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사이즈’ 중국 장강 한가운데로… 크루즈 타고 ‘세 개의 협곡’ 훑는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5-02 09:04
- 업데이트 2024-05-03 08:40
장강변에 사는 소수민족 토가족(土家族)의 생활 모습을 실경으로 재현해놓은 관광지 ‘삼협인가(三峽人家)’ 입구. 영화 세트장 같은 공간에다 적재적소에 포인트를 주고, 안개까지 뿜어내는 ‘과도한’ 연출이 더해져 영화 속 장면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다시 열린 장강삼협 (1) 자연과 인문을 항해하다
이백·두보·소동파 시 걸리고
‘충성 아이콘’ 굴원 몸던진 곳
물길만큼 유장한 역사 깃들어
팬데믹후 여행상품 재개 4년만
승객 적고 멀미없는 리버크루즈
시설·서비스 최고급 호텔 같아
충칭~이창 4박 또는 5박 운항
192㎞ 삼협 구간 하이라이트
험준한 산군 사이 기묘한 절경
기항지 따라 상·하수 코스 분리
상수코스, 출항전 서릉협에 하선
중국 소수민족마을 관광코스도
이창(중국)=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중국 장강(長江)의 장엄한 협곡을 항해하는 ‘장강삼협(長江三峽)’ 크루즈 여행 상품이 4년여 만에 ‘다시’ 시장에 나왔습니다. ‘회복이 어려울 것’이란 부정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크루즈 여행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끝나자마자 빠른 속도로 정상화했습니다. 장강삼협 리버 크루즈 여행 상품이 지금에야 나오게 된 건, 순전히 ‘자리 부족’ 문제 때문이었다는군요. 작년에 운항을 재개하자마자 내국인 손님들이 몰려들면서 1년 내내 중국인들로만 장강삼협 크루즈가 꽉꽉 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장강삼협 크루즈를 탈 수 있게 된 건, 이제야 외국인 여행자들이 탈 자리를 내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강의 협곡을 항해하는 센츄리글로리호 갑판 위에서 감개무량했던 건, 국경을 넘나들면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던 팬데믹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해서였습니다. 다시 시작된 장강삼협 크루즈 여행의 여정을 2주에 걸쳐 소개합니다.
# 리버크루즈 여행이 매력적인 이유
먼저, 양해를 구하는 이야기부터. 한자로 ‘장강삼협(長江三峽)’은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대로 쓰고 읽으면 ‘창장싼시’다.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다. ‘장강(長江)’과 ‘삼협(三峽)’이 주는 비장한 분위기와 무게감이 싹 다 휘발해버린 기분이다. 장강삼협을 이루는 3개 협곡 지명도 마찬가지다. ‘구당협(瞿塘峽)’은 ‘취탕샤’로, ‘무협(巫峽)’은 ‘우샤’로, ‘서릉협(西陵峽)’은 ‘시링샤’로 써야 한다. 같은 식대로 읽으면, 삼국지의 유비는 ‘유베이’가 되고, 제갈량은 ‘주거량’이 된다.
신해혁명(1911년) 이전의 인물은 한글식 독음으로 쓰고 읽어도 무방하지만, 문제는 지명이다. 장강삼협을 여행한다는 건, 곧 지명 위의 역사를 따라가는 일. 낯선 외래어표기법대로 지명을 쓰면 거기 담긴 뜻은 사라져버리고 생소한 발음에 장소 구분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좀 탄력적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한자 지명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경우는 한국식 독음으로 썼다. 장강의 물길과 함께 흘러가는 역사와 문학과 경관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면 이 수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모든 지명을 다 그렇게 쓴 건 아니다. 나름의 원칙은 ‘알기 쉽게’다. 대신 한국식 독음 뒤에, 가능하면 중국식 독음도 괄호 안에 묶어 함께 쓰기로 한다.
