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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詩人 탐험 - 金光林의은둔생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7. 13:55

詩人의 詩人 탐험 - 金光林의은둔생활

이유경    

 

월간조선 11월호

  일본과 대만에서 더 유명
 
 
  <우리는 여기 실린 그의 詩를 통하여 한반도가 지니고 있는 무게와 운명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노와 슬픔의 「直球」가 아니라, 해학이라는 고급한 표현으로 포장된 것이다. 이 해학은 일본의 유명 詩人 니시와키 준자브로(西脇順三郞)가 일생 동안 사랑했던 것이기도 하다. 무거운 운명과 문명 비평으로 채워진 이 시집을 일본의 독자에게 소개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이것은 일본 세이주사(靑樹社)의 世界詩人叢書 가운데 ⑤로 나온 「김광림시집(キム クワンリム·金光林 詩集)」 1995년 판에 대한 소개 말이다. 총서⑥은 프랑스의 대중詩人 자크 프레베르의 詩集이고, ⑦은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詩人이며 비평가인 이브 본느프와의 최신 詩集.
 
  북한 원산에서 태어나 대학을 한 학기까지 다니고 南으로 탈출해온 金光林 시인(72)은 지난 53년 동안 14권의 시집, 8권의 詩論-에세이集 등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보다 일본과 대만 詩壇에서 더 많이 알려져 온 그는 특히 1996년엔 일본 최대의 동인 단체인 「地球」로부터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地球賞」이란 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 이듬해엔 타이완에서 中興文藝特別貢獻奬(중흥문예특별공헌장)을, 1999년 판 「P.E.N. International」엔 그의 대표적인 詩 「0」가 번역돼 실리기도 한다. 前해엔 朴木月시인의 「韓服」이 실린 바 있으나 생존해 있는 한국인으로선 처음이다.
 
  P.E.N뿐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 詩誌 「詩와 思想」, 타이완의 「리(笠)」 등에 게재된 그의 대표작 「0」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사람들은 말한다/빈 통장이라고/무심코 저버린다/그래도 남아 있는/0이라는 수치//긍정하는 듯/부정하는 듯/그 어느 것도 아닌/남아있는 비어 있는 세계/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죽어 있는 것도 아닌/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이 조용한 허탈//그래도 0을 꺼내려고/은행창구를 찾아들지만/추심할 곳이 없는 현세/끝내 무결할 수 없는/이 통장//분명 모두 꺼냈는데도/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버려도 버려지지 않는/세계가 있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에는 그와 친한 사람이 대부분 세상을 떴거나 교류가 힘들어, 외국에 가서 그곳의 원로들과 交遊하게 된다고 애써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날을 시골 그의 은둔처에서 칩거하듯 보내고 있다. 또 일본과 타이완의 원로詩人들이 서울에 오기라도 하면 파주의 金시인 집에 머물다 가는 일이 예사.
 

 

  요즈음 그는 440쪽 분량의 대작 「現代日本詩人論」을 완성, 인쇄에 넘겨놓고 있는데 곧 출간될 예정이다.
 
 
  시골에서 혼자 자취하며 살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웅담3리. 법원읍에서 적성으로 가는 317번 도로를 따라 쇠꼴(金谷)부락을 지나고, 이내 다가오는 고개를 넘으면 눈 아래 언덕에 조각작품 열댓 점을 거느린 특이한 단층 벽돌집 한 채와 만날 수 있다. 지붕까지도 벽돌 색인데다 벽 일부를 달아내기도 해 옛집같이 보이지만 실제론 들어선 지 5년이 안 된 새 집이다.
 
  이곳에서 金光林 시인이 자취하고 농사 지으며 은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녀인 상미씨 부부가 함께 살아 편했지만 외손녀의 학교문제, 사위의 직장 출퇴근 때문에 그들 일가는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詩人은 완벽하게 혼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태평이었다.
 
  『전번에 일본에 10개월 동안 가 있을 때도 혼자 밥해 먹고 했었어. 요즈음에 보니까는 보온밥통에 쌀 씻어 담고 코드만 연결시키면 절로 밥이 돼 보온까지 되던 걸. 게다가 딸애가 주말이면 와서 밑반찬이랑은 다 해놓고 가고, 나도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서울 아이들 집에서 유하다 오면 여기 혼자 있는 건 일주일에 겨우 사나흘밖에 안 되잖아』
 
  첩첩한 산봉우리들 사이로 옛날 임꺽정이 아지트로 삼았다는 감악산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그의 집은 시골 어디에나 가면 맡을 수 있는 농약냄새에 젖어 있었다. 잡초가 듬성듬성한 자갈 깔린 마당은 그러나 깨끗했다. 8월 중순의 잦은 호우 때문일 것이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동네 전체가 목장촌 같기만 하다. 가축 사육장 같은 건물이 즐비해 있고 분뇨 냄새가 바람을 타고 언덕을 올라왔기 때문이다.
 
