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낙조 그림 같은 불모산… 女도공·기녀의 사연 품었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8-22 09:07
- 업데이트 2024-08-22 09:41
김해 불모산 정상 아래 조성해 놓은 노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경관. 구름이 타고 넘어가는 능선 너머로 보이는 곳이 창원시 진해구다. 진해 앞바다 뒤쪽으로 섬처럼 떠 있는 땅이 마산합포구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역사인물 이야기 따라 즐기는 김해
150년전 ‘순애보 기녀’ 강담운
연인 향한 그리움 담은 詩 애절
詩에 나온 장소 걷기코스 조성
500년전 ‘여성 도공’ 백파선
日아리타에 도자기 기술 전파
광장·카페·벽화로 자취 남아
김해·창원 경계에 솟은 불모산
전망대서 보는 남해 풍경 압권
정상 코앞까지 차로 갈 수 있어
김해 종로길 ‘글로벌 푸드타운’
이주노동자 운영하는 식당 즐비
손으로 먹는 카레·두리안 눈길
김해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가야를 버리고, 김해를 보다
경남 김해는 2000년 전 가야의 시간이 새겨진 묵직한 역사적 중량의 도시. 확실히 ‘요즘 취향’의 여행지는 아니다. 역사적 무게감을 어떤 이들은 뽀얗게 먼지 앉은 ‘고리타분한 박물관 도시’로 받아들이기도 하니까.
진지한 답사여행자라면 몰라도, 여행 목적지로 그동안 김해는 뒷전이었다. 김수로왕과 아유타야에서 시집온 허황옥 얘기를 빼고 꼽는다면, 김해의 이른바 ‘대중적 여행지’는 다섯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한다.
도시로서의 전반적 평가는 다르겠지만, ‘여행에 관한 한’ 김해는 지루하다. ‘2000년 전 시간’에 관심 없는 여행자들에게 김해는 심심한 도시다. 이웃한 부산, 그리고 진해와 마산을 거느린 창원과 비교해보면 더 그렇다. 그런데 이런 심심한 도시에 매력적인 리듬을 부여하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강담운(姜澹雲)과 백파선(百婆仙)이다.
경남 김해를 여행하다 이 두 사람을 만났다. 아니, 애초에 두 여성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서 김해로 향했던 것이니, 이 둘이 ‘김해로의 여정을 이끌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 두 사람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김수로왕과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지금까지의 김해와는 다른 김해를 만날 수 있다. 유적답사 일색의 높낮이 없는 김해 여행에 새로운 리듬감이 생긴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다. 김해를 이해하는 새로운 열쇠를 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김해에서 가야는, 이번에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김해에 간다면 이정표와 안내판이 이끄는 대로 고분과 박물관만 따라간다고 해도 가야로 향하는 여정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테니까. 유적마다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첩첩이 쌓여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가야 이야기는 크게 모자람이 없다. 그에 비하면 가야를 뺀 김해 이야기는 부피가 턱없이 작다. 기왕의 두툼한 책에다 이야기를 보태기보다는, 여백이 많은 책에다 이야기를 덧붙이는 게 낫지 않겠는가.
강담운과 백파선 얘기를 꺼내놓기에 앞서 불모산 얘기부터 시작한다. 역사 여행과는 또 다른, 김해여행의 구체적 제안을 위해서다. 무릇 여행은 ‘보고 듣는 것’. 스토리와 경관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여기다가 먹거리까지 얹어지면 최상이다. 경관과 이야기, 먹거리를 다 넣은 여행을 제안하면서 첫머리에 김해의 경관 명소를 소개한다. 여행을 이끄는 가장 직관적인 유혹은 뭐니 뭐니 해도 ‘풍경’이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절집 은하사 범종각의 목어. 아래는 대웅전 추녀에 새긴 물고기. 둘 다 얼굴은 용이고 몸은 물고기인 신성한 물고기로서, 즉 ‘신어(神魚)’다.
