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전남 장흥 '정남진 문학탐방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24. 13:49

그 길 속 그 이야기 

<53> 전남 장흥 '정남진 문학탐방길'
중앙일보
입력 2014.09.12 00:10

업데이트 2014.12.31 17:03

손민호 기자 


길은 사람의 흔적이다. 사람이 여기에서 저기로, 또는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한 자취가 다져져 길이 된다. 인생이 결국 한평생 돌아다녀 쌓인 행적이라면, 길은 어쩌면 인생일 수 있다. 아울러 뭇 인생을 글로 적은 것을 문학이라 한다면, 길은 인생이므로 문학이어야 한다.

이 어쭙잖은 삼단논법을 증명하는 길이 전남 장흥에 있다. 이름은 시시하게도 ‘정남진 문학탐방길’이다. 이 시오리(十五里) 고갯길은 그러나 문학을 알아내려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문학이 된 길이다. 그 길에서 한 작가의 대표작품, 아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소설로 꼽히는 명작이 잉태했기 때문이다.

고(故) 이청준(1939∼2008)의 단편소설 ‘눈길’은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뒷산에서 대덕읍 연지삼거리까지 이어지는 굽이진 오솔길에서 태어났다.

그 길을 걷는 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일이자 한 처연한 인생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청준의 눈길은 인적 끊긴 지 오래여서 깊은 오솔길 모양이었다. 길라잡이로 나선 선생의 집안 조카 이황우씨의 왼손에 막걸리병이 들려 있다. 집에서 만든 호박막걸리다. 이청준의 고향 진목마을은 예부터 호박이 유명했다.

문향 장흥

장흥은 문림(文林)이다. 장흥 문학의 전통은 역사가 깊다. 기봉 백광홍(1522∼56)의 가사 ‘관서별곡’이 장흥에서 쓰여졌다. 그러나 문림 장흥의 기원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문향(文鄕) 장흥은 외려 현대에 이르러 빛을 발한다. 송기숙·한승원·이청준·이승우 등 한국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가 무더기로 장흥에서 태어났다. 김제현·위선환·김영남·이대흠 등 장흥이 배출한 시인도 여럿이다. 장흥군에 따르면 현재 장흥 출신 문인은 100명이 넘는다. 2008년 장흥은 전국 유일의 문학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눈길 ‘산지까끔’에서 내려다본 진목마을 풍경.

장흥이 낳은 문인 중에서 고향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작가가 이청준이다. 송기숙 대하소설 『녹두장군』, 한승원 대하소설 『포구』, 이승우 단편소설 ‘샘섬’ 등 장흥 출신 작가가 장흥을 배경으로 쓴 작품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청준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대표작 ‘눈길’은 물론이고 ‘축제’ ‘선학동 나그네’ 등 20편이 넘는 작품이 고향 땅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 소설 여러 편을 영화로 제작했는데, 그 중에서 ‘축제’와 ‘천년학(원작 ‘선학동 나그네’)’이 장흥에서 촬영됐다. 지금도 세트장이 남아있다.

장흥은 여행하기에 좋은 고장이다. 편백나무 우거진 ‘편백숲 우드랜드’도 유명하고, 가을 날 천관산에 오르면 산중 억새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토요시장’이 열리는 탐진강 주차장에는 토요일마다 한우를 사러 온 대형 버스가 진을 친다. 장흥 특산물 한우·표고버섯·키조개를 함께 구워 먹는 ‘한우삼합’도 이제는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

장흥의 관광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여행도 있다. 이른바 문학탐방단이다. 문학탐방단이 장흥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가 소설가 한승원(75)이 머물고 있는 ‘해산토굴’이고 다른 하나가 이청준 생가가 자리한 회진면 진목마을이다. 한승원은 낯선 얼굴이라도 손님이 오면 차(茶)를 내오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 이청준 생가에 가면 맞아줄 사람도 없다. 2008년 이청준이 돌아간 뒤 당신을 찾는 발길이 늘었지만, 기껏해야 삐걱대는 대청마루에 앉아 당신을 추억하는 일이 전부였다. 고민 끝에 장흥군이 시작한 사업이 ‘정남진 문학탐방길’ 조성이다. 길 이름은 ‘정남진 문학탐방길’이지만, 알고 보면 이청준 소설 ‘눈길’의 주요 무대를 복원한 것이다.

장흥 그리고 이청준

장흥군은 이태 전 1억원을 들여 정남진 문학탐방길을 열었다. 그러나 긴 세월 인적이 끊겼던 고갯길을 다시 뚫은 것에 불과했다. 풀을 깎고 나무를 치고 땅을 넓혀 꼴을 갖췄지만, 길에는 변변한 이정표 하나 없었다. 장흥군은 길을 보완했고, 지난해 비로소 8.1㎞ 길이의 문학탐방길 조성사업을 마쳤다.

문학탐방길 1코스가 ‘눈길’이다. 이청준 생가 뒤편에서 옛 고갯길을 지나 대덕읍 연지삼거리까지 4.6㎞ 구간이다. 2코스의 이름은 ‘문학길’로, 연지삼거리에서 3.5㎞ 떨어진 천관산 문학공원까지 이어진 고샅이다. 한국관광공사의 ‘걷기여행길 포털’은 문학탐방길 1코스만 ‘9월 추천 길’로 선정했지만, week&은 2코스까지 걸었다. 다 걸어도 쉬엄쉬엄 3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장흥군은 장흥이 낳은 수많은 작품 중에서 왜 ‘눈길’만 주목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이청준이라는 작가가 갖는 의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청준은 가난했다. 그러나 공부는 잘했다. 중학교부터 광주로 유학을 갔다. 아니 중학교부터 고향을 떠나서 살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광주에서 나와 서울대 독문학과에 입학했다. 형편이 안 돼 거의 모든 유학시절을 독학으로 버텼다. 대학시절 잠잘 데가 없어 문리대 본관 건물에 숨어 들어가 새우잠을 잤던 일화도 전해온다.