이제 크루즈 얘기를 시작해보자. 전 지구적인 팬데믹의 시기에 비관론자들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 전망했던 여행상품이 있다. 배 안에서 먹고 자는 크루즈 여행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할 당시 모두가 목격했던 고립된 배 안에서의 감염 확산은, 현실로 재현된 끔찍한 호러 영화 속 장면이었다. 그 무렵 크루즈에 붙여진 오명이 ‘떠다니는 배양접시’였다. 크루즈 여행은 코로나19를 건너오면서 그야말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결론적으로 비관론자들의 예측은 틀렸다. 팬데믹 직후부터 크루즈 여행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몰락했던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거의 모든 크루즈 여행이 복원됐는데, 중국 장강의 협곡을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는 ‘장강삼협 크루즈’도 그중 하나다.
장강삼협 크루즈는 바다가 아닌 강을 운항하는 이른바 ‘리버(river) 크루즈’다. 해양크루즈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짐을 싸거나 풀 필요 없이 배 안의 객실에서 먹고 잔다는 것, 그리고 배로 이동하면서 기항하는 곳에서 내려 육상 투어를 한다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해양크루즈와 구별되는 리버크루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다가 아니라 파도가 없고, 파도가 없으니 멀미도 없다는 것이다. 리버크루즈 선박은 해양크루즈에 비해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좁은 강폭과 낮은 수심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 장강삼협을 운항하는 크루즈 선박은 대부분 1만3000t 안팎. 해양크루즈 대형 선박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배가 작으니 태우는 승객 숫자도 적은데, 대신 시설이나 서비스가 훨씬 더 ‘럭셔리’하다. 최고급 호텔이 작은 호텔인 것과 비슷한 경우다.
배가 ‘너무 크지 않다’는 건 훌륭한 장점이다. 소수의 승객을 상대로 세심한 서비스도 가능하고, 기항지에서 타고 내리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리버크루즈가 객실에 큰 창과 테라스를 갖출 수 있는 것도, 배가 작아 모든 객실을 외측으로 배치할 수 있어서다. 초대형 유람선은 구조상 객실의 절반 가까이가 ‘창문 없는 방’일 수밖에 없다.
장황하게 설명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리버크루즈 여행은 장점이 많은 매력적인 여행’이란 것이다.
장강삼협 크루즈가 지나는 장강의 협곡 구간. 강 양옆으로 험준한 산과 가파른 벼랑의 협곡이 이어진다. 크루즈 운항 구간은 장강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들이다.
# 장강의 하이라이트는 192㎞ 구간
이제 본격적으로 장강삼협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장강(長江·창장)’을, 양자강(陽子江·양쯔장)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다. 틀린 사실이다. 지구 상에서 세 번째로 긴 중국의 강은, 양자강이 아니라 장강이 맞다. 양자강은 장강의 하류, 그러니까 ‘강소(江蘇·장쑤)성에서 상해(上海·상하이)에 이르는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장강의 짧은 하류 구간만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다.
명나라 때 중국에 온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그걸 잘못 알고서 장강을 ‘양쯔강’이라 기록하면서, 서방세계에 장강이 양쯔(Yangz)강으로 알려진 것뿐이다. 마테오리치는 심지어 양쯔강의 한자를 ‘볕 양(陽)’이 아니라 ‘큰 바다 양(洋)’ 자로 오해해 ‘洋子(양자)’로 알고, 제멋대로 ‘바다의 아들’로 오독 하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다시 정리하자면, 마테오리치의 오류로 서양사람들은 양쯔강이라고 하지만, 중국사람은 장강을 양쯔장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장강은, 그저 ‘장강’일 따름이다.
장강은 전체 길이가 6300여㎞에 달한다. 칭하이와 티베트에서 발원해 쓰촨, 윈난, 충칭, 후베이, 후난, 장시, 안후이를 거쳐 상하이로 흘러간다. 한강 길이와 비교해보려다가 ‘의미 없는 일’이어서 그만둔다. 장강은 강 유역 면적만 180만㎢로 중국 전체 국토 면적의 18.8%다. 강에 담긴 물의 양은 9958억㎦. 중국 수자원 총량의 35%다.
장강의 길이는 숫자로는 실감이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해보면 어떨까.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거리가 5388㎞쯤. 여기다가 1000㎞쯤을 더 보태야 장강의 길이가 된다. 장강삼협 크루즈가 이 중 삼협댐 상류인 644㎞ 구간을 4박 5일 동안 운항한다. 충칭(重慶·중경)에서 이창(宜昌·의창)까지의 거리다. 크루즈가 이 구간을 다니는 건, 협곡을 이루는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어서다.