# 바다 없는 김해에서 바다를 보다
먼저 김해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바로잡는다. 첫 번째는 ‘부산의 김해공항은 김해 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김해공항은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 있다. 두 번째는 ‘김해에는 바다가 없다’는 것이다. 김해의 심리적 위치는 ‘부산 옆’이다. 부산이 바다를 끼고 있으니 김해에도 바다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산과 이웃한 바닷가 땅은 김해가 아니라, 창원시 진해구다.
김해에는 바다가 없는데도, 바다를 굽어보는 근사한 자리가 있다.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솟은 불모산(801m)이다. 불모산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게 ‘불모(不毛)’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인가 했는데, 숲이 울창하다. 다시 읽어보니 산의 한자 이름이 부처의 어머니, 즉 ‘불모(佛母)’다. 수로왕 아들이 입산해 스님이 됐으니 왕비 허황옥을 불모로 여겨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믿을 게 못 된다. 세종실록에 불무산은 ‘부을무산’이라고 나온다. 고어로 서쪽을 뜻하는 ‘부을’에 산을 의미하는 ‘뫼’가 변형된 ‘무’ 자를 더해 붙인 이름이라는 게 정설이다.
불모산에 서면 서쪽으로 창원시 진해구 일대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남해안의 바다 경관에다 순위를 매긴다면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너끈히 들 만큼 풍경이 수려하다. 시야가 넓고 바다 경관이 장쾌한 것도 있지만, 불모산 주위의 근경(近景)과 웅산에서 봉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만들어내는 중경(中景), 그리고 진해 앞바다의 원경(遠景)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구도의 그림 같다.
진해만 일대를 내려다보는 360m 길이의 나무 덱과 전망대는 지난 3월에 완공된 것이니 이른바 ‘신상(新商)’이다. 작년에 개발제한구역 주민지원공모사업에 선정돼 받은 예산으로 만들었단다. 지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낙조 풍경을 보았는데, 푸르게 빛나는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침나절의 풍경도 놓칠 수 없어 해 질 무렵과 해 뜰 무렵에 두 번을 다녀왔다. 오전과 오후,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손들어 줄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았다. 불모산 정상 일대가 산 아래 도시의 폭염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서늘하다는 것도 매력이었다.
해발 800m를 넘는 산이라 오르기 힘들 거란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차를 타고 불모산 정상 코앞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차를 세운 자리가 진짜 산정의 ‘코앞’이다.
길 찾기도 어렵지 않다. 차량 내비게이터에 ‘약수산장’이나 ‘대청계곡길 195-277’을 입력한 뒤, 약수산장 앞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차로 15분쯤 더 올라가면 송신소 바로 아래에 닿는다. 외길이어서 헷갈릴 이유가 없다. 아직은 입소문 나기 전이라 오르내리는 차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 혹시라도 사람이 몰리면 도로가 마비되거나 제한적으로 통제될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기 전에 서둘러서 다녀오기를 권한다.
강담운의 시에 등장하는 누각 ‘연자루’를 허문 자리에 들어선 절집 연화사.
# 시(詩) 속의 한 문장이 여행을 이끌다
강담운(姜澹雲)은 기녀다. 평양에서 기녀의 딸로 태어나 자라다가 여덟 살에 김해로 와서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기녀로 살았다. 기녀라고 하니까, 오래전 사람 같지만, 150년 전쯤 인물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과 나이를 가늠해보자. 개화파 김옥균보다 6살이 어린 동생이고, 매국노 이완용보다는 1살 많은 누나다.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그가 지은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시월 강남에 비 내리니 / 북쪽엔 눈 내리리라. / 북쪽에서 눈 만나시거든 / 비 속에 그리워하는 저를 생각하소서. / 떠날 때 주신 귤 하나 / 손의 반지인 듯 아낍니다. /양주로 오시게 되면 / 돌아오시는 날 (귤) 만 개를 드리오리다.” -‘서울로 가는 사람과 이별하며’ 전문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떠날 때 준 귤 하나를 마치 반지처럼 아낀다’는 부분. 서울로 떠난 이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절한 그리움이 뭉클하게 만져진다. 강담운이 남긴 시 절반이 이렇듯 간절하게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이토록 절절하게 보고 싶어 했던 이는 누굴까.