이청준이 살아온 세월이 우리네 부모 세대가 살아온 세월이다. 유년시절 해방과 동란을 겪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세대다. 이청준은 대학 신입생 때 4·19를 치렀고, 이듬해 5·16을 지켜봤다. 문학적으로는 한글세대라 부른다. 서구 문학이론을 본격 학습하고 한글로 우리네 정서를 표현한 세대다.

이청준이 한글로 표현한 우리네 정서가 바로 고향이고, 어머니였다. 떠올리기만 하면 눈앞이 흐려지는,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 말이다. 다 같이 가난하던 시절, 그 가난을 떠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와 소년 이청준의 서러운 사연이 ‘눈길’의 주제를 이룬다.

‘눈길’은 1977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발표됐다. 200자 원고지 120장 분량이니 단편소설치고는 긴 편이다. ‘눈길’은 2009년 8차 교과개정 이후 고등학교 검인정 국어교과서 14종, 문학교과서 11종에 수록돼 있다. 현재 거의 모든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눈길’을 배운다. 이제 ‘눈길’을 읽을 차례다. 아니 걸을 차례다.

                                                                         눈길 책상바우 앞.

길을 읽다

고교 1학년 겨울, 광주에서 유학 중이던 이청준은 고향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향에 내려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이미 남의 집이 된 옛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온다. 그 밤의 기억이 소설 ‘눈길’의 줄거리다.

어머니는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집주인에게 사정해 하룻밤만 옛집에 아들을 재운다. 모자는 이튿날 새벽 시외버스 정거장이 있는 삼거리까지 걸어서 간다. 마침 눈이 내린 새벽이었다. 길에는 모자의 발자국만 찍힌다. 아들을 태운 버스가 떠나고 혼자 남은 어머니는 그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간다.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르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 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잘 살거라” ’- ‘눈길’ 에서

                                        이청준 생가. 예전 모습 그대로라지만 휑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눈길’은 소설이지만 소설만은 아니다. 작가가 “소설 안으로 내 자신이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 가장 강렬하게 드는 작품”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밤의 기억이, 아니 그 집의 기억이 그에게는 한이 맺혔던 모양이다. 장흥군이 그 집을 사서 생가로 복원한 2005년까지 그는 고향마을 어귀까지는 왔어도 끝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눈길이 복원된 건, 지금도 고향을 지키는 당신의 집안 조카 이황우(49)씨와 장흥 출신 소설가 김석중(65·별곡문학동인회장)씨의 역할이 컸다. 조카 이씨가 수풀 우거진 옛길의 추억을 되살리면 소설가 김씨가 그 길에 이야기를 얹혔다. 산지까끔(‘까끔’은 산을 뜻하는 방언)·아들바우·책상바우 등 옛날 진목리 사람들이 고개를 넘을 때 지명이 안내판에 새겨졌다.

소설에서는 시오리 산길로 묘사됐지만, 직접 걸은 눈길은 십 리가 조금 넘었다. 길 말미 연지삼거리 근방에서 걷기 좋은 길을 찾다 보니 옛길보다 줄었다고 장흥군청 관계자가 설명했다. 눈길은 옛날 진목마을과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대덕읍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마을 외곽을 따라 번듯한 신작로가 나면서 그 길은 잊혀졌다. 그러나 소설 한 편이, 죽었던 길을 되살렸다. 아니다. 길을 살린 건 인생이었다. 모질었지만 아름다운.


● 길 정보


장흥은 멀다. 서울시청에서 장흥군청까지 400㎞ 거리다. 장흥군청에서 이청준의 고향인 진목마을까지도 32㎞ 거리로 멀다. 23번 국도를 따라 40분 가까이 가야 한다. 진목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 뒤로 생가가 있고 생가를 지나 정남진 문학탐방길 1코스, 다시 말해 ‘눈길’이 시작한다. 고개 넘어 대덕읍에 다다르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택시를 타면 1만원 정도 나온다. 대덕개인택시 061-867-1525. 2코스 막바지에 천관문학관이 있다. 장흥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061-860-0457. 10월 17∼18일 광주 조선대와 장흥 진목마을에서 이청준 기념사업회(회장 김병익)가 이청준 문학제를 개최한다. 장흥군청 문화관광과 061-860-0228.


‘이달의 추천 길’ 8월의 주제는 ‘문학’이다. 작가의 생애가 배었거나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트레일 10개가 선정됐다. <표 참조> 이달의 추천 길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여 개 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참고문헌


● 이청준 전집 13 눈길 (문학과지성사)

●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학고재)

● 이청준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 소설가 이청준 선생 추모학술대회 자료집 (장흥군)

● 정남진 장흥 문학관광 기행 특구 (장흥군)

글·사진=손민호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785054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 백운산  (3) 2024.11.01
강천산  (0) 2024.10.31
충북 진천  (5) 2024.10.22
느긋하고 여유롭게 백담사 가는 길  (7) 2024.09.26
부탄  (6) 202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