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카테고리 없음

조경가 정영선, 땅에 시 쓰면서 미나리아재비 심는 이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5. 18. 17:03

조경가 정영선, 땅에 시 쓰면서 미나리아재비 심는 이유

[김민철의 꽃이야기]

<211회>

입력 2024.05.14. 00:00업데이트 2024.05.14. 10:18
 

선유도공원, 경춘선 숲길, 디올 성수,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 광화문광장, 서울식물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

훨씬 더 많이 열거할 수도 있다. 이 장소들의 공통점이 떠오르는가. 조경가 정영선이 설계한 정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공통점이 있다면 정원을 거닐면 편안하고 우리 꽃과 나무를 많이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대부분 필자도 가본 곳들이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생각도 못한 채 “우리 조경도 참 좋아졌다”, “우리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분이 설계했구나”라는 느낌을 받은 곳들이다. 특히 선유도공원, 서울식물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등은 꽃공부하러, 아이들과 놀러 셀 수 없이 다닌 곳이다. 그런데 모두 같은 분이 설계한 곳이라니!

정영선 조경설계 서안 대표(83)는 우리나라 조경계 대모(代母)이자 1세대 조경가다. 요즘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가 상영 중이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그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진행 중이다.

정영선 조경가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4.4.4 /연합뉴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지난 3월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찾아온 봄’이라는 글에서 ‘누가 설계했는지 참꽃나무, 참빗살나무, 송악, 채진목, 노각나무,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등 우리 자생종들을 적절한 위치에 적절하게 심어놓았다’고 썼다. 글이 나간 다음 박물관에서 설계자가 ‘정영선’이라고 알려주었다.

그가 설계한 정원은 특징이 있다. 편안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미를 준다는 점이다. 정 대표는 방송에서 이를 ‘덤덤하다’고 표현했다. 그의 정원 설계 기본 정신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것을 알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말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를,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의 미를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정 대표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한국 문화의 뼛속에 살아있는 말”이라며 “조경을 설계할 때 그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가 우리 꽃과 나무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독일 가든쇼에 갔는데, 비비추·노루오줌 같은 흔해빠진 우리 꽃들이 ‘원산지 코리아’ 푯말을 달고 전시돼 있는 거여요.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지만 얼마나 좋았는지 막 울었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꽃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중요한지 모르고 홀대했구나, 우리 것부터 제대로 알아야겠구나 깨닫고 식물 공부를 새로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나리아재비가 시그니처 식물

정영선 대표는 정원을 조성할 때 꼭 심는 식물이 있다. 그는 “약간 축축한 곳이 있으면 기를 쓰고 미나리아재비를 심는다”고 했다. 미나리아재비가 그의 시그니처 식물인 셈이다. 미나리아재비는 정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도 하다. 미나리아재비는 요즘엔 흔한 꽃이 아니고 더구나 화단에 심는 식물도 아니다. 이 꽃을 좋아한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조경가 정영선이 미나리아재비를 심은 정원. /조경설계 서안

“어릴 적 할아버지 산소를 오가며, 개울 건너며 본 추억의 꽃이지요. 그땐 굉장히 많았죠. 대학시절에도 학교(서울대 농대) 숲 습지에 미나리아재비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어요. 그때 꽃들에게 약속을 했어요. 내가 지금부터 계속 정원을 만들건데 그때마다 너희들을 잊지 않고 심어 번지게 할게. 소설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이 교회 가는 길에 모자를 장식했던 길가 꽃도 미나리아재비거든요. 꽃색이 버터 색 닮았다고 영어로는 ‘버터컵(buttercup)’이죠.”

정 대표는 “전엔 미나리아재비가 개울가, 논둑에 흔했는데 지금은 전부 농약 뿌리고 논둑도 치고 잡초라고 다 뽑아내서 거의 다 없어졌다”며 “그 없어지는 꽃이 너무 아까워서 기를 쓰고 심을만한 곳이면 심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나리아재비를 따로 구할 곳도 없어서 자신의 집 정원에 기르면서 필요할 때 갖다 썼다고 했다.

앞으로 정원에 미나리아재비가 보이면 정영선 대표의 시그니처가 아닌지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다. 정 대표가 좋아하는 것을 떠나 미나리아재비 꽃은 참 예쁘다. 밝은 노란색 꽃잎이 에나멜을 발라놓은 듯 반짝이는 모습이 정말 독특해서 금방 구분할 수 있다. 꽃잎이 반짝이면 곤충이 멀리서도 쉽게 찾아 꽃가루받이에 유리할 것이다. 뿌리잎은 잎자루가 길고 3~5갈래로 깊게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나리아재비. 밝은 노란색 꽃잎이 반짝이는 꽃이다.

정 대표는 1998년 호암미술관 희원을 설계했다. 그 넓은 정원을 우리 꽃과 나무로 다 채웠다고 했다. 그후 조경 설계 주문이 밀려들었다. 정 대표는 “한결같이 우리 꽃, 우리 나무부터 넣고 필요하면 외국 것도 넣겠다는데 동의해 주었다”며 “저를 키운 것은 클라이언트(고객)들”이라고 했다.

정 대표는 요즘도 공부한다고 했다. “80 나이에 내 고집만 부리면 안되고 젊은이들 취향도 알아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디올 성수 같은 곳이 MZ세대들이 열광하는 명소로 떠올랐을 것이다.

 
미나리아재비꽃. 지난 11일 제주도의 한 오름에서 담은 것이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