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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쉼이 있는 전남 장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6. 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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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서 내려다본 ‘편백의 바다’ … ‘쉼’이 가득한 풍경에 젖어들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5-30 09:11
  • 업데이트 2024-05-30 10:50

전남 장성 축령산의 편백숲에 최근 새로 만든 ‘치유의 숲 전망대’. 여기 오르면 하늘을 찌를 듯 자란 수직의 숲이, 마치 파도치는 바다처럼 느껴진다. 전망대 위쪽에는 이 산의 나무를 심고 가꾼 고 임종국 선생 부부의 수목장이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산과 쉼이 있는 전남 장성

전설 같은 조림의 역사 ‘축령산’
기암괴석·암릉도 없는 밋밋한 산
압도적 숲으로 100대 명산 꼽혀
청년 혼자 나무심고 물지게 날라
보상없이 일궈낸 숲이라 더 감동

최고의 코스는 ‘모암계곡’
빽빽한 나무들이 만든 그늘 아래
야자매트까지 깔아 놔 걷기 편해
걷다보면 선물같은‘치유전망대’
스카이워크 아래 초록물결 넘실

장성의 또다른 으뜸산 ‘백암산’
신록 올라오는 초여름이 ‘절정’
내장산 가을 풍경 뛰어넘을 만
산아래 백양사엔 매화향기 가득
절벽 매달린듯한 영천암도 눈길

장성=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편백 덕에 100대 명산이 되다

순전히 ‘나무’ 때문에 유명해진 산이 있다. 전남 장성의 축령산이다. 산 자체로만 본다면 축령산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도 없고, 물소리 시원한 계곡도 없으며, 근사한 암릉이나 기암괴석도 없다. 대신 축령산에는, 이 모든 ‘심심함’을 뒤집고도 남을 만한 압도적인 편백숲이 있다.

축령산 편백숲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2배가 넘는다. 삼나무나 낙엽송 같은, 키 큰 나무로 이뤄진 숲까지 보탠다면 규모는 더 늘어서 편백숲 면적의 2배, 그러니까 여의도의 4배쯤 된다. 숫자로 적으면 1148만㎡. 자그마치 347만2700여 평이다. 이곳에서 50∼70년 된 편백나무와 삼나무, 낙엽송 250여만 그루가 자란다. 숫자로만 봐도 놀라운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더 대단하다. 축령산이 이른바 ‘100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히는 건, 전적으로 편백나무 덕이다.

축령산 편백나무 숲에는 전설 같은 조림(造林)의 역사가 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은 이 거대한 숲이 ‘한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때는 1956년. 한 사내가 축령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고(故) 임종국. 전북 순창 출신인 그는 스물다섯 살 때 장성으로 이사 와서 누에를 길러 번 돈을 다 털어서 축령산을 사들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건너가면서 모든 산이 벌거숭이가 됐을 때였다. 그는 축령산에다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어 길렀다.

궁금했던 건 나무를 심은 ‘임종국’의 이름 뒤에 자연스럽게 ‘선생’이란 호칭이 붙는 이유였다. 농업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어떻게 ‘모두의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의 ‘나무 심기’는, 농부가 벼를 심고 밭을 경작하거나 과수원에 과실수를 심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게 의미 있는 노동이라 해도 우리는, 농부를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에게는 ‘선생’이란 예우와 존중이 따라붙는 것일까.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서? 나무를 길러 후대의 미래 자산으로 물려줘서?

# 실패가 만든 감동과 존경

세상의 존경과 예우는, 그가 반생을 걸고 매달렸던 노동이 결국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황무지나 다름없는 산에다 나무를 심어 기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뭄과 물난리가 교대로 찾아왔다. 1968년 기록적인 가뭄으로 나무뿌리가 타들어 가자 그는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다. 다리를 절며 물지게를 지고 고행처럼 산을 오르던 그의 모습을, 훗날 그의 아들은 눈물겹게 기억했다. 그래 봐야 광활한 조림지의 나무에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는 필사적이었고,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그는 1976년까지 21년 동안 나무를 심고 가꿔 한 사람이 이뤘다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숲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건 빚더미였다. 그가 혼신을 다해 심고 가꾼 나무와 땅을, 빚에 몰려 헐값에 넘겨야 했다. 그러다 198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7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처참한 실패와 쓸쓸한 노후였다.

