉴욕의 ‘앙데팡당전’은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이지만 여기에 남성용 변기 하나가 익명으로 출품됨. 우리는 흔히 마르셀 뒤샹하면 '변기'를 떠올리게 된다. 엉뚱한 예술가..과연 예술가라고 불러도 될지 모호한 작가..그는 '예술가'라는 단어의 의미자체를 뒤흔들어버렸다.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행위(구상을 하고 재료를 선택하여 새로 만들어내는 것)를 벗어나 기계적으로 똑같이 찍혀나온 기성품에 사인을 하여 전시하는 것으로 작가의 역할을 끝냄으로써 새로운 사고를 창조시켰다.

 

   "미술품들이 파손되지 않고 유지하는 평균 수명은 30년 정도이다. 온갖 기술과 재능을 다해 복구해놓는 저들 프레스코와 고화들은 이미 오리지널이 아니다. 내 기성품들은 잃거나 파손되면 언제나 대치해 놓을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작품도 가질 수 없는 영구성을 부여한 셈이다."라는게 그의 말이다.

 

  뒤샹은 상당히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피카소와 6살차이로 동시대에 살았으며 많은 이들은 미술사에 있어서 뒤샹이 피카소보다 더 큰 획을 그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