  무더운 날임에도 사진 찍힌다고 그러는지 金光林 시인은 소매 긴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순백의 곱슬머리는 「蓬頭亂髮(봉두난발)」 그대로였다. 살이 조금 오른 탓인가, 햇볕에 탄 얼굴이 팽팽하게 반짝거렸다. 크게 쌍꺼풀진 눈자위 말고는 주름살도 거의 없어진 채였다. 그러나 손등이 검푸르게 부풀어올라 있어 어찌된 거냐고 했더니 풀 뽑고 농사 짓다 「풀독」이 올라 근지러워 긁다가 이 지경이 됐다고 했다. 자꾸 덧나니까 술은 마시지 말래서 일체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술까지 금하게 되자 요즈음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고, 그렇지만 사흘에 한 갑 정도만 태운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室內는 詩人을 위해 꾸며진 것 같았다. 조각가인 그의 둘째 아들 상일씨가 설계하고 시공까지 한 예술적인 공간. 金시인의 고종사촌 누님 땅 500평을 월부 형식으로 구입, 집을 짓고 증축까지 해, 건평 40여 평의 이 집은 사실상 「金光林 기념관」이 되어 있다.
 
 
  일본·대만 詩人들 예찬詩 보내와
 
 
  제법 넓은 거실 한가운데에 平床(평상)이 하나 있고, 벽에는 각종 그림이나 시화, 기념사진, 여러 사람의 휘호가 걸려 있다. 서재는 책이 있는 공간과 집필실 독서실로 나눠져 연결이 돼 있었는데 최근에 간행된 일본 서적이 많이 보였다. 그가 한국 시단에서 일본의 詩人들과 가장 많은 교류를 갖고 왕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실 벽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이 몇 개 있었는데, 그 하나는 빽빽하게 쓴 일본어 붓글씨 표구였다. 시라이시 가즈코(白石がずこ)란 일본 여류시인이 1998년 3월1일자 아사히(朝日)신문에 발표한 「北에서 南으로 온 사나이」란 詩로, 그녀 자신의 유려한 필치로 「金光林 시인에게 바칩니다」란 부제를 달아 직접 써서 보내 온 것. 金시인이 번역해 보인 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향은 以北이라고 사나이는 말한다/열여덟 살 때 以南으로 왔더니 境界가 생겨/그로부터 半世紀/사나이는 부모와 매제 누구 하나의 소식조차 모른다/한 통의 편지 한 마디의 소식조차 끊기고/사나이는 남쪽에 와서 詩人이 되었다/네 자식과 손자도 생겨/사이좋게 부부싸움도 하며 농도 하는데 어느덧/고향인 북쪽 하늘에 날아가는 새조차/사나이 양친의 소식을 알려 주지 않는다/머리칼은 흰 구름이 되어 슬픔의 머리 위에 떠돌고/망향의 심정은/너무도 속 깊은 동굴 밑에 있어 아무에게도 안 보인다/사나이는 말한다/나이가 더 들면 北의 고향/산이나 하늘 보이는 곳에 살겠노라고/산이여 소리내어 뭔가 말해 주지 않으려나/하늘이여 푸르게 갠 눈에 눈물이 어리는 걸 안다면/뭔가 소식의 꽃잎 같은 거/무궁화 꽃에 실어 하늘하늘 이리로 /보내 주지 않으려나」
 
  시라이시 詩人은 金시인보다 두 살이 아래여서 그를 「오빠」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1986년 서울 아시아시인대회에 참석하는 등 한국에도 몇 차례 다녀간 일본 詩壇의 정상급이다.
 
  다른 하나는 타이완 詩人 3명과 일본 詩人 한 명이 지난 5월11일 이 집을 방문해 하룻밤을 머물다 갔는데 그때 전지 한 장에 「金光林詩大家惠存」이란 제목 아래 남긴 휘호였다. 타이완 펜클럽 회장을 역임한 陳千武(첸치엔우), 詩誌 「笠」의 주간 岩上(옌샹)과 ♥顯榮(콩시엔롱), 그리고 일본 현대시인클럽의 야마구치 소오지(山口♥司) 등이 그들. 휘호의 내용은 金시인에 대한 각자의 예찬 漢詩였다. 일본과 타이완 詩人들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을 휘호의 빈 곳에 붙여놓아 편집효과를 내고 있었다.
 
 
  『금강산에 가봤더니 새가 없더군』
 
 
  지난 7월 말 금강산을 다녀왔다고, 금강산 너머 元山港이 고향인 詩人이 먼저 화두를 뗐다. 『관광으로요?』 했더니 고개를 젓고 『해변시인학교를 거기서 열었잖아. 2박3일, 그 뭐 배에서 시인학교 모임 갖고 잠자고 새벽같이 나가 구경하는 그런 것이었어』 하더니 그는 갑자기 큰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금강산에서 말이야 아주 중대한 걸 알았어. 새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거야. 물론 볼 수도 없었고. 그 깊은 산중에서 새가 없다는 건 무엇 때문이겠어? 먹을 게 없으니까 새들이 살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깐 먹이사슬 하나가 끊어졌거나 환경이 바뀐 게 분명해. 정말로 적막하데.
 
