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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래 시인의 시통공간(詩通空間).271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27. 15:40

조승래 시인의 시통공간(詩通空間).271 - 나호열

  • 기자명 뉴스경남 
  •  입력 2025.02.10 10:17
  •  수정 2025.02.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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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다가오는 것들

나 호 열

꽃 피는 순간을 보려다 설핏 잠들었을 때
기척도 없이 내 몸을 감싸는 어둠처럼
얼굴에 내려앉는 시간의 발자국처럼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어느날 예고도 없이 떨어져 나간 문고리처럼
그렇게 슬픔으로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내게 남은 꿈은 꿈꾸지 않는 일이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당신과 이별하듯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은
나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자명종이다

- (시와정신, 2024 겨울)

◇ 시 해설

나호열 시인의 시어 ‘가만히 다가오는 것’을 가만 생각해 보면 느낌이 온다. 꽃이 피면서 갑자기 확 피지 않고 노을 지고 어둠이 와도 절벽처럼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이 아니며 시간도 얼굴 주름을 확 접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다가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것은 ‘어느날 예고도 없이 떨어져 나간 문고리처럼 그렇게 슬픔으로’ 가만히 다가오기도 한다. 천천히 왔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람에 잠들어 있는 아기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토끼를 가만 안아주고 만져 보면서 만남의 기쁨을 천천히 느끼는 행복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앉은 잠자리도 아주 천천히 가서 날개를 잡아야 도망을 가지 않는다. 느림 속에 숨어 있는 행복 찾기의 재미이다.

시인은 이별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듯하고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시인에게 남은 꿈이 있다면 ‘꿈꾸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치명적인 슬픔을 동반하는 이별이 두렵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당신과 이별’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신’이란 본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내가 나와 헤어지는 것은 상상하기 싫은 것이지만 가만히 다가와서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어리석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걸 자각했다고 해서 사실을 남에게 알려줄 시간은 없다. 스스로 미리 깨달으면 자명종을 직접 끌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은 안개처럼 온몸을 감싸게 됨을 시인이 알려준다.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시향문학회, 시와시학 문인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