장강삼협 크루즈 전체 운항 구간 중 강물이 험준한 산군(山群)을 파고들면서 좁아진 강폭 양쪽으로 기기묘묘한 절경을 빚어내는 하이라이트는 세 개의 협곡, 그러니까 삼협의 경관이 펼쳐지는 192㎞ 남짓이다. 협곡을 지나는 내내 자연은 거대하고 장엄하다. 여기를 빼면 사실 장강의 다른 구간에는 이렇다 할 경관이 없다.
장강에는 경관과 함께 유장한 이야기도 있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시작하는 방대한 중국 역사가 있고, 협곡마다 이백과 두보, 소동파 등 수많은 시인의 시가 걸려 있으며, 후한 말의 ‘삼국지’ 속 영웅이 천하를 도모했던 자취가 곳곳에 스며 있다.
장강삼협 여행이 흥미진진한 건 자연경관과 함께, 유장한 역사와 인문을 읽을 수 있어서다. 순전히 여행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삼국지’를 꺼내보는 정도의 수고쯤을 권하는 이유다. 이백이나 두보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장강여행은 한층 더 풍성해지고 즐거워지니까.
# 장강삼협의 최강자, 센츄리크루즈
장강을 다니는 장강삼협 크루즈는 모두 42척이다. 크루즈의 규모나 시설, 서비스는 천차만별. 스파와 공연장까지 갖추고 하루 세끼 술과 화려한 뷔페 식사를 제공하는 럭셔리 호텔급의 리버크루즈가 있는가 하면, 크루즈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인 낡은 페리급의 서민형 소형 크루즈도 있다.
장강삼협을 운항하는 이른바 5성급 럭셔리 리조트급 크루즈를 보유한 회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그중 압도적인 게 30년 역사의 ‘센츄리크루즈’다. 한창때는 유럽 명소를 운항하는 해양크루즈 선박을 비롯해 16척의 크루즈 선박을 보유했었다는데, 팬데믹 때 경영난으로 배를 팔아 지금은 장강을 운항하는 5척의 배만 남았다. 센츄리크루즈가 팔지 않고 남겨놓은 배는, 그야말로 알짜배기다. 장강삼협 크루즈에 투입하고 있는 배는 1만3000t 남짓의 하이브리드식 전기추진 유람선. 엔진 소음이 거의 없고, 기름 냄새가 안 난다는 두 가지만으로도, 전기추진 유람선의 장점은 확실하게 드러난다. 센츄리크루즈는 최근 롯데관광개발과 계약을 맺고 장강삼협 크루즈 상품을 독점 공급하고 있다.
장강삼협 크루즈는 개별여행으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출발지점과 종착지점에서의 육상교통 연계 스케줄을 짜기 쉽지 않아 패키지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장강삼협 크루즈 여행상품을 선택한다면 가장 유심히 봐야 할 것은 ‘배’다. 기항지에서의 육상 관광의 품질은 다 거기서 거기. 여행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건 여행 내내 머물게 되는 배의 컨디션이다. 또 하나의 체크 포인트는 음식. 모든 식사를 배 안에서 하게 되는 만큼 제공되는 식사도 꼭 체크해야 한다.
장강삼협 크루즈 코스는 크게 ‘하수(下水)’와 ‘상수(上水)’로 나뉜다. 하수는 충칭에서 출발해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것이고, 상수는 이창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상수 코스가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 같지만, 항해시간은 올라가는 것이나 내려가는 것이나 같다. 삼협댐 건설 후 댐 상류가 사실상 거대한 저수지가 되다시피 한 데다, 배가 평균 시속 20㎞ 남짓으로 느리게 운항하기 때문이다.
상수와 하수는, 기항지 순서가 달라지는 것 말고는 차이가 없다. 다만 항공편과 육상교통 등의 문제로 하수는 4박 일정이 되고, 상수는 5박 일정으로 꾸려진다. 상수와 하수 코스가 정착하는 기항지나 방문 관광지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꼭 보고 싶은 게 있다면 모를까, 어차피 ‘이걸 못 봤으면 대신 저걸 보는 식’이어서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상수냐 하수냐는 순전히 여행일정이나 항공일정 등에 따라 좌우된다는 얘기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수(上水)’ 코스의 출발지인 모평선착장에 정박한 센츄리글로리 호.