  한데 다람쥐는 있어. 우리네 다람쥐는 사람이 가면 도망치잖아? 그렇지만 이놈의 금강산 다람쥐들은 사람이 가면 오히려 쫓아오는 거예요.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지. 아닌 게 아니라 먹을 것을 주니까 손바닥 위에까지 마구 올라와 먹이를 물고 가는 것이었어!』
 
  詩人다운 예리함이 말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목청을 팍 낮추고 중요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저쪽 지역이나 사람들에 대한 공포감 같은 것 때문인가 하고 나는 속으로 우울해 했다. 「오죽했으면!」 하는 막연한 공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금강산에서의 체험을 「北魚를 씹으며」란 제목으로 詩를 썼다 해서 달래서 읽어보았다. 「천하의 명산에/새 한 마리 안 보이다니/(내 눈이 멀었는가 싶도록)/속이 비어들기 시작하여/北魚를 샀지」라는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가 오래 前 대외적으로 알린 최종학력은 「국학대학 졸업」이지만, 최근 나에게 전해 준 자신의 연보에는 학교관계가 다음과 같이만 적혀 있고 「국학대학」은 그 대학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나와 있지 않았다. 연보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1929.9.21 함경남도 원산시 중리에서 부 金昌應(본관 全州), 모 金允福(본관 慶州) 2남4녀 중 장남으로 출생(본명 忠男)/1936.4 원산용동공립보통학교 입학: 소달구지에 치여 왼다리 골절상을 입고 한 달 동안 입원 가료함/1943.4 개성송도중학교 입학:吳之湖 화백이 미술교사로 있었음. 3학년 때 학도 근로 동원을 피해 향리로 돌아옴. 부친의 감화로 세계문학전집(新潮社版)을 독파함. /1945.9 광복 후 원산 공립중학교(한길중학으로 개명됨)에 편입 : 아래 학년에 李浩哲 崔仁勳 등이 있었음. /1947.9 평양종합대학 역사문학부 외국문학과에 입학 : 金奎東 李活 등을 알게 됨, 한 학기만 다니다 그만 두고 잠시 원산인민일보 기자생활을 하다. /1948.12.4 漣川을 거쳐 한탄강을 건너 단신 월남함」
 
 
  화가 李仲燮에게서 예술 눈 뜨다
 
 
  『개성송도중학을 그만두고 원산에 와 있을 때 광복이 되었어요. 광복 다음 다음날로 기억되는데 원산상업학교 운동장에서 광복을 경축하는 군중집회가 있다기에 구경을 갔었어요. 주석단에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키가 헌칠하고 미남인 청년이 유독 눈에 띄더군. 그가 나중 월남해서 만나게 되는 具常 시인이었어. 이 자리에는 인텔리 공산주의자 송별립 서창훈도 있었는데 이들이 하도 계급정권을 외쳐대는 통에 연사로 뽑힌 具시인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사건이 난 건 아마 1947년일 거요. 원산문학가동맹에서 具常 등이 주축이 되어 광복기념시집 「凝香(응향)」이란 걸 펴냈는데 표지 그림이 李仲燮이 그린 「장난치는 아이들」이었지. 책이 나오자 크게 소동이 났어요. 책 타이틀부터가 반동적이고 퇴폐적이며 反인민적이라며 규탄 대상이 된 데다 수록된 詩들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야. 언젠가 남북한 예술단 교류 때 그쪽 예술단을 이끌고 왔던 백인준이라고 있지? 그 자가 제일 혹독하게 나왔는데, 로동신문에다 「문학과 예술은 당과 인민에게 복무해야 한다」는 논조의 글을 두 번인가 실으면서 이 시집에 대해선 회의적 공상적 퇴폐적 도피적 절망적 반동적이라는 여섯 가지 죄목을 달아 격렬하게 단죄를 한 거야. 그때야 분간이 잘 안 갔지만 제약을 받으면서 쓰는 詩가 무슨 가치를 갖겠는가 싶어지더군.
 
  「응향 사건」으로 평양의 「중앙 북조선 문예총」에서 崔明翊 宋影 金史良 金利錫 등 굵직굵직한 문인들이 대거 원산으로 내려왔어요. 원산관이란 극장에서 보고회를 겸한 성토대회가 열렸지. 나도 방청석에 앉아 있었는데 군중들 앞에서 향토詩人들이 자아비판을 당하는 걸 볼 수 있었어.
 
  모멸을 당하던 具常 시인은 휴식시간에 잠깐 빠져 나와 곧바로 줄행랑을 놓았는데 그때 이후 원산에서 그를 구경할 수 없었던 거요.
 
  표지그림을 그린 李仲燮도 예외 없이 규탄대상이었어. 具시인이 사라져 버리자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 날 詩를 쓰는 황인호라는 선배가 李仲燮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요. 그때 李화백의 나이는 30세였고 일본인 부인인 남덕여사와의 사이에 아들 형제를 두고 있었어. 두 칸이 될까말까 한 그의 비좁은 화실엔 그리다 만 그림 몇 점이 있었고, 골동품 몇 개, 책꽂이엔 화집과 시집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 방안에서 李仲燮은 의기소침해 앉아 있더군. 말머리만 꺼내놓고는 계속 들으며 고개만 끄떡이고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었어. 희고 갸름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빛나는 큰 눈이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황인호와 나는 자주 그의 집에 찾아가 주로 시집을 뒤적거리고 詩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李화백의 권유로 고서점에서 未堂의 「花蛇集」을 구할 수 있었고 그에게서 샤를 보들레르의 「惡의 꽃」도 빌려 읽었어요. 李화백도 우리 집에 가끔 놀러오기도 했는데, 난 10代 청년이고 그는 30代 아냐? 내 선친 역시 30代 후반이고… 그래서 그가 우리 집에 와선 혼란이 안 가도록 「작은 긴상(일본식 金씨) 찾아왔다」고 하면 모두 웃고 그랬어요. 李화백은 프랑스 詩에 대해서도 해박했는데 그와 교류하면서 비로소 나는 예술세계에 대해 눈을 크게 뜨게 된 거야』
 