만일 그가 나무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성공을 거뒀다면, 과연 그의 이름 뒤에 ‘선생’이란 칭호가 붙었을까. 노고에 합당한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다면 부러움의 대상은 됐겠지만, 사람들은 그 앞에서 옷깃을 여몄을까. 역설 같지만 그의 삶이 감동으로 기억되는 건, 초인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실패로 인해 그가 심은 나무는, 비로소 돈과 바꾸는 재화로서가 아니라 고단한 노동 혹은 뜨거운 열정의 징표로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경과 기억으로 남게 됐다면 나무 심기로 일관했던 그의 삶은,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던 건 아닐까. 그가 미래의 꿈으로 심은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났고, 다들 그 숲에서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늘을 찌를 듯 자란 편백나무 가득한 숲을 걸으며 그의 나무 심기를 생각한다. 실패해서 감동이 된, 그리하여 끝내 성공한 그의 삶을 생각한다.

# 딱 하나의 길을 추천하는 이유

축령산 편백숲 안내지도 앞에 서면 난감해진다. 그리 크지 않은 산에 들머리가 4곳이고 ‘치유 숲길’로 이름 붙여진 걷기 길만 자그마치 7개다. 길 이름도 비슷비슷하다. 숲내음 숲길, 물소리 숲길, 산소 숲길, 건강 숲길, 하늘 숲길…. 가뜩이나 등산로와 임도가 거미줄 같은데, 그 위에다 치유 숲길 7개의 코스를 그리고 다시 4개 구간의 ‘장성둘레길’까지 덧그려 놓은 지도는, 도무지 읽기가 쉽지 않다. 거기 사는 주민도 헷갈릴 판이니, 초행길의 여행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뭐, 이해할 수 있다. 거대하고 울창한 수직의 숲속에 얼마나 근사한 길이 많겠는가. 물소리가 잘 들리는 길도, 하늘이 잘 보이는 길도 있을 것이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수평의 편안한 길도 있을 것이다. 그걸 다 알리고 싶은 마음이야 왜 모를까. 하지만 초행의 여행자에게 너무 많은 추천과 정돈되지 않은 난삽한 지도는, 길을 잃게 만들 뿐이다. 축령산에서 만났던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도무지 헷갈려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지도’ 얘기를 했다.

그래서 축령산 편백숲으로 가는 ‘딱 하나의 길’만 추천하기로 한다. 이즈음 축령산에 간다면 여기보다 나은 코스는 없다. 바로 ‘모암계곡 코스’다. 빽빽한 키 큰 나무들로 그늘이 서늘해 요즘 같은 초여름에 딱 맞는 코스다. 이 길 위에는 또 임종국 선생과 부인 김영금 여사의 수목장(樹木葬)과 추모목(追慕木)이 있다. 길 대부분이 오래전 야자 매트를 깔아둔 길이어서 발이 편하다는 것도 이 코스를 추천하는 이유다.

이 코스를 추천하는 더 결정적 이유가 있다. 수목장 부근에 새로 지은 스카이워크 ‘치유의 숲 전망대’다. 수목장 앞쪽의 급경사에 스카이워크를 허공으로 내밀어 지었는데, 여기 올라서면 발아래로 온통 편백과 삼나무숲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펼쳐진다. 편백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보는 수직의 세상도 그렇지만, 이렇게 공중에서 굽어보는 ‘편백숲의 바다’ 경관도 압도적이다.

# 편백숲을 내려다보는 자리

모암계곡 코스의 출발지점은 ‘모암저수지 주차장’. 관광객을 위해 저수지 아래에다 조성한 넓은 주차장이다. 방문객이 적은 평일이라면 저수지 위쪽 ‘금빛 휴양타운’ 입구까지 차로 가는 게 한결 편하다. 하지만 주차장이 협소하니, 주말이나 휴일에는 모암저수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나무 덱을 걸어 숲길의 들머리까지 가야 한다. 주차장에서 들머리까지는 멀지만, 그래도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나무 덱 길이 제법 운치 있어서다.

본격적인 편백 숲길 걷기는 금빛휴양타운 입구에서 시작한다. 산으로 파고드는 들머리부터 청량한 숲 터널이다. 축령산에 간다면 부디 흐린 날이기를. 날이 흐려 저기압일 때 편백 향은 한결 더 짙어진다. 그런 날 편백숲에는 피톤치드 향이 왈칵 엎질러진 듯하다.