# 스토리의 ‘사이즈’가 다르다
상수의 출발, 혹은 하수의 종착 지점은 삼협댐 바로 위에 있는 이창(宜昌·의창)의 자귀현(姉歸縣) 모평(茅坪·마오핑) 선착장이다. 이창 기차역에서 차량으로 40분쯤. 리버크루즈 선박이 정박한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가 가로등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굴원고리(屈原故里). ‘굴원이 태어난 고향’이란 얘기다. 굴원. 그는 누구일까.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왕의 두터운 신망으로, 지금으로 치면 비서실장 격의 벼슬을 맡았으나 왕이 죽은 뒤 모함을 받고 파직돼 억울하게 쫓겨났다. 억울함과 울분으로 가득 찬 굴원은 방황했다. 강가에서 서성이던 굴원이 어부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게 누군가의 목격담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바로 ‘굴원의 어부사(漁父詞)’다.
어부사의 결정적인 대목. 어부가 ‘어떤 연고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굴원이 답한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혼자 맑고 깨끗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취해 있는데 나 혼자 깨어 있었다.” 굴원의 토로에 어부는 노를 두드리며 말한다. 바로 저 유명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고사다. 맑은 세상이면 옷을 갖춰 입고 세상에 나가되, 무도한 세상이라면 숨어 살며 발이나 씻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굴원은, 그러나 창랑의 물이 흐렸는데도 발을 씻지 않았다. 초나라가 진나라에 함락되자 북받치는 마음으로 자살을 택했다. 장강의 지류인 멱라강에 돌을 안고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굴원은 ‘충성의 아이콘’이 됐다. 사마천은 굴원 얘기를 ‘사기’에 실었고, 도연명은 시를 써서 굴원을 높이 기렸다. 지금까지도 이창의 자귀현이 ‘굴원의 고향 땅’이라며 자랑스러워하는 걸 보면 굴원은,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었다.
중국의 단오절은 굴원이 강에 몸을 던진 날을 기려 지낸 제사에서 비롯한다. 단오절에 먹는 찹쌀과 대추, 팥 등을 대나무 잎에 싸서 쪄 먹는 쫑즈(종子)란 음식도, 물고기가 굴원의 시신을 먹지 않게 강에 던져 넣었던 것이 발전한 음식이란다. 굴원 스토리는 조선까지 수출됐다.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충신’ 편에는 멱라수에 몸을 던져 머리만 출렁이는 물 밖으로 내밀고 있는 굴원이 그려져 있다.
굴원이 죽은 건 ‘기원전 278년’이다. 자그마치 예수 탄생 수백 년 전의 얘기. 본격적인 장강삼협 항해 전부터 기가 죽게 되는 건, 이런 ‘압도적인 사이즈’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의 길이와 그 강을 끼고 펼쳐지는 웅장한 자연, 그리고 강에 스민 시간과 인물의 사이즈가 거대하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에는 얼마나 더 많은 풍경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장강삼협 기행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선내 생활이 만족스러운 이유
장강삼협 크루즈 출발지인 모평 선착장에 도착한 건 저녁 어스름 무렵이었다. 크루즈 ‘센츄리글로리’호에 올랐다. 서너 척의 유람선이 정박 중이었는데 가장 화려하게 불을 밝힌 배였다. 1만5000t급의 배는 정원이 600여 명. 이번 항차에는 정원의 절반쯤 되는 승객만 탔다. 지상 6층, 지하 1층의 배 안에는 극장과 스파, 도서실, 카페, 바, 노래방, 쇼핑매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췄다.
잘 정돈된 객실도 편안했지만 더 만족스러웠던 건 식사였다. 하루 세끼 한식과 양식, 중식 등 고른 메뉴의 수준급 음식들이 뷔페로 제공됐다. 한국인 승객을 위해 김치와 깍두기까지 내왔다. 정통 중식 요리는 외국인 관광객 입맛을 감안해 향을 조절한 듯했다. 식사 때마다 음료와 맥주, 와인 등이 무제한 제공됐다. 객실은 편안하고 식사는 훌륭하니 선내 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건 물론이다.
