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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6. 25. 23:58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나호열 시인의 시

한명희(시인․ 강원대 교수)

 

 

1. 흘러가는 세월

  나이가 지천명을 넘기고, 시력(詩歷)이 20년쯤 깊어지면 시도 저절로 익어가게 되는 것일까? 나호열의 시들이 점점 더 익어가고 있다. 잘 익은 밤송이가 되어 계절을 꽉 채우고 있다. 1986년 등단이후 그는 시집 ꡔ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햐는가ꡕ를 시작으로 ꡔ망각은 하얗다ꡕ, ꡔ칼과 집ꡕ, ꡔ낙타에 관한 질문ꡕ 등 여섯 권의 시집을 냈다. 여기에 사진 시집과 2권의 독도 앤솔로지를 포함하면 그의 시작품집은 더 늘어난다. 비교적 최근의 시집과 최근 발표작, 또 미발표작을 골라 보내온 원고를 읽으면 그의 시가 점점 더 익어가고 있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그의 시를 익혔음도 느껴진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가부좌를 틀거나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때로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잘 나가는 봄철 그렇게 보내고
진득하게 온몸을 뒤트는 욕정의 냄새
코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우리의 젊음도 저러했으리라
죄 짓고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처럼
가시 돋혀 떨어지는 눈물을 가슴으로 받으니
앞산도 쿵쿵 뒷산도 쿵쿵
밤송이 하나가 적막을 울리는구나
가시돋힌 채 늙어가는 세월
스스로 몸을 열어 보여주는 침묵의 돌멩이
풀섶에 제멋대로 해탈하고 있구나
-「밤나무 이야기」 전문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밤나무는 그대로 시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밤나무는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우리가 가진 오래된 은유의 관습에 의하면 봄은 유년기에 여름은 청년기에 가을과 겨울은 각각 중년기, 장년기에 해당한다. 이 시의 밤나무는 ‘진득하게 온몸을 뒤트는 욕정의 냄새’를 풍기는 청년기를 지나 ‘앞산도 쿵쿵 뒷산도 쿵쿵’ 적막을 울리며 밤송이를 떨구는 중년기도 지나고 있다. 밤나무가 ‘가부좌를 틀거나/반가사유의 모습으로/ 때로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있다는 것은 이 밤나무가 성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읽힌다. 나호열의 시들은 이렇게 지나가는 세월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다. 그에게 ‘세월’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따뜻한 눈을 선사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야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매화」 전문

  이 시에서도 나호열은 ‘세월의 흘러감’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 흘러가는 세월을 통해 나호열이 소중한 것을 발견해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젊어서는 향기가 짙고 자태가 고운 것만 꽃으로 보였으나 이제는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경지, 또 피는 꽃만 아니라 지는 꽃도 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따뜻하게 볼 때, 세상은 ‘천지에 꽃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나호열은 이런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추측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그런 세월이 흘러간 것이 아니고서는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폭죽처럼 눈에 보’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세월은 흘러가면서 나호열에서 세상 천지를 꽃으로 보는 만들어준 것이다.       

2.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 그리고 외로움 혹은 공(空) 
  세상 천지가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으면 삶은 즐거울 것인가?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여행을 떠나면 늘 즐거울 것인가?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나호열의 여행은 늘 외롭고 공허하다. 인간의 삶에 대한 오래된 비유 중 하나는 ‘여행’이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을 만큼 인생은, 어렵지 않게, 여행에 비유되어 왔다. 그러기에 여행을 하는 사람의 태도는 그 사람의 인생을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나호열의 여행은 유람이나 기행이 아니다. 삶이 외롭고 공허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그 누군가의 흔적은
새로운 나그네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하게 닦여져 나갔을 것이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걸레질에 밀려나간 사람의 냄새
소독 알콜처럼 빛나는 조명등이 서늘하다
이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했다
수건 하나조차 걸려 있지 않은 옷걸이
검은 비닐로 싸인 휴지통은 하품하듯 비어 있다
이 방은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여행자들은 15개 항목의
Guest Suite Policies를 읽는다
떠날 때 보증금을 깎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손길이 조심스럽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어서
―「Guest Room GS3」 전문

  낯선 여행지의 게스트 룸. 그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하는 만큼 ‘완벽하게 닦여져’ 있다. 이 완벽함이 시인에게는 오히려 ‘상처’를 제공한다. 시인이 게스트 룸에서 기대하는 것은 완벽한 정돈이 아니라 인간적인 따스함이기 때문이다. 미련없이 방을 떠나버리는 사람들, 또 보증금을 깎이지 않기 위해 게스트 룸의 규칙을 챙겨 읽는 여행자들이 나호열에게는 모두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흘러왔다 흘러가는 나그네들의 숙소에서 따뜻함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까? 그래도 시인이 게스트 룸에서 ‘방의 손’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게스트 룸이지만 따뜻한 손은 있을 것만 같고, 끝내 그 ‘따뜻한 손’을 찾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인간미에 대한 갈구이고 또 자신의 외로움의 표현일 것이다.
 