강담운은 김해 출신 문인화가인 배전이란 인물을 사랑했다. 강담운의 호는 ‘지재(只在)’이고, 배전의 호는 ‘차산(此山)’이다. 두 사람의 호는 당시(唐詩)의 한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松下問童子)/ 스승은 약초를 캐러갔다고(言師採藥去) / 다만 이 산속에 있을 테지만(只在此山中) / 구름이 깊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雲深不知處)”
안개 자욱한 신선도가 연상되는 시다. 강담운과 배전은 ‘다만 이 산 속에 있을 테지만(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이란 대목에서 ‘지재(只在)’와 ‘차산(此山)’을 취해 각자의 호로 삼았다. 강담운은 차산(此山·배전의 호)이란 산 속에서, 살아가고 존재할 것(只在·강담운의 호)을 약속했던 것이다.
배전은 과거를 보기 위해 김해를 떠나 서울로 갔는데, 매번 낙방을 거듭했던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배전과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서울로 떠나보낸 강담운은 김해에 홀로 남아 상사병과 이별의 한으로 10년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썼다. ‘주고 간 귤을 반지처럼 아낀다’는 시도 그 무렵 지은 것이다.
강담운의 시는 배전이 엮어 펴낸 시집 ‘지재당고’에 전한다. 시집에는 ‘금릉잡시’라는 제목의 연작시도 실려 있다. 금릉은 당시 김해를 이르는 지명. 34수의 연작 시에는 김해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에는 김해 ‘연자루’란 누각이 등장하고, 무성한 풀의 수로왕릉도, 김해 일대를 굽어보는 산성 만장대 얘기도 나온다. 강담운의 시를 읽어가며 절집이 된 옛 연자루 자리나 산성의 봉화대 등 150여 년 전의 공간을 둘러보는 여정이 제법 흥미롭다.
강담운의 금릉잡시에 등장하는 김해의 명소를 둘러보는 걷기 코스가 있다. 이름하여 ‘금릉로드’다. 김해관광 포털사이트로 예약하면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안내와 해설을 해주는 ‘금릉로드’ 걷기에 동행할 수 있다. 내내 궁금했던 건 강담운과 배전이 다시 해후했는지 여부였는데 아무런 기록도, 단서도 남아있는 게 없다. 열린 결말. 해피엔딩이었을까, 아니면 변심 혹은 배신이었을까.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가야시대 토기. 박물관 전시배치의 미감이 유독 뛰어나다. 김해에는 분청사기와 백자 등을 굽는 도요지가 많았다.
# 희미한 500년 전의 이름, 백파선
김해에 또 한 명의 흥미로운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백파선(百婆仙)’이다. 백파선은 이름이 아니다. 그가 죽은 뒤에 후손이 그의 삶을 기려 붙여준 호칭이다. 본명은 모른다. 자그마치 500년 전의 인물이니 모든 게 희미하다. 그가 김해 출신이라는 것도 어렴풋한 추정이다.
백파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사기장의 아내였다. 임진왜란 중 왜군은 도자기를 굽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가는 데 혈안이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했을까. 왜 도자기였을까. 도자기 산업은 당시 최고의 첨단산업이었다. 빚고, 굽는 과정에 하나하나 축적된 경험과 정밀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는 귀한 보석 취급을 받았다.
