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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재인폭포, 새로 생긴 허목체…연천의 재발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27. 12:56

사라지는 재인폭포, 새로 생긴 허목체…연천의 재발견
중앙선데이
입력 2024.08.24 00:11

업데이트 2024.08.24 08:36



김홍준 기자 






20대 청춘 몰리는 초가을 명소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편입된 재인폭포는 연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재인(材人)은 줄타기를 잘하던 남자를 가리킨다. 그의 아름다운 부인을 이 고을 수령이 탐하여 재인을 죽이자 부인은 수령의 코를 물고 폭포에서 자결했다. 그 뒤 재인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 관계자들은 “비 온 다음날 오면 더 볼만하다”고 귀띔했다. 김홍준 기자

“하이, 재인.” 미국에서 온 지미(28)가 재인폭포 물줄기를 보자 외쳤다. 미국판 아재개그이었을 듯한데, 자신의 친구일지도 모르는 제인(Jane)이 아니라 폭포 이름 ‘재인’이었다. 지미는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 궁금해서 왔다”며 “(재인)폭포가 사라진다는데 정말이냐”고 물어봤다. 설악산 흔들바위가 굴러떨어졌다는 UB(유언비어)통신 낭설인 것 같지만, 맞다. 언젠가 사라진다.

당일치기 여행 제격, 작년 913만명 방문

연천의 임진강 댑싸리공원은 코로나19 와중인 2021년 조성돼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곧 가을이면 핑크빛으로 물든다. 김홍준 기자

경기도 연천군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맹위를 떨칠 때 은근슬쩍 찾는 발길이 늘어난 곳이다. 코로나 시대 여행 흐름인 ▶가족 혹은 친구끼리 소규모로 ▶자가용 몰고 ▶당일치기 ‘삼박자’가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연천은 그 마침에 ‘유네스코 2관왕’이라는 자랑거리가 생겼다. 2019년 유네스코 임진강 생물권보전지역에, 이듬해 유네스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받았다. 사박자까지 어울리는 셈이다. 한국관광데이터랩에 따르면 2018년 방문객이 664만 명이었는데, 지난해 913만 명(동일 인원을 일별로 계산)이었다. 무려 38%나 늘었다. 연천의 재발견이다.



재인폭포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1166㎢ 중 일부. 현무암이 당당하게 그을린 주상절리를 뚫고 급전직하 18m 물줄기가 쏟아진다. 폭포수가 만든 깊고 푸른 용추(龍湫)는 ‘더운데 어서 들어와’라며 유혹하는 듯하다. 옆에 있던 김모(73·서울 송파구)씨의 “40년 전에는 여기 원래 안 이랬는데. 저 밑 폭포 아래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라는 말은 그 용추에 다다르지 못해 나온 아쉬움이었다. 이곳이 세계지질공원에 포함되면서 제약도 생긴 것. 하지만 덕분에 “하이, 재인”하는 외국인도 찾아온다.


미국인 지미가 물어본 ‘재인폭포 소멸설’은 신빙성이 있다. 원래 재인폭포는 380m 앞에 있었다. 침식으로 인해 뒤로, 뒤로 밀리다가 현재의 자리에 다다른 것. ‘재인폭포’라고 부르기도 전인 수십만 년 전 얘기다. “여전히 재인폭포는 서서히 깎이고 있는데, 언젠가 뒤편의 선녀탕과 합쳐져 사라질 것”이라는 게 연천군 관계자의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수십만 년이 걸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재인폭포의 동생 격으로 서쪽 주상절리에 ‘비와야폭포’가 있다. ‘비가 와야’ 생긴다는 폭포다.

무더위 속, 방문객들은 폭포 입구에서 나눠준 우산을 양산으로 여기며 걷는다. 관광객답지 않은, 구둣발 아저씨들도 꽤 있다. 이들은 “일하다가 점심 먹고 잠깐 왔다”고 했다.

연천 방문객 중 20대가 23.9%로 가장 많다. 50대가 20.2%로 그 뒤를 잇는다. 50, 60대가 압도적인 다른 관광지와 다르다. 부모 세대와 자식뻘 세대가 여기저기서 뒤섞이는 것.

연천 군남면 옥녀봉의 그리팅맨은 2016년 세워졌다. 최근 옥녀봉까지 올라가는 길이 새로 닦였다.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몰린다. 김홍준 기자

연천은 북쪽 끄트머리부터 찾는 게 정석이다. 열쇠전망대와 태풍전망대가 휴전선에 바짝 붙어있다. 생각해보니 태풍전망대 인근 부대를 찾은 적이 있다. 6·25전쟁 유해 발굴 취재를 한답시고 남방한계선을 지나 깊숙이 들어갔는데, 그 부대 바로 앞에 댑싸리공원이 있었다. 이 여름이 지나면 푸른 댑싸리가 핑크빛으로 변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포토존에서 뒤엉킨다. 그 광경을 남쪽 옥녀봉(205m)의 ‘그리팅맨’이 수년째 굽어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상대를 존중하며 자신을 잃지 않는 배꼽인사 각도 15도. 그리팅맨은 그렇게 북쪽을 향해 평화와 소통을 염원하는 10m 거인상이다. 조각가 유영호는 경기도 파주, 강원도 양구, 제주특별자치도와 미국·파나마·에콰도르·우루과이·브라질 등에도 이 그리팅맨을 만들었다.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2’에 나온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의 ‘미러맨’도 그의 작품이다.