 
  대학을 중단하고 南下를 결심
 
 
  金光林이 北에서 넘어오기로 작정한 건 「凝香 사건」의 충격 때문이었지만 대학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공부를 하면서 그런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연보엔 평양종합대학이라고 적었지만 사실은 김일성대학으로, 그는 제2회 입학생이다. 원산부청에서 代書業을 하던 부친은 의과나 법과를 원했지만 詩를 쓰려던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외국문학부를 택한다. 그러나 영어는 한 주일에 두세 시간, 그나마 알파벳부터 가르치는 것이었다. 외국문학부라는 것은 사실상 러시아어과로, 하루 3시간씩 러시아語 강의를 하는데, 「니나 뽀타보아」란 두터운 러시아語 교과서를 한 학기에 다 떼게 했다.
 
  여기에 염증을 느낀 데다 권총을 찬 교수가 볼셰비키黨史를 강의하고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학교신축 공사장에 가서 노동을 시키는 등 면학 분위기가 아니어서 「때려치우기로」 했다. 서울에 가서 대학 다니며 영문학을 공부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산중학서 詩를 공부하던 문예반 친구 하나가 이미 서울에 가있는 데다 외삼촌이 해산물 장사를 하러 南으로 간다기에, 일단 서울에 가기만 하면 방법이 생길 것도 같았던 것이다.
 
  학교생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한 학생이 많았던지 새 학기가 시작되었어도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모양으로, 교수들이 흩어져 학생들을 설득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원산 그의 집에도 교수 한 명이 찾아왔다. 그 교수가 『동무는 복교하면 문학간부로 양성될 것이야』라고 설득하자 金光林은 엉겁결에 『아니 문학을 하는데도 간부가 있습네까?』 해버렸다. 이 말을 들은 교수는 두 말 않고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저놈들한테 찍히게 되는구나」 싶었던 그는 원산인민일보 교정부 기자로 석 달쯤 견디다가 거기서도 나와 1948년 12월 초 南行 열차를 탄다.
 
  장남인 그는 「대를 이을」 남자동생이 태어나서 100일이 되자 어머니에게만 월남 결심을 밝히고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돈으로 바꿔 쓰라며 챙겨준 오징어 두 짝을 짊어지고서였다. 아버지에게는 온다간다 알리지도 않았는데, 이는 서울에 한 번 가본다는 모험심과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것이 긴 이별이 될 줄 그때는 물론 몰랐었다. 인사 한 마디 않고 떠나온 사실에 대해 「불효 막심한 짓」이었다고 평생을 두고 후회해야 했다.
 
  경원선은 철원까지만 열차가 다녔으므로, 거기서 내려 걸어서 몰래 한탄강을 건넜다. 北의 보안대원에게 걸려 필사적으로 도망 다녔으며, 사격을 받고 혼비백산도 몇 차례 겪은 다음 꿈에 그리던 서울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위도가 훨씬 북쪽에 있는 원산보다 남쪽의 서울이 더 추웠다.
 
 
  서울에 와서 쓴 첫 詩 「문풍지」
 
 
  「낡은 문풍지에서/서낭당 기와냄새가 풍기다//보고/또 보고//이윽히 들여다보면/아슬아슬 옛 이야기가 생각났다//해묵은 風紙 위에/빗자국이 서려//천년 묵은/벽화 맛이 돋아 오르다」
 
  이 詩는 金光林이 월남해 사흘 만에 쓴 「문풍지」라는 제목의 詩 전문이다. 쓴 경위는 이랬다. 서울에 먼저 내려온 송 모라는 동창의 집 주소를 들고 그를 찾아간 金光林은 오징어를 팔아 며칠 버틸 수 있는 돈을 장만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詩를 공부하는 이 친구의 집에서 이틀을 머물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친구는 安養에 「靑葡萄」」라는 동인회가 있다면서 가보자고 했다.
 
  안양에선 同人 중 한 사람의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새벽에 잠은 안 오고 얼룩이 진 문풍지를 하염없이 보고 있다 쓴 詩가 「문풍지」다. 그가 문풍지라는 것을 제대로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同人들에게 이 詩를 보여 주었고, 同人들은 안양제지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靑鹿派의 朴斗鎭 시인에게 가서 평을 받아보자고 했다. 남쪽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詩人이었다. 詩를 읽어본 朴시인은 『앞으로 10년 후면 한국시가 많이 달라지겠는 걸!』 하면서 연합신문에 具常 시인이 문화부장으로 있으니 작품을 가져가 보이라고 했다. 具시인은 원산에서 凝香사건 때 먼발치로 보았는데 꼭 만나보고 싶은 詩人이었다.
 
  『신문사에 가서 인사하고 내가 원산서 며칠 전 넘어왔다고 하자 선생은 대뜸 지하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우동을 두 그릇이나 시켜 주더구먼. 오랜만에 정말 배부르게 먹었어요. 작품 「문풍지」를 보였더니, 具선생은 「좀 관념적이긴 하지만…」 하면서 두고 가라고 하데. 후에 이 詩가 연합신문의 「민중문화란」에 실렸어요. 추천난도 독자난도 아닌 어중간한 신인작품 소개난이라 할까 그런 것이었는데… 그렇지! 그때 나의 詩와 함께 崔啓洛의 「古家寸想」이란 詩도 그 난에 실렸더군. 최계락은 진주농고학생으로 소개돼 있고 나는 그냥 「월남학생」으로 했더군. 越을 城자로 잘못 읽은 어떤 이는 나더러 「성남중학에 다니느냐?」고 묻기도 해서 당황한 적도 있어.
 
