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 옆에 새로 놓인 ‘소박한 길’… 찬찬히 ‘설악의 가을’로 향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9-26 09:15
- 업데이트 2024-09-26 09:19
차로를 위태롭게 걸어야 했던 ‘백담사 가는 길’이 걷기 좋은 길이 됐다.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가 보도와 차도를 분리하는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차량의 위협 없이 이 길을 느긋하게 걸을 수 있게 된 것. 보도를 내기 어려운 구간에는 사진처럼 다리를 매달아 걷는 길을 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느긋하고 여유롭게 백담사 가는 길
전두환 은거하며 유명해진 백담사
차도·보도 구분 없어 위험하던 길
올해 초 분리공사 마치며 편하게 걷게 돼
옥빛 연못·계곡 물소리 벗삼아 산행
금강담·백담계곡의 매력 재발견
6년전 입적 백담사 조오현 스님
청빈한 삶·나눔으로 소외된 이들 위안
자신에겐 엄격했던 성자… 울림 남겨
백담사 지나면 수렴동 계곡 시작
소나무·전나무 구불구불 오솔길 힐링
]인제·속초=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내설악의 들머리인 백담사까지 가는 길이 ‘걷기 좋은 길’이 됐다.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가 올 초에 차로와 보도 구분이 없어 위험천만했던 길을 분리해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든 것. 덕분에 셔틀버스를 타고 휙 지나쳐야 했던 백담계곡의 비경을 걸으면서 찬찬히 볼 수 있게 됐다. 그 길이 걷기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순해서다. 백담사까지도 그렇고, 백담사 넘어 영시암까지도 길이 평탄하다. 그 길을 걸으면서 떠올린 3개의 장면이 있다. 각 장면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창흡, 그리고 조오현 스님이다. 그 얘기를 썼다. 이제 단풍 시즌이 코앞이다. 꼭 대청봉까지 가지 않아도 단풍 물든 설악산은 탄성을 부른다. 가장 편안하게 설악 단풍을 만나고 올 수 있는, 이 길을 추천한다.
백담계곡의 보도를 걸어서 하산하는 등산객들. 차로 지나쳤을 때 미처 못 봤던 백담계곡의 경관을 즐기며 걷는다.
# 장면1. 유배 온 前 대통령과 백담사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내설악 들머리의 절집 백담사(百潭寺)까지 셔틀버스가 다닌다. 버스가 다니는 건 백담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7㎞ 남짓한 산길이다. 걸으면 꼬박 2시간이 걸리는 이 길을, 버스는 15분 만에 잇는다. 등산객이나 사찰을 찾는 불교 신도의 불편 해소를 위해 버스 운행이 시작됐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셔틀버스 운행의 계기는 순전히 백담사로 들어갔던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벌써 36년 전의 일이다. 전 전 대통령은 이른바 ‘5공(共) 청산’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들어가 2년여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유배 생활을 했다. 공교로운 건 훗날 전 전 대통령이 사망한 날이 백담사로 들어간 지 딱 33년이 되던 2021년 11월 23일이었다는 것이다. 운명이었을까. 백담사로 들어간 날과 죽은 날의 날짜가 같다는 게 상징처럼 읽힌다.
백담사는 전 전 대통령 은거를 계기로 일약 전국적 명소로 떠올랐다. 불자들만 간간이 찾아들던 산중 외딴 절집에 관광객은 물론이고, 호기심 가득한 ‘구경꾼’까지 몰려들었다. 방문객은 갈수록 늘었다. 1990년 4월까지는 많아 봐야 하루 500명 내외였던 것이, 5월 이후에는 1000명을 넘었고, ‘윤달에 절집 세 곳을 방문하면 악연(惡緣)이 끊어진다’는 삼사순례(三寺巡禮) 기간이 겹친 그해 9월에는 하루 방문객이 4000명에 달했다. 지역의 새마을봉사회와 노인회, 그리고 각종 관변단체에서 줄지어 대형버스를 타고 왔다. 시중 여행사에서는 유폐 중인 전 전 대통령을 ‘구경’하고 오는 ‘백담사·오세암 1박 2일 사찰기도 코스’ 여행상품까지 팔았으니, 유배 중인 전직 대통령이 ‘관광상품’이 된 셈이었다.