장강삼협의 ‘삼협(三峽)’을 상류에서 차례로 본다면 구당협(舊塘峽·취탕샤), 무협(巫峽·우샤), 서릉협(西陵峽·시링샤)의 순. 그런데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수 코스이니 거꾸로 서릉협에서 시작해 무협과 구당협 순으로 보는 것이다.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수 코스를 택한 경우라면, 서릉협은 ‘출항 전’에 보게 된다. 배가 정박해 있는 선착장 일대가 이미 서릉협이기 때문이다. 모든 승객이 승선을 마쳤는데도, 센츄리글로리 호가 출항하지 않은 이유다. 대신 출항지 선착장에 1박 2일 동안 배를 묶어두고서, 승객들을 하선시켜 서릉협 일대의 기항지 관광을 제공했다.
서릉협은 길이 75㎞로 장강삼협 가운데 가장 긴 협곡이다. 삼협댐을 비롯한 일대가 모두 서릉협에 속한다. 서릉협에는 다양한 관광명소가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는 명소도 있고, 계곡을 따라 걷는 코스도 있다.
서릉협에 산재한 수많은 관광지 중 센츄리글로리 호가 선택한 곳은 ‘삼협인가(三峽人家)’다. 삼협인가는 장강에 합류하는 작은 계곡에 중국 소수민족인 토가(土家·투자)족의 전통 마을을 재현해놓은 관광지다. 토가족은 소수민족이라지만, 중국 내 소수민족 중 6번째로 인구가 많단다. 따지고 보면 진짜 ‘소수’는 아닌 셈이다.
삼협인가에서 토가족 남자들이 과거 강 상류로 배를 끌어올리는 고된 노동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 연출된 풍경과 애국심이 쌓은 댐
토가족은 장강 변의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살았다. 남자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밧줄로 묶어서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어 끌어 올려주는 고된 일을 했다. ‘삼두평(三斗坪)’이란 토가족 마을 지명도, 척박한 땅에 심은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를 겨우 한 말씩 거둬서 연명해서 붙여진 것이란다.
삼협인가 매표소를 지나면 강과 계곡이 합류하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토가족 남자들은 돛단배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재현하고, 원색의 전통복장을 입은 여자들은 계곡 징검다리에서 형형색색의 우산을 들고나와 춤을 춘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뱃놀이를 즐기거나 피리를 불거나, 빨래를 하는 토가족 주민들이 있다. 무대에 배우를 세워 연출하듯 사람들을 세워 만들어낸 장면들이다.
공간 연출의 절정은 숲 뒤에 숨겨놓은 파이프에서 나오는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안개였다. 계곡의 고요한 수면 위로, 인공폭포 뒤로 자욱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낭만적으로 연출된 이런 장면이 소수민족의 고단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누군들 모를까. 하지만 근사한 자연경관과 적재적소에 인물과 소품을 배치해낸 연출력은, 그런 불편함을 잊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오후의 기항지 관광은 삼협댐이었다. 최초의 댐 건설 계획부터 공사를 거쳐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전시해놓은 삼협공정박물관 곳곳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 토목공사’의 자부심이 듬뿍 묻어났다. 댐 건설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1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의 아픔마저 죄다 애국심으로 포장했다.
삼협댐은 정치적 토목 건축물이었다. 애국심과 자부심. 중국이 삼협댐으로 드러내고 싶은 건 이 두 가지처럼 보였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걸 곱씹고 있는 동안, 크루즈가 출항했다. 장강 물길을 따라가는 본격적인 장강삼협의 항해가 시작된 것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큰 엘리베이터
삼협댐의 제방 길이는 2.3㎞. 높이는 185m다. 크고 높긴 한데 먼발치에서 봐야 해서 그런지 ‘세계 최대’라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다. 삼협댐에는 댐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는 투어가 있다. 배에 탄 채 댐 아래서 댐 위로 ‘선박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체험이다. 3000t급 배로 갈아탄 채 ‘세계에서 가장 큰’ 엘리베이터를 체험하는 2시간짜리 관광상품이 있는데, 센츄리글로리호는 이 상품을 옵션으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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