  그후 민중문화 투고자들 모임이 있다 해서 가보니 여남은 명이 와 있더군. 그 중 내가 제일 어린 것 같았어. 연합신문 문화부의 林權載와 그의 형인 문학평론가 林肯載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때가 외톨박이 내가 林씨 집안과 인연을 맺는 시발점이 되었다고나 할까. 나중 그들의 막내 누이동생과 결혼을 하게 됐으니 말이야』
 
  친척집에서 남자 식모노릇도 하며 기식을 하다가 여주의 시골 초등학교에서 준교사로 1년6개월 정도 근무하며, 詩 습작에 몰두하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軍에 입대한다. 충남 온양의 방위학교에 갔다가 「1·4 후퇴」를 맞아 동래 범어사까지 걸어서 후퇴하기도 한다. 경남 통영의 예비사단에서 방위장교로 배속돼 있던 그는 김상옥 詩人을 만나게 되는데 詩人으로부터 동기와 같은 우의를 받으며 문학에의 열정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詩 쓰는 연대장과 정훈장교
 
 
  다시 보병학교로 차출되어 장교로 임관된 그는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때 전투에서 그의 연락병이 전사하는데 金光林 소위는 이 죽음을 애도하며 「진달래」란 詩를 쓴다. 휴전이 되고 그는 이 詩를 「國防」이라는 軍 잡지에 투고하게 되고, 게재가 되자 연대장이 그를 불러 정훈장교로 수하에 두며 후의를 베푼다. 연대장 文重燮 대령 역시 詩人 지망생이었던 모양으로 그때와 몇 년 후 詩를 쓰는 金光林에게 은인이 된다.
 
  軍의 정훈관계 일로 자주 서울에 나가도록 해 문학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했을 뿐 아니라, 5·16 후엔 혁명 주체 세력이 되어 우연히 만난 金光林에게 안정된 공무원생활을 하도록 주선해 주었기 때문이다.
 
  軍 정훈장교로 있을 무렵 그는 서울에만 오면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근처에 있던 「서린다방」을 출입하게 된다. 이 다방에는 全鳳健, 金宗三 등 詩 쓰는 친구들과 소설가 朴淵禧가 늘 진을 치고 있었고, 평론가 임긍재가 이들에게 술을 사는 등 「봉」 노릇을 하고 있었다. 林은 거물 야당정치인 趙炳玉 박사의 스피치 라이터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돈을 잘 썼다.
 
  1955년 10월에 林의 막내 누이동생인 林恩嬌와 결혼을 할 때도 주례가 趙박사였다. 金光林이 26세였고 신부는 그보다 세 살이 아래인 황해도 갑부집 9남매의 철부지 막내딸이었는데 오빠인 임긍재가 적극 나서서 金光林에게 안겼다.
 
  서린다방에서 金光林은 전방에서 온 촌뜨기였다. 金宗三이나 全鳳健 등의 詩와 시론에 대한, 혹은 영화나 음악 화제에 金光林은 늘 꿀 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이듬해 金光林은 제대를 신청해 군복을 벗게 되고 임긍재의 주선으로 종합지 「自由世界」 편집장이 되어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1957년 5월 金光林은 全鳳健 金宗三과 함께 連帶(연대)시집 「戰爭과 音樂과 希望과」를 간행한다. 발행은 「자유세계社」였다. 순서는 맨 앞에 金宗三의 「音樂과」를, 金光林의 「戰爭과」가 가운데에, 맨 끝에 全鳳健의 「希望과」를 배정했다. 이 연대시집은 전날의 「청록집」을 의식하고 만든 것 같다.
 
  『靑鹿派는 나이의 역순으로 세상을 떴고, 우리 「연대파」는 순서대로 가고 있어』라고 金光林 시인은 종종 말하고 있다. 이른바 「38따라지」인 이들 셋 중 연장자인 金宗三이 맨 먼저 가고 全鳳健이 그 다음에, 그리고 한 살 아래인 자신이 나중에 세상을 뜰 것이란 이야기다. 청록파가 「역순」이란 것은 제일 나이 어린 지훈이 제일 먼저, 최연장자인 박두진이 맨 나중에 갔기 때문이다. 이북 출신의 연대파와 다른 점은 청록파 詩人들이 모두 남한 출신이란 것이다.
 
  이 연대시집 「戰爭과…」는 참여한 세 사람의 詩人으로 하여금 한국적 모더니티를 표방한 知的인 서정시를 쓰는 시인群으로 평가받게 만든다. 특히 문예지 추천이니 신춘문예 당선이니 하는 문단 데뷔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金光林에겐 詩人 타이틀을 갖게 한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당시 문학지로, 「現代文學」과 어깨를 겨루고 있던 「文學藝術」에서 그의 신작 詩를 기성詩人으로 대우하며 게재했기 때문이다. 문학예술을 주제하고 있던 朴南秀 시인이 이 연대시집을 읽고, 全鳳健을 시켜 金光林의 詩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이다. 金시인은 그때 「傷心하는 接木」이라는 詩를 발표한다. 사실상의 데뷔작품이고 첫 시집의 제목이 되는 작품이다.
 