영시암의 회주였던 설봉 스님 부도. 그는 6·25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한 영시암과 오세암, 봉정암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 장면 1-1. 우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방문객이 늘어난 사실에 고무되어서 그랬을까. 전 전 대통령은 부처님 진신사리 봉정식 때 마이크를 잡고 즉석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그날 연설의 한 대목. “백일기도를 하면서 자주 번뇌와 망상에 휩싸였어요. ‘죽더라도 몇 사람을 손을 보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꽉 찼는데, 기도한 지 70일쯤 되자 마음속의 불길이 꺼지기 시작했지요. 그제야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있게 됐어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가해자 스스로 ‘평온함을 찾았다는 고백’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백담사를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전 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했다는 얘기가 하나 있다. ‘잘 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조그만 일에도 잘 우는 사람치고,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며 말끝마다 강조했다고 했다. 과연 누가 그랬을까. 전 전 대통령 앞에서 울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전 전 대통령이 ‘손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그가 아니었을까.
그 시절, 백담사는 용대리에서 7㎞ 남짓의 좁은 계곡 길을 꼬박 걸어야 닿는 깊은 산중의 오지였다. 간혹 택시가 드나들기도 했지만,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계곡이 좁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 전 대통령의 유배로 방문객이 크게 늘면서 불편은 더해졌다. 궁리 끝에 백담사는 미니 버스 2대를 사서 용대리∼백담사 구간 운행을 시작했다. 방문객이 폭증하면서 나중에는 이것으로도 턱없이 모자라 인근 사찰에서 빌린 승합차 10여 대를 투입해 연신 방문객을 실어날라야 했다.
옥빛 물색이 인상적인 백담계곡의 ‘금강담’에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불과 보름쯤 전의 모습이다.
# 장면 1-2. 모든 건 다 마음에 달렸다
전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30일, 은둔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제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백담사는 버스 운행을 중단했다. 어쩌다 한 번 운행할 때는 신도들만 골라 태웠다. 단체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때도 간혹 있긴 했지만, 자리가 남아도 등산객은 절대로 태워주지 않았다. 버스비를 낸다고 통사정을 해도 소용없었다. 왜 그렇게 등산객들에게 인색했을까. 짚이는 데가 없는 건 아니다. 그 시절, 등산을 빙자해 숲으로 찾아든 일부 몰지각한 행락객들이 아무 곳에서나 멱을 감고,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곤 했으니까.
어찌 됐든 버스로 불과 15분 거리를, 무거운 배낭을 지고 딱딱한 콘크리트 길을 두 시간 넘게 걸어야 했던 등산객들은 ‘좋은 마음’일 리 없었다. 고된 산행으로 지쳐 하산하던 등산객은 좌석이 반 이상 비었는데도 못 본 척하고 가버리는 버스의 뒤꽁무니에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태워주지 않는 버스에 대한 야속함 때문에 ‘백담사 가는 길’의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아예 버스가 없던 시절에는 백담계곡은 느긋하게 걷던 좋은 길이었는데, ‘태워주지 않는 버스’가 다니면서부터 그 길은 ‘화가 치미는 길’이 돼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백담마을의 향토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셔틀버스를 누구나 돈만 내면 탈 수 있다. 버스로 휭하니 지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이 길을 일부러 걷는다. 안 태워줄 때는 기를 쓰고 타려 하더니, 막상 태워주니까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모든 건 다 ‘마음’에 달렸다.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 위에서는 ‘편히 가고자’ 했던 마음이, 버스로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자 ‘불편해도 걷겠다’는 마음이 됐다. ‘걸어가야 해서’ 분노했는데, 이제 ‘걸어갈 수 있어서’ 행복해한다. 모든 건 마음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길을 걸으면서 줄곧 그 생각을 했다.
내설악 영시암. 가을이면 단풍 붉게 물드는 여기까지는 평지와 다를 게 없는 편안한 길이다.
# 장면 2. 용대리에서 백담사 가는 길
‘백담사 가는 길’이 걷기 좋은 길이 됐다.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가 올 초에 백담사 가는 길의 ‘보·차도(步·車道) 분리 공사’를 끝낸 것. 그동안 이 도로는 사람과 차가 함께 썼다. 길을 걸으려면 운행 차량의 위협과 매연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보도와 차도가 분리되면서 위태롭게 걸어야 했던 차도 대신 백담계곡의 운치를 느끼며 보도를 따라 느긋하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곧 단풍 물들어 가을 색으로 화려해질 백담계곡 길을 걸어봤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7㎞ 구간을 걷는 데는 2시간쯤이 걸리고, 백담사에서 다시 영시암까지 4.4㎞는 1시간 20분쯤 소요된다. 두 구간을 합하면 편도 11.4㎞의 짧지 않은 길이지만, 걷기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용대리에서 백담사 가는 길에 딱 한 곳 짧은 오르막만 빼면, 영시암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시암을 반환점 삼아서 되돌아서 나올 수도 있고, 체력이 남는다면 오세암까지 붙여 걸을 수도 있겠다.