작은 개울을 끼고 이어지는 편백 숲길을 타박타박 200m쯤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 길은 ‘물소리 숲길’이고, 오른쪽은 ‘깔딱고개’로 가는 길이다. 둘 중 어떤 길을 택하든 상관없다. 왼쪽 길로 가면 시계방향으로 걸어 오른쪽 길로 돌아오고, 반대로 오른쪽으로 가면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 왼쪽 길로 돌아온다. 둥글게 한 바퀴를 걸어 돌아서 내려온다는 얘기다.

굳이 추천하라면 오른쪽 깔딱고개 길을 택해 시계반대방향으로 숲을 돌아 왼쪽 물소리 숲길로 내려오는 쪽에 한 표다. 체력적 부담이 있는 오르막 구간을 힘이 있을 때 먼저 오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2시간쯤 걸린다. 내친김에 축령산 정상까지 밟고서 내려온다 해도 3시간 남짓이면 충분하지만, 정상에 오를 체력과 시간이 있다면 편백 숲길을 더 걷는 게 낫다. 정상에서의 조망이 이렇다 할 게 없고, 그나마 조망이 가능한 2층 정자도 안전문제로 출입통제 중이라 힘들여 오른 보람이 없으니 말이다.

잘 만든 길의 끝에는, 보상이 있게 마련이다. 보상이 중요한 건 ‘거기까지 걸을 힘’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보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다 올랐다는 성취감일 수도 있고, 근사한 숲일 수도 있으며, 탁 트인 조망일 수도 있고, 차고 맑은 물일 수도 있다. 모암계곡 코스 숲길의 보상은 단언컨대 치유의 숲 전망대다. 전망대가 보상으로 내미는 건 빼어난 조망. 걷기의 보상으로 더할 나위 없다. 거기까지 걷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전망대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연못가의 누각 쌍계루와 그 뒤의 백학봉이 어우러진 모습은 백양사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 백암산의 신록과 녹음을 보는 자리

나무를 빼고 순전히 산세로만 본다면 ‘장성의 산’은, 단연 백암산이다. ‘백암’이란 산 이름이 낯설어도 ‘내장산 국립공원’은 모를 리 없다. 내장산국립공원이라면, 내장산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국립공원 지분 절반쯤은 백암산의 몫이다.

백암산은 내장산과 마찬가지로 단풍으로 이름났다.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온산이 통째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을 단풍의 화려함을 겨룬다면 백암산과 내장산은, 그야말로 ‘난형난제’. 하지만 ‘봄부터 여름까지’라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시기의 백암산은, 내장산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천진암의 500년 된 탱자나무가 피운 꽃(위 사진). 백양사 고불매 가지에 달린 매실.



백암산 아래에는 절집 백양사가 있고, 백양사에는 이른 봄이면 우화루 옆에서 연분홍 꽃을 피우는 늙은 매화나무 ‘고불매(古佛梅)’가 있다. 꽃도 깨끗하지만, 절집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향기로 이름난 매화다. 고불매가 지고 나면 뒤를 이어 백양사의 산내 암자 천진암의 늙은 탱자나무가 꽃을 피운다. 탱자꽃은 순백의 바람개비처럼 생겼다. 고불매의 나이는 360살. 탱자나무는 이보다 더 나이 들어서 500살을 넘겼다. 그만한 세월 동안 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지금 고불매에는 솜털 보송보송한 청매실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매달렸고, 탱자나무 꽃 진 자리에는 작은 구슬만 한 탱자가 열렸다.

백양사의 봄을 장식하는 건 연두색 신록. 백양사를 포위하듯 둘러싼 숲에서는 단풍나무와 갈참나무, 느릅나무 이파리의 초록이 하루하루 더 짙어가고 있다. 이런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가 흰 이마를 드러낸 백학봉 8분 능선쯤에 있는 암자 약사암이다. 백양사에서 약사암까지 거리는 1㎞ 남짓. 비자나무 울창한 부드러운 흙길을 600m쯤 걸은 뒤, 가파른 경사를 ‘갈 지(之)’ 자로 뉘어서 낸 오르막길 400m를 더 걸어 올라야 한다.

숨이 차서 자주 멈춰 서야 하는 이 길을, 기도처럼 오르는 이들이 있다.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해준다는 약사여래 부처에게 의탁할 간절한 소원을 지고 있는 이들이다. 약사암에서의 간절한 기도를 지켜보다 든 생각. 그들을 현실적으로 위로하는 건 약사전 부처가 들고 있는 왼손의 약병보다는,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한 오른손이 아닐까.