  「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그 다음의 가장이가 안 됐다//요행히도/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땐 우리는 어쩌다 애꾸눈이 아니면 절름발이였고/다음엔/찢기운 가슴의/어느 모퉁이가/허물어졌을 것이다//몇 번째나/등골이 싸느랗게 휘어졌다가는/도로/접목 같은 세월을 만났다//새털의 악보를 타고/하야라니 내리는 것은/눈보란가/꽃보란가/꽃도/무너지면 두려운 것/요즈막엔/사랑도 목을 졸라대는 /미안한 기별의/나날이다//그것은 헝가리언의/꺼진 가슴들이 뿜어 올린 웅군싹이 아니면/아름다움을 넘어선 인간들의 녹색 눈망울이 먹물져 가던/내일의/황혼이다//꽃이 열매의 협주를 잃어버린/다음의/나의 나무들에게 인사하는 계절이//문안처럼/물었을 뿐이다//지금도/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그 다음의 가장이가 안 됐다」
 
  박남수 시인과 金光林 시인의 오랜 우정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를 계기로 金光林 詩人은 3년 단위로 시집 한 권씩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생활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박남수 김종삼 전봉건 등 詩 친구들
 
 
  〈宗三이나 鳳健은 그런대로 「연애선수」였다고 할까. 鳳健은 총각 때 비오는 날이면 만나는 연인이 있었다. 그녀는 끝내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宗三은 두 번째 부인을 맞고서도 또 기막힌 연애에 빠져들었다. 어느 여류시인과의 사이에 여식까지 둘 정도로…. 「김종삼문학상」 시상식 때 나더러 한 마디 하라기에 『종삼은 여자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익살을 부렸다가 그의 두 번째 부인의 눈총을 받은 일도 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는 그에게 사랑만은 늘 붙어 다닌 듯하다.
 
  봉건은 헌칠하게 키가 컸다. 내 머리는 그의 목둘레쯤에나 가 닿았을까. 비쩍 말라 있어서 걸을 때 보면 휘청거리는 듯했다. 그에게 어느 날 千祥炳이 도전해 왔다. 무슨 시비가 붙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동방문화싸롱」에서 만나 명동성당 앞으로 백주의 대결을 하러 갔다.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노기를 띠고 마주 선 것까지는 그럴 듯했으나 액션이 터지지 않는다. 『야 먼저 덤벼!』 『네 놈이 먼저 덤벼!』 서로가 먼저 주먹질 해오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은 싸움판은 개판이 되고 말았다. 싱겁기 짝이 없는 대결이었다〉
 
  金光林 시인이 쓴 「38따라지의 恨」이란 글에서 인용해본 것인데,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30代 후반 詩人들의 어느 희화적인 풍경을 엿볼 수 있다.
 
  1988년 전봉건 詩人이 당뇨에 합병증이 겹쳐 작고하고 서울대 영안실에서 한국시인협회葬이 열렸을 때 金光林 시인은 눈물의 추도사를 읽었다.
 
  『…이제 평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원고지일랑 접어두십시오. 저린 오금을 쭉 펴고 못이 박인 손에서 영영 펜을 놓으십시오. 20년을 하루같이 매달려 왔던 「현대시학」에 더 이상 미련일랑 두지 마십시오. 다만 詩 정신의 귀감으로 이 땅에 오래 남아 있어 주십시오. 혈혈단신 우주공간이나 자유로이 산책하며 살아생전 못 이룬 귀향길에 어서 드십시오. 형! 봉건 형!』
 
  金光林 시인이 詩壇에 나오고 가장 가까이 했던 사람은 박남수 詩人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1958년 문학예술의 朴시인을 통해 시단에 본격적으로 등단한 이후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1975년까지의 18년 동안 두 사람은 水魚之交(수어지교)의 관계였다.
 
  둘 다 월남한 사람들이라는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더욱 자주 만났던 것 같다. 朴시인이 白磁社란 출판사를 갖고 있으면서 金시인의 처녀시집 「傷心하는 接木」을 내 주고, 그 10년 후 金시인이 母音社란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朴시인의 제3시집 「神의 쓰레기」를 만들어준 것도 이런 남다른 우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金시인은 「갈매기素描」, 「神의 쓰레기」, 「새의 暗葬」으로 이어지는 박남수 詩의 흐름에서 시적인 공감대를 찾아낸 것 같다. 「新서정의 실질적인 주창자인 朴南秀는 언어의 조형과 존재성을 추구해온 이미지의 詩人이다」고 그의 「한국 현대시의 발자취」라는 시론에서 적고 있다. 자신의 詩 세계를 주지적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거나 「눈부신 높이에서 認知될 수 있는」아이러니 시론 주장의 근저에는 존재와 언어미학에 천착했던 박남수 詩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詩에 관한 비평문 곳곳에 박남수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朴시인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金시인과는 늘 「편지」라는 채널을 열어놓고 수많은 글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朴시인이 1994년 9월 이역에서 작고하기까지 계속되었다. 朴시인이 미국서 보내온 편지가 90여 통, 그가 미국으로 날려보낸 것도 그만한 분량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국으로 보낸 편지는 朴시인의 자녀들이 챙겨놓지 않았고 최근엔 연락조차 두절돼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스승처럼 친구처럼 모시던 박남수 詩人이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때 쓴 詩들을 모아 세 권의 시집을 내도록 주선했던 것도 金시인이었다. 朴시인이 작고하자 한국의 金시인은 「哭朴南秀」란 다음과 같은 詩를 쓰고서야 견딜 수 있었다.
 