백담사길 걷기의 출발 지점은 용대리 셔틀버스 정류장이다.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내가평교’를 건넌다. 차로 다닐 때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다리다. 다리를 건너니 바위 사이로 매혹적인 옥빛 물색의 연못이 나온다. 백담계곡의 시작을 알리는 명소 ‘금강담(金剛潭)’이다. 그 시절 백담계곡을 일러 ‘곡백담(曲百潭)’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헌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지연이 여길 지나다 시 한 수를 남겼다. “가던 길 멈추고 흐르는 물에 묻노니/어찌해서 이렇게 맑고 시원한가/…중략…/위로는 곡백담 있어/나를 끌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말하는 것일까. 그가 들어갔을 법한 계곡 안쪽은 아쉽게도 탐방금지구역이라 들어설 수 없다.
내설악 들머리인 백담마을의 조형물.
# 장면 2-1.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차도와 구분한 백담사 길 보도는 계곡을 줄곧 왼쪽 어깨 쪽에 두고 이어진다. 바지 걷고 백담계곡 안쪽으로 들어서서 계곡 물을 첨벙거리며 농월대와 두타연, 치마바위, 학암, 거북바위 같은 명승을 구경하고 싶은데, 출입 금지라 방법이 없다. 시야를 가린 숲 너머로 고개를 빼고 기웃거려 보지만, 계곡 안쪽의 경관은 보이는 게 없다. 길이 높아지는데, 계곡은 고개 저 아래로 멀어져 가물가물해지는 때도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던 스님이 계곡 저 아래 어디쯤엔가 계곡의 거센 물살을 끼고 있던 바위가 있다고 했다. 떨어지지 않으려 물가의 바위를 안고 돌아 내려갔다고 해서 ‘안을 포(抱)’ 자를 쓰는 ‘포전암(抱轉巖)’이 있고, 바위를 등지고 아슬아슬 내려갔다 해서 ‘짐 질 부(負)’ 자를 쓰는 ‘부전암(負轉巖)’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게 어떤 바위인지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길에서 계곡이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 덧붙인다. 보도와 차도 구분 공사로 만든 백담사 가는 길은 그리 운치 있는 길은 아니다. 고즈넉한 오솔길이거나 근사한 나무 덱을 상상하면 실망한다. 그냥 차로에 경계를 놓아 구분한 평범한 ‘보도’일 따름이다. 도저히 보도를 덧대기 어려운 좁은 협곡 딱 한 곳에는 철 다리를 매달아서 보도를 만들었지만, 그것도 뭐 근사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건 아니다. 길 전체가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이 길은 들어갈 때보다 터덜터덜 되돌아 나오는 길이 느낌이 더 좋다. 그 느낌을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다. ‘완만한 내리막의 좀 지루한 길’이 주는 매력이라고나 할까.
백담사를 지나면 내설악의 대표적인 계곡인 수렴동이 시작된다. 수렴(水簾)은 ‘물로 만든 발’을 뜻하니 곧 폭포를 말한다. 수렴동을 끼고 영시암까지는 키 큰 소나무와 전나무가 도열한 구불구불 오솔길이다. 오솔길을 걸으면 길 폭이 좁아서 숲이 주위를 온통 에워싸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다 솔바람 소리와 계곡 물소리에다 새소리까지 겹쳐지니, 걷는 게 호사처럼 느껴질 정도다.
옛 선비들의 산행기를 보면 영시암 가는 길에 구융소, 황장우, 흑선동, 사미대, 영산담 같은 지명의 명소가 주르륵 나오는데, 분간이 쉽지 않다. 한바탕 수해가 지나가고 나면 계곡의 지형이 송두리째 바뀌기 때문에 그런 걸까.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또 여기 같다.