그 무렵 일본으로 끌려간 대표적인 조선의 도공이 일본 아리타(有田) 도자기의 시조로 꼽히는 이삼평(李參平)이다. 그의 명성에 버금간 인물이 백파선이다. 백파선이 남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먼저 정착한 곳은 아리타 인근의 다케오(武雄)였다. 그곳에서 분청사기를 굽던 백파선은 남편이 세상을 뜨자 900명의 도공을 이끌고 아리타로 건너갔다. 그곳에 백자를 만드는 백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통신사 왕래가 재개되면서 귀국하는 조선인도 있었지만 백파선은 1656년 96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도자기를 빚었다. 백파선이란 칭호는 백파선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면서 ‘백 살을 산 할머니 신선’이란 뜻으로 증손자가 붙인 칭호다. 백파선은 지금까지 일본에서 ‘아리타산 도자기의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다. 도자기 빚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건 그 시절 여성의 몸으로 수백 명의 도공을 이끌었던 탁월한 지도력이 아닐까.
후손의 기록에는 백파선 부부의 고향이 ‘심해(深海)’다. 백파선 후손은 심해(沈海·후카우미)를 성씨로 한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심해는 지금의 김해를 지칭한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백파선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 김해 상동면의 조선시대 대규모 요업단지였던 ‘감물야촌(甘勿也村)’이다. 감물이란 우리 말로 ‘단물(甘水)’이다. 당시 지명이 ‘단물마을’이었다는 얘기다. 그곳이 김해 상동면 대감리의 대감마을이다.
대감마을 한복판에는 백파선 광장이 조성돼 있고, 광장을 끼고 스토리텔링 카페 ‘백파선’이 있다. 마을에는 백파선을 주제로 한 벽화로 그득하다. 백파선의 자취가 아무 데도 없으니, 벽화로나마 당시 도공들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벽화는 일본 아리타에 있는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 ‘백파선’을 그린 그림이었다.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 마치 실제 공간처럼 느껴졌다.
대감마을 뒤쪽 야산에서 대규모 가마터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2019년과 2021년에 이어 지난해 10월에도 백자 가마터가 발견됐다. 2016년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나왔다. 주민들은 가마터에서 백파선과 관련한 실낱같은 단서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상동면 대감마을 골목길의 담에다 그려 넣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김해 출신의 여 도공 ‘백파선’.
# 김해의 ‘종로’가 다문화를 만나다
이번에는 김해의 다국적 음식 얘기. 김해에는 ‘종로’가 있다. 동상시장에 딱 붙어있는 서상동 일대의 상가거리 2.6㎞를 ‘종로길’이라 부른다. 짐작하는 것처럼 서울의 ‘종로’에서 가져다 쓴 길 이름이다. 행정 주소는 아니지만 거리 입구에 높은 아치형 구조물을 세우고 종로길이란 이름을 매달아 놓았다.
한때 종로길은 가장 번화한 김해의 중심이었다. 그 시절, 이 거리 중심에 ‘종로예식장’이 있었다. 동상시장을 30∼40년 넘게 지키고 있는 상인들의 기억이다. 종로길이란 이름의 시작은, 혹시 그 예식장 상호가 아니었을까.
압축성장의 시기에 번성하고 발전한 곳의 비교 대상은 늘 서울이었다. 전국 어디나 가장 번화한 골목을 ‘명동’이라 불렀듯, 김해의 ‘종로길’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리라. 그렇다면 그 시절의 ‘종로’는 훈장 같은 이름이었겠다.
도심 상권이 옮겨가면서 쇠락한 원도심 처지가 된 종로길은 이제 종로보다는 ‘이태원’에 더 가깝다. 종로길 전체는 다문화 거리다. 중국, 베트남, 태국은 물론이고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 인도네시아 등 다국적 상점들이 가득하다.
다문화 거리는 급격한 상권이동으로 공동화된 도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조성됐다. 각국의 글자가 난무하는 간판이 늘어선 거리는,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종로길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글로벌 푸드타운’이다. 김해 근처 공단 다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만들어진 식당 거리를 그렇게 부른다.
이 골목에서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의 웬만한 음식도 다 맛볼 수 있다. 전통 화덕을 차려놓고 타슈켄트식 빵을 굽는 상점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밥을 먹는 게 기본인 카레집이 있다.
두리안과 코코넛, 파파야 등의 열대과일을 파는 과일가게 한쪽에서는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짜내 주스로 만들어준다. 베트남 노래방도, 필리핀 노래방도 있고, 할랄 식재료만 파는 가게도 있으며 서울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미얀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모로코 식당도 있다.