  「살아서는 못 누리는 귀향을/저승길에서라도/잠시 들러볼 요량으로 홀연 이승을 하직하셨습니까//김포에서 손 흔든 지/꼭 열아홉 해/1994년 9월17일/새벽 두 시//불과 추석을 사흘 앞두고/송편을 빚어 줄/아내를 찾아/기어이 떠나야만 했습니까//고국이 서쪽인지 동쪽인지 어림짐작도 잘 안 가는/이국 땅 뉴저지에서/어이 눈을 감으셨습니까//선생님!」
 
 
  4대 詩 잡지 중 3개를 창간하다
 
 
  한국의 현존하는 詩 월간지 「現代詩學」, 「詩文學」, 「心象」, 「現代詩」 등 4개 중 「詩文學」 이외엔 모두 金光林 시인이 직접 창간했거나 산파역을 맡았던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시학」은 1966년 자신이 창간을 해서 10권 정도를 발행하다 자금난으로 중단하고 전봉건 詩人에게 제호를 넘겨줘 1969년 1월 새로 등록케 한 것이고, 「心象」은 1973년 가을 박목월 詩人과 함께 창간을 발상하고 그가 지면을 꾸렸던 詩 잡지다. 월간 현대시의 경우는 1990년 초 한국문연이란 출판사를 하고 있던 원구식 詩人이 詩 잡지를 하겠다며 金시인을 주간으로 영입, 자신은 편집장 역할을 하다 훗날 주간을 겸하게 된 잡지다.
 
  詩誌 「心象」 창간을 모의한 것은 박목월 시인이 한국시인협회 회장, 金光林 시인이 사무국장을 맡은 1973년 봄이었다. 당시 「현대시학」과 「시문학」이 나오고 있었다.
 
  金시인은 1967년부터 외환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은행 社歌를 만들어야 했다. 조사부에 근무하고 있던 金시인이 木月에게 가사를 청탁, 거액의 원고료를 받아 전하는 날, 목월이 대뜸 원고료가 든 봉투를 흔들며 『김형! 이걸 밑천으로 우리 근사한 詩 잡지 하나 만듭시다. 모자라면 내 집사람한테 협조 구하고…』라고 했다.
 
  그해 초가을에 창간호가 나왔는데 金시인이 편집을 도맡다시피 했다. 1년여 동안 잡지는 탄탄하게 운영돼 갔다. 그러던 중 김종삼의 詩를 싣기로 했는데 엉뚱한 사람의 詩가 수록돼 있는 것이었다. 金시인이 따졌더니, 목월은 『1년치 광고를 얻어 주겠다기에…』하며 김종삼의 詩는 다음 호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金시인은 은행의 지방전출을 자원하고, 대구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이를 핑계로 잡지 편집에서 손을 떼고 대구로 내려가 버렸다.
 
  1970년대 중반의 金光林 시인은 늘 어두운 얼굴이었다. 돈 문제로 시끄러워 피신하듯 이사를 자주 해야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돈 문제는 부인이 진 빚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과 이혼 충동
 
 
  『집사람은 황해도의 갑부집 9남매의 막내딸이었어요. 어려서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라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고 뭔가 하면 될 줄 알고 손을 댔다간 실패를 거듭했어요. 내가 은행에 있으니까 사채꾼들이야 얼마든지 돈 융통해 주고 나중에 나에게로 와서 빚 독촉하면 되는 것이니 얼마나 좋아. 빚쟁이들이 은행을 들락거리고 안 되겠구나 싶더군. 결국 은행을 그만둔 것도 퇴직금받아 빚잔치하려는 결심 때문이었어요』
 
  이 무렵 그는 자살과 이혼 충동에 많이 사로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혼은 「葛藤」이란 詩를 쓰면서 자연 해소됐고, 자살은 알바레스의 「自殺의 硏究」를 번역하면서 단념하고 말았다고 했다. 담백함과 절절함, 그리고 해학성 때문에 그의 대표작이 된 「葛藤」이란 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고속버스/온천으로 간다/십팔 년 만에/새삼 돌아보는 아내/수척한 강산이여//그동안/내 자식들을/등꽃처럼 매달아 놓고/배배 꼬인 줄기/까칠한 아내여//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덩굴처럼 얽혀드는/아내의 손발/싸늘한 인연이여//허탕을 치면/바라보라고/하늘이/저기 걸려 있다//그대 이 세상에 왜 왔지/-빚 갚으러」
 
  은행퇴직금으로 아내가 진 빚을 청산하고 빈털터리가 된 그는 파주시 월롱면 시골에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사는 것이 막막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글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밤낮 거기에 매달렸다. 詩論集 「오늘의 詩學(1979년)」과 일곱 번째 시집 「言語로 만든 새(1979년)」에 이어 제8시집 「바로 설 때 팽이는 운다(1982년)」가 이 무렵의 역작들이다.
 