백암산의 절집 백양사의 산내 암자 ‘약사암’ 뒤편 벼랑의 영천굴. 바위 굴에 건물을 반쯤 밀어 넣어 법당을 지었다. 왼쪽 바위 뒤편이 약사암이다.



약사전을 끼고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100m쯤 더 들어가면 높은 바위 벼랑에 영천굴이 있다. 영천굴은 벼랑 안쪽의 스무 평 남짓한 천연 석굴. 석굴에서 영천수(靈泉水)라는 약수가 솟는다. 조선 후기 호남지역에 유행병이 돌았을 때, 이 약수를 마신 이들이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전라감사가 보은을 위해 암자를 짓고 ‘영천암(靈泉庵)’이라 했다는데, 그러다 불이 나서 다 타버린 걸 10년 전쯤 복원했다. 석굴 안으로 지붕을 반쯤 밀어 넣은 형태로 지은 2층 법당이 독특하다.

# 인물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

장성 땅에는 유독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 많다. 이야기가 깃든 곳들을 지도 위에 점으로 찍어 봤는데, 그걸 하나하나 연결해보니 대여섯 번의 여행으로도 다 못 볼 만큼 긴 여정이 만들어졌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건 인물이다. 이야기가 많다는 건 인물이 많다는 뜻. 선비와 청백리에서 의병장과 충신, 효자와 열녀, 선각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장성에 있다.

장성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장이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다. ‘학문은 장성을 따라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장성군청 앞에도, 장성공공도서관에도 이 문장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 새긴 문장의 출처는 흥선대원군이다. 그가 전라도 53개 고을을 다 돌아보고 내린 장성에 대한 평가가 바로 ‘학문은 장성이 최고’라는 것이었다. 이런 평가의 바탕에는 하서 김인후, 그리고 노사 기정진이 있다.

김인후의 자취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필암서원에 있고, 기정진의 흔적은 불태산 아래 그가 학문을 강론하던 자리에 세워진 고산서원에 있다. 당대의 인물에 대한 감회도 있지만, 격식을 갖춰 지은 서원의 건축적 미감만으로도 이 두 곳은 다녀올 이유가 충분하다.

호남의 대표 서원으로 꼽히는 필암서원은 마지막으로 다시 지어진 1672년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건축적 미감과 함께 곳곳에 눈길을 붙잡는 것들이 적잖고,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루이자 정문 격인 ‘확연루’에 내걸린 힘찬 필치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솜씨다. 송시열은 김인후가 죽고 나서 묘소 아래 세운 비석(신도비)에 새기는 문장을,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다듬고 또 다듬어 지었다고 전한다.

서원 안쪽의 한 칸짜리 건물인 경장각의 현판 글씨는 정조 임금의 필체다. 경장각은 인종이 직접 그려 김인후에게 하사한 대나무 그림 판각을 모셔 두기 위해 화려하게 지은 전각. 여기에 훗날 정조가 친필로 경장각의 현판을 써서 내려보냈다. 인종의 대나무 그림은 광주박물관으로 옮겨갔는데, 그림 속의 마르고 곧은 대나무에서 당쟁의 소용돌이를 뒤로하고 낙향해 은거했던 김인후의 곧은 행적이 느껴지는 듯하다.

장성의 인물 중에는 25살에 과거에 합격해 한성부판윤부터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까지 지냈던 박수량이 있다. 내로라하는 벼슬만 39년을 지냈는데도 그는 죽은 뒤 장례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죽은 뒤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석의 문장으로 제 삶을 자랑하는 게 공직을 거친 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으리라. 장례비를 마련해준 명종 임금은 비석을 내리되 그의 뜻을 존중해 무덤 앞에다 글씨를 새기지 않은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그게 바로 비워 둠으로써, 청렴한 그의 삶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된 ‘백비(白碑)’다.



■ 모텔, 미술관이 되다

전남 장성군 장성읍 야은리의 황룡강변에 미술관 겸 카페 ‘오피먼트’가 있다. 4층짜리 건물 하나를 통째로 다 쓰는데, 층마다 옷과 소품을 파는 편집숍, 조용하고 아늑한 미술관, 창밖 강변 풍경을 액자처럼 걸어둔 카페를 들였다. 오피먼트는 오래된 모텔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 낡은 건물을 감각적으로 손보면서 모텔 시절의 객실 하나와 욕실 하나를 ‘역사’로 남겨뒀다.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 시골 소읍 변두리의 미술관 카페에, 뜻밖에 손님이 적잖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