이내 영시암이다. 담장도 없고, 전각의 배치도 헐겁다. 그냥 길 위에다 지은 듯한 느낌이랄까. 영시암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인 듯하다. 설악산을 오르내리는 이들은 거개가 여기서 쉬어간다. 내려오는 이들은 지친 다리를 쉬고, 올라가는 이들은 여기서 체력을 가늠하거나 장비를 점검한다.
미시령 표지석. 백담사나 영시암에 다녀온 뒤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가서 숙박하고 돌아오는 일정을 추천한다.
# 장면 2-2. 더 깊은 산속으로 숨다
백담계곡과 수렴동을 지나 영시암까지 걷다 보면 김창흡과 수시로 만난다. 김창흡은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선 후기 문신.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고, 설악산 유산기를 남긴 김수증이 큰아버지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과 예조판서에 오른 김창협은 형이다. 대를 이어서 영의정을 지낸 집안이니 ‘조선 최고의 명문가’라 부른대도 그리 과장은 아니다. 특이한 건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2대에 걸쳐 4명 모두 설악산 기행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김창흡이 설악에 들어오게 된 건 아버지와 벼슬하던 형이 차례로 당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게 계기였다. 처음 한계령에 거처를 마련했던 그는 백담계곡으로 옮겨 ‘백연정사(百淵精舍)’를 짓고는 10년쯤 살았다. 그러고는 계곡 더 깊이 들어가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벽운정사가 화재로 불타자 그는 계곡을 한참 더 들어가 수렴동 계곡에다 영시암을 세우고 은거했다. 세상과 등 돌리고 앉은 그는 매번 더 깊은 곳으로 숨었다. 영시(永矢)란 암자 이름은 ‘영원히 맹세한다’는 뜻. 이 절에 은거해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름으로 건 것이다.
김창흡은 거기 살았다는 것만으로, 설악산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는 수많은 선비들을 자기가 사는 설악산으로 불러들였다. 그를 보러 오가는 길에 선비들은 비로소 설악의 아름다움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설악을 노래한 수많은 시편에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건 그래서다. 김창흡은 또 오세암, 마등령, 금강굴, 와선대 등 설악의 명소를 탐방하고 지은 기행문 ‘설악일기’를 펴내기도 했다.
# 장면 3. 자신의 죄를 겨누던 성자
백담사에 전두환만 있는 건 아니다. 백담사에는 조오현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6년 전쯤 입적했으니 시제는 과거형이다. 청빈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생전에 맑은 눈으로 시를 썼다. 백담사에 가면 떠올려지는 그의 시가 있다. 교과서에도 실린 시 ‘아득한 성자’다. 스님은 이 시로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알 까고 죽은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되었는데도/나는 살아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 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스스로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다’고 했지만, 생전에 그가 드리운 그늘은 넓고도 깊었다. 그가 거둔 품 안에서 지치고 소외된 이들이 위안을 얻었다. 내 것을 가지지 않고 후하게 모두 다 베풀고 갔다. 그걸 과시하기는커녕 알리지도 않았다. 문학과 불교를 이은 만해마을도 그의 설계에서 시작됐고, 용대리와 백담사 사이를 오르내리는 셔틀버스 운영권을 대가 없이 마을에 넘긴 것도 그의 결단이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스님은 ‘성자(聖子)’였다. 그는 모든 걸 나눴다. 높으나 낮으나 모든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줬다. 용대리 마을에는 스님의 장학금을 받지 않은 가구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고맙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고 술회하는 걸 보면, 스님이 나누고 건넸던 건 금전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스님은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으나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의 시 ‘죄와 벌’을 읽어보자.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 해를 보냅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보면서 ‘나의 죄’를 겨누는 성자의 마음. 그리고 제가 지은 죄를 멋대로 스스로 용서해놓고 ‘이제 평화를 얻었다’며 간증하던 전직 대통령의 태도. 그 둘의 대비가 이리도 극명하다.
■ 숙소는 속초에
내설악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다. 숙박을 하겠다면 속초로 가는 걸 추천한다. 용대리에서 미시령 터널만 통과하면 바로 속초다. 속초에는 지난 6월 문을 연 세계적인 프리미엄 호텔&리조트 그룹인 반얀그룹 브랜드 중 하나인 ‘카시아’ 계열의 카시아 속초가 있다. 속초 바다에 딱 붙어서 들어선 카시아 속초는 지상 26층 규모의 647개 전 객실이 ‘오션 뷰’다. 레스토랑과 바가 5개. 스파와 사우나, 수영장과 노천탕, 피트니스센터 등을 두루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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