  金光林 시인에게 생애 두 번째로 「은인」이 된 사람이 경기도 화성군에 새로 생긴 장안전문대학의 朴龍珠 학장이었다. 영문학자며 수필가인 朴학장은 이 대학 일어학과에 金光林 시인을 초빙하고 학위가 없어 無자격자인 그를 조교수로까지 발탁한 것이다. 1983년이었다. 일본어로야 金시인에겐 학위와 상관없는 실력이 있었다. 시간강사 타이틀임에도 내부적으론 전임대우를 해주었고, 몇 차례의 신청 끝에 조교수를 따 주는 데 朴학장이 애를 썼기에 金시인은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파주에서 서울을 거쳐 수원 근처에 있는 대학까지 출퇴근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편안하고 열심일 수 있었다. 후진들을 가르친다는 행복감과, 무엇보다 3남1녀의 아이들을 안심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일어과 조교수가 된 그는 日書 번역에도 몰두했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 가라 쥬로(唐十郞)의 「무도회의 수첩」 등이 그것으로 출판이 되자 반응도 좋았다.
 
  1982년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 현대시인회의」에 이어 1984년의 東京회의에 한국대표단장으로 참여하면서 아시아 지역 시인사회에 金光林이란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고, 1993년의 아시아시인회의 서울대회선 金시인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성대하게 치르기도 한다. 이럭저럭 金시인은 타이완의 陳千武(첸치엔우), 일본의 다카하시 기쿠하루(高橋喜久晴) 등과 함께 「東方의 하늘에 무지개를」이란 3人 시집을 2년에 걸쳐 韓·中·日 3개 국어 판으로 출간, 이들로 하여금 「아시아의 3형제詩人」으로 통칭케 했다.
 
 
  金光林 문학과 그의 관점
 
 
  金光林 시의 초기 바탕은 전쟁에 대한 혐오감에 두고 있었다. 3人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중 金시인이 쓴 것은 전쟁의 비극성과 그 속에 드러난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인 「心象의 밝은 그림자」 이후로는 이미지 중심의 이른바 「主知的 서정」의 詩를 주창하며 그런 유의 詩를 쓴다.
 
  그의 주지적 서정시는 한국적이라 할 만한 전통적 리듬이나 언어를 자신의 詩에서 배제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미지는 투명해야 하고 언어는 현대적인 감각을 지닐 수 있게 간명하게 관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知的인 표현 형태에다 서정을 내용으로 담는 詩인 셈인데 쉽게 말해서 知的으로 통제된 서정시라고 보면 된다.
 
  이런 主知的 서정시는 「아이러니의 詩」로 발전된다. 자기가 체험했거나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나가는 詩를 쓴 것이다. 일본의 비평가 무라타 스즈무(森田進)가 『金光林의 詩에는 아이러니와 풍자가 있지만, 그 저변에는 깊은 비애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적절하다. 그 비애감은 38선을 혈혈단신으로 넘어와 처연하게 살아온 실향민의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지적으로 통제된 아이러니와 해학의 바탕에는 허무와 비애감으로 충만한 것이다.
 
  1996년에 쓴 「괜한 소리」는 그의 「아이러니 시론」, 아버지에겐 한 마디 말도 없이 38선을 넘어온 불효 막심한 아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해학적으로 노래한 비탄의 詩다. 전반부를 인용해보자.
 
  <血壓 때문에 술을 끊어버렸다고 결심한 중학동창은/마지막 對酌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半世紀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마냥 즐겁기만 하다/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을 못했다며/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 마디/-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國會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아니/라고 대꾸하긴 했지만/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어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하긴 그래/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무슨 짓인들 말렸을까?/南行列車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아버지의 노여움에/모두가 모른다고 잡아 뗀 모양이다/…>
 
 
  쓸쓸한 얼굴로 배웅
 
 
  金光林 시인에 대해 쓰기 위해 파주 시골 그의 집을 세 번 찾았고, 한 번은 서울 은평구의 연신내에서 만나 점심과 차를 나누며 환담을 했다. 그의 집으로 가려면 불광동이나 구파발에서 적성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2400원을 내고 웅담리에서 내려야 하는데 한 시간 하고 30분은 좋이 걸린다.
 
  한 번은 친구인 朴義祥 시인과 함께 갔다. 朴시인은 일본에도 자주 가고 거기 시단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우리는 오전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오후 내내 거실에 앉아, 「眞露」에 있는 그의 장남인 상수씨가 가져온 것 같은 그 회사 술 「天菊」 다섯 병을 깨끗이 비웠다.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고 동의한 것은 일본 詩人들의 소탈하면서도 고상한 삶에 관한 것과, 그들이 金시인에게 보내 준 두터운 우정의 흔적들에 관한 것이었다.
 
  외로운 그는 내가 갔을 때마다 이야기하며 친구 대하듯 깔깔 웃기도 했고, 종종걸음치며 필요할 거라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내놓곤 했다. 그리고 내가 언덕을 내려올 땐 마당에 서서 쓸쓸한 얼굴로 배웅했고, 朴시인과 함께 갔을 땐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흔두 살을 맞은 자그마한 이 은둔의 詩人은 오늘도 종일 입을 닫고 詩를 쓰거나 책을 읽고, 가끔은 북녘 하늘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元山港 부근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를 바람을 맞고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애견 두 마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