# 다국적이 일상인 공간의 매력
사실 김해의 역사적인 다문화의 시작은,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야의 공주 허황옥과의 혼인이 아니었을까. 최초의 국제결혼. 따지고 보면 허황옥은 지금의 결혼 이주 여성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종로길 이전에 김해의 다문화의 뿌리가 자그마치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다.
‘다국적’이 일상인 종로길 상권의 주 소비층은 이주노동자다. 김해에만 이주노동자가 3만이 넘는다. 일과시간 이후나 주말이면 별다르게 갈 곳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종로길 일대로 쏟아져 나온다. 한창 붐빌 때, 종로길에는 한국인이 소수다. 어쩐지 그곳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져서 한국인이 오히려 쭈뼛거리게 된다.
생각해보면 쭈뼛거리거나 불편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종로길이나 글로벌 푸드타운 주 고객은 외국인 노동자지만, 가게 주인들의 한국인 손님에 대한 호의가 기대 이상이어서 그렇다.
사실 이런 친절이 뭐 뜻밖이거나 특별한 일은 아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자국 음식이나 문화에 호기심을 보이며 접근하는 외국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하건대 이 거리에서 한국인은, 어딜 들어가든 호의로 가득한 주인의 환대를 받을 수 있다. 노점 앞에서 이국적인 음식에 관심을 보이면 먹을 걸 불쑥 내미는 이들도 있고, 환한 웃음으로 카메라 렌즈를 반기기도 한다.
‘유사(類似) 해외 여행’의 가벼운 흥분을 만끽할 수 있을 만큼, 종로길의 거리는 충분히 밝고 환하다. 우범지대 취급하는 수도권 주변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이주노동자 밀집 지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외국인 거리 조성 초기인 15년 전부터 김해시가 일대의 도로며 상가를 꾸준히 정비해 왔기 때문이다.
종로길 방문을 권하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다문화 거리는 한국인들에게는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일 따름이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전통을 지키며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소통하는 소중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그곳에 가거든 집 떠나와 외국 땅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사는 이들에게 같은 민족, 같은 국가에 속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눈물 나게 끈끈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걸 생각하고 난 뒤에 살피면 거리도, 사람도 좀 달라 보인다.
종로길 일대는 주류를 이룬 외국인 노동자의 국적에 따라 거리 분위기가 달라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도권을 잡았던 건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였는데, 이즈음에는 이른바 ‘투르키스탄’이 압도적 대세다. 투르키스탄이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를 두루 일컫는 이름이다.
종로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음식도 대부분 중앙아시아 음식이다. 양고기나 소고기, 양파 등을 넣고 만두처럼 빚어 구워낸 빵 ‘쌈사’가 이 거리에서 가장 흔한 음식. 화덕에 구운 식사 빵인 ‘레포쉬카’도 있고, 다진 고기를 꼬치구이처럼 구워낸 ‘샤슬릭’도 있다. 다문화 거리 산책을 ‘유사여행’에 비유한다면, 종로길 다문화 거리의 음식은 순식간에 국경을 넘나들게 해주는 ‘순간이동 도구’쯤 된다.
■ 김해와 ‘뒷고기’
김해에는 ‘김해 뒷고기’가 있다. 뒷고기란 도축장에서 뒤로 빼돌린 고기를 말한다. 도축 공정이 체계화되면서 ‘진짜 뒷고기’는 진작 다 사라졌지만, 김해의 뒷고기 식당은 100여 곳을 헤아린다. 지난 4월 김해시가 봉황동과 부원동 주변을 ‘뒷고기 거리’로 지정하기도 했다. 김해에서 뒷고기를 주문하면 돼지고기 가브리살부터 항정살 등 대략 9가지 부위를 낸다. 같은 뒷고기 집이라 해도 가게마다 고기 부위나 고기를 써는 방식 등이 저마다 달라 맛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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