여름의 여운 남아있는 9월에 많이 찾아

옛 연천역 급수탑에는 6·25 당시 총탄에 할퀴고 패인 상처가 남아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김홍준 기자

연천 투어는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 연천역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경원선을 따라 새 연천역이 들어섰다. 시티투어 버스의 기점이자 종점이다. 경원선이 다니던 옛 연천역 옆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주던 급수탑과 급수정이 있다. 총탄에 할퀴고 패인 6·25의 상흔이 그대로 있다. 전쟁 당시 38선 이북이었던 옛 연천역은 남침의 전진기지였다. 승강장이 기차 높이와 들어맞는데,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실어 나르기 위한 북한의 전략이었다고 전해진다.

옛 연천역은 현재 연천 관과안내소로 쓰이는데, 간판의 서체는 새로 만든 ‘연천 허목체’다. 좌측의 승강장은 기차 화물칸 높이와 맞췄는데, 북한이 6·25전쟁을 앞두고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실어나르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전해진다. 김홍준 기자

새 연천역을 나오자마자 옛 연천역을 바라보면 ‘연천역 관광안내소’라는 간판이 있다. 글자체가 특이하다. 그 밑에 작은 글씨를 놓치면 안 된다. ‘연천 허목체’라고 적혀있다. 연천 출신 예법의 대가. 동시에 독특한 전서체인 ‘고전팔분체’를 남긴 서예의 대가. 그래서 미수 허목(1595~1682)은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치열하게 벌였고, 서체는 너무나 기이해 금기시되기도 했지만 추종하는 이도 많았다. 지난달 연천군 전용 서체가 발표됐다. 연천군 관계자는 “허목의 한자 작품을 한글화한 것은 ‘연천 미수체’로, 한글 작품을 기반으로 한 것은 ‘연천 허목체’로 이름 지었다”고 했다.

허목이 『기언별집』에 남겼다. ‘마전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가 있고, 그 앞의 물가를 당포라고 한다. 큰물이 흘러 나룻길로 통한다.’ 당포성은 미산면 당이리에 있다. 고구려가 세웠지만, 한강 이북으로 진출한 신라가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허목의 이 글로 미루어, 당포성은 그의 눈앞에서는 이미 허물어진 상태였다. 300여 년이 흐른 1994년에 존재가 드러났고 발굴이 시작됐다. 지금은 동쪽 성벽 위 외로운 팽나무와 함께 인생 샷을 건지는 명소가 됐다.

당포성(堂浦城)은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절벽 위 삼각형 모양의 평면 대지에 위치한 고구려시대 성이다. 당포성 북쪽에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마전현이 자리하고 있어 북상하는 적을 방어했다. 반대로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남하하는 적을 막기에 최적이었다. 보수작업을 거친 동쪽 성벽 위에 팽나무가 외롭게 서있다. 김홍준 기자

호로고로는 연천군의 임진강·한탄강 북안에서만 발견되는 강안 평지성(江岸 平地城)으로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고구려 3대성으로 불리는데 입지조건과 평면 형태, 축성방법이 매우 유사하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 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와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 뒤로 넘어가는 해를 해바라기들이 배웅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구려식 축조방식이 뚜렷한 또 다른 임진강변의 성곽으로 호로고루가 있다. 이곳 앞에 지천으로 핀 해바라기가 막바지다. 20대 아들과 함께 온 50대 엄마는 “하루해가 막다른 곳에 떨어지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며 “막바지 해바라기와 함께 사진에 담아 군대 가는 아들과 공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득하게 기다리면 시간이 빚어준 사진이 나올 것이다.

고대산(832m)에 올랐다. 섭씨 33도. 그래도 서울보다는 2도나 낮다. 그늘 한 점 없이 휑한 정상에서 북한 김일성고지가 훤히 보인다. 하산 뒤 고대산 자연휴양림이나 한옥 카라반이 있는 미라클타운으로 향해도 된다. 내일은 전곡리유적지와 복합문화공간 수레올아트홀….

연천은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관광객이 전통의 성수기 5월보다 9월에 더 많이 찾게 됐다. 여름의 여운이 있는 때, 여전히 시원한 재인폭포와 핑크빛으로 변하려는 댑싸리가 있고 임진강변의 주상절리는 더 뚜렷해진다. 문화와 역사·자연에 안보가 뒤섞이고 전통과 ‘신생’ 관광지가 버무려진 묘한 곳이다.

여기는 연천. 연천역 시티투어 버스 출발합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2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