청량리에서 한 시간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이
오르고 내리는 버스를 타면
출렁이는 물 향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 너 장의
편지를 썼다 지우고
억새풀로 흔들리는 잠결에 닿는 곳
가끔, 깊은 산골로 가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면
길은 무섭게 한적해진다
(중략)
청량리에서 한 시간
종점까지 와서 만나는
그대는 나의
작은 예배당
―「문호리 예배당」

  시인이 버스를 타고 ‘청량리에서 한 시간’ 걸리는 ‘문호리 예배당’으로 떠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닿을 수 없는 외로움과 관련이 있다. 시인의 몸은 길이 ‘무섭게 한적해’진 곳으로, 버스 종점으로 떠나고 있지만 시인은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이 몸과 마음의 불일치! 나호열은 외롭다고 말하면서 떠나고, 떠나면서 외롭다고 말한다.
 
북행,
밀려 내려오는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외로움도 저와 같아서
저절로 눈시울 뜨거워지고 살이 에인다
남하하는 새떼들 묵묵히 하늘가를 스치고 난 후
한 마디 울음소리가 가슴에 서늘할 때
오른쪽 팔목을 잡는 바다
끝끝내 따라온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는 공의 바다
옆구리 쪽으로 통증이 기운다
관동팔경의 몇 경을 지나왔나
절벽에서 꽃을 따던 신라 할배
백 보 바다로 나아가 보니
흩뿌리는 눈보라가 저홀로 마을을 지나고 있다
―「7번 국도」

  시인은 ‘밀려오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맞으며 7번 국도를 북행하는 여행자이고 ‘절벽에서 꽃을 따던 신라 할배’의 후손이다. 또 ‘저홀로 마을을 지나’는 눈보라다. 인생이 여행이라 했거늘, 나호열 시인의 인생 여행은 외로움의 여행이고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공의 바다’를 지나는 순례다. 그에게 ‘외로움’은 ‘저절로 눈시울 뜨거워지고 살이 에이’는 것이다. 여행은 이러한 외로움을 동반한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 어디로든 가야만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말이다.   

3. 꽃의 존재증명


생화야
생화야
살아 있어
잘 봐
떨어지고 있잖아
산화하면서
더 눈부신
더 빛이 나는
벚꽃 나무 아래서
나는 불임의 꿈을 꾼다
―「벚꽃 축제」

  나호열의 시의 일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그러나 그것이 잘 되지 않는 안타까움의 호소를 보여준다. 넘겨받은 10편의 원고 중에 꽃을 테마로 한 시가 세 편이 있다. 이 꽃들은 모두 화려한 꽃이 아니라 존재마저 희미한 꽃들이다. “벚꽃”은 ‘산화’함으로써만 자신도 살아있는 꽃임을, 생화임을 증명한다. ‘잘 봐/ 떨어지고 있잖아’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산화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꽃. 이것이 소위 ‘못난 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는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당신에게 말 걸기」

  ‘당신은 참, 예쁜 꽃’이고 이 시는 참 예쁜 시다. 시어 하나하나의 구사도 예쁘고 시의 행이며 연 구성도 예쁘지만 이 시에 담겨있는 마음은 더 예쁘다. 이 세상의 모든 꽃을 예쁜 꽃으로 보는 마음. 그리고 혹 꽃이 자신이 예쁜 것을 모를까봐 그에게 다가가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말해주는 마음. 다시 생각해도 참 예쁜 시고 참 따뜻한 시다. 나에게도 그가 다가와 “이 세상에 못난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참 예쁜 사람이에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나호열 시인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역시 그에게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매화」)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떨어짐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보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다시 나호열에게 세월이 흘러갔음을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무릎을 꿇는다는 것, 속죄를 한다는 것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기쁜 일, 슬픈 일이 있게 마련이다. 오래오래 되새기고픈 일도 있을 것이고 후회스러운 일도 있을 것이다. 나호열은 마치 ‘속죄’하기 위해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중략)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펴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 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修行」 부분

  누군들 아니 그러랴만 그에게도 삶에는 “본의 아니게 구겨진” 부분이 있다. 나호열은 그것을 바로 펴기 위해 ‘수행’을 한다. 그 수행은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 놓고 만다. 하루를 살면 하루치의 허물이 새로 생긴다. 그러기에 시인은 무릎을 꿇고 주름을 펴는 ‘수행’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시인. 그래서 그의 시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죄짓고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처럼’(「밤나무 이야기」), ‘꽃 꺾은 죄를 고백하는 곳’(「문호리 예배당」),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아침에 전해준 새소리」)처럼 그의 시 군데군데 죄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데 이런 부분들이 그의 시를 엄숙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5. 사랑하라. 죽음 끝까지.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꿑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모든 경계를 머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한 산문에서 나호열은 이렇게 썼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자격인데, 변혁과 혁명과 미의 찬미자이어야 하는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 탐구하는 일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탐구. 그 탐구 속에서 나호열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경계를 머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고. 그가 꿈꾸는 사랑은 죽음이라는 경계마저도 뛰어넘는 사랑이다.
  1986년에 등단하면서 그는 당선 소감의 한부분을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목숨에 칼을 들이대고 살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닌 당당한 권리이다.” 그동안 그는 시에 칼을 들이대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의 시가 이렇게 깊어진 것이 아닐까. 그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목숨이 바로 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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