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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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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중앙일보

입력 2024.05.03 00:26

 
 
 
 
 
 

퇴계 이황의 뜻밖의 고백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 사람 누구나 퇴계를 알지만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학술의 최고봉을 이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중국과 일본도 인정한 주자(朱子) 이래 최고 학자, 학덕으로 지역의 품격을 높인 스승.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향한 존경이 지나쳐 미화되고 포장되면서 퇴계는 그만 인간의 모습을 탈각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우리가 퇴계를 그리워하는 것은 신이 된 퇴계가 아니라 인간 퇴계의 온기일 것이다. 그가 늘 간직한 ‘고결함을 유지하면서 올바름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다.

첫째 부인 요절, 둘째는 정신질환
“부부는 만복 근원 지극히 삼가야”

“세상사 초연했으나 재산은 신경”
1000마지기 농지 결혼 통해 일궈

 

“여자 성질 나빠도 결별 말아야”
며느리 개가 주선 사실과 달라

송재 이우의 초상. 송재는 퇴계의 숙부로 퇴계 형제를 가르쳐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했다. [사진 이숙인]

 

퇴계 이황(1501~1570)이 태어난 안동 예안은 그의 조부 이계양이 처가 거주혼으로 정착한 곳이다. 진성이씨 예안파의 입향조가 된 조부는 두 아들 이식과 이우를 두었다. 이식은 전처에서 2남 1녀를, 후처 박씨에게서 4남을 얻었는데,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7개월 만에 부친을 잃었다. 퇴계문집에 수록된 ‘상사형(上四兄)’ ‘상오형(上五兄)’이라는 문건은 넷째 형 다섯째 형에게 올린 편지로 동복형 온계(溫溪) 이해와 이징을 가리킨다. 퇴계 성장의 동력이 된 어머니 박씨의 교육열과 가난한 살림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 형제들을 학자로 길러낸 이는 숙부 송재(松齋) 이우(1469~1517)다.

외할머니 장서가 학문 형성에 큰 역할

퇴계 이황의 초상. [사진 이숙인]

송재는 형조 참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른에 문과 급제한 그가 15여년의 벼슬살이를 스스로 끝내고 낙향한 것은 조카인 온계가 17세, 퇴계가 12세 때다. 퇴계는 “내가 학업에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숙부께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덕분”이라고 했고, 송재는 퇴계 형제에 대해 “돌아가신 형님에게 이 두 아이가 있으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이조판서에 추증된 것은 숙부 송재의 현달(顯達, 명성과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로 인한 것이다. 송재와 온계와 퇴계, 진성이씨 예안파 3인방은 급제로 출사하며 재덕겸전(才德兼全)의 정치가로 거듭나 조선의 학술 제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다만 퇴계의 형 온계는 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냈는데, 권간(權奸)의 모략으로 갑산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하였다. 퇴계 50세 때의 일이다. 한편 퇴계의 부친 이식은 첫 부인 김씨의 어머니 의령 남씨로부터 상당한 양의 책을 받는데(『퇴계전서』 46), 이것이 예안파의 학문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퇴계라는 한 거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퇴계는 21세 때 동갑내기 허씨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부인 허씨는 의령의 부호 허찬(許瓚)의 딸인데, 그녀 쪽의 예천과 의령의 많은 토지가 퇴계로 건너왔다. 그런데 허씨는 27세 때 둘째 아들 이채를 낳고 한 달 만에 숨을 거두는데, 갓난아이는 외가에서 데려가 길렀다. 부인을 잃은 퇴계는 3년 후 권질(權礩)의 딸을 후처로 맞이한다. 권질은 신사무옥(1521)으로 죽임을 당한 권전(權磌)의 형으로 연좌로 예안에 유배 중이었다. 그런데 후처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가정생활이 어려웠다. 혼인 과정에 여러 설이 있지만 권질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한편 퇴계는 부인 허씨가 죽은 후 안살림을 챙겨 줄 측실을 들이는데, 여기서 서자 이적(李寂)을 얻는다. 훗날 퇴계는 장남 이준에게 서모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한다.

며느리 개가 소문 “매우 부끄러운 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퇴계선생 문집. [사진 이숙인]

퇴계가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식의 두 아내가 가난한 집의 딸인 데다 일곱 남매가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퇴계는 2명의 아내를 통해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노비 150명에 농지 1000마지기에 달했다. 전처 허씨로부터 온 토지 외에 후처 권씨로부터 온 풍산의 토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또 봉화 금씨와 혼인한 아들 이준에 이르러서는 노비 367명에 농지 3000마지기, 집 4채로 불어났다. 이준이 1586년과 1611년에 3남 2녀에게 분급한 내용이다(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2018년). 퇴계는 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들 준에게 피력한 바 있다. “나는 평생 세상사에 초연하게 살아왔지만 나라고 해서 재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학덕의 도야에 집중하되 부차적으로 치산에도 가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어나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외가 의령에서 성장한 둘째 아들 이채는 혼인 3년 2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48세의 퇴계가 단양군수에 부임한 직후이다. 아들이 떠난 지 6년, 며느리 류씨가 개가(改嫁)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1554년 2월에 퇴계는 장남 이준에게 편지를 보내 평소답지 않은 매우 격앙된 모습을 보인다. “너는 반드시 사태를 파악하고 속히 저들에게 통보하여 실본(失本)을 하지 말게 하여라.” 실본이란 개가를 가리킨다. 즉 이채의 처가에서 자식 없이 과부로 사는 딸을 개가시키려 하자 퇴계는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며느리의 개가는 퇴계에게 “매우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퇴계가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꾸며진 것이다.

경남 의령의 덕곡서원.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54년(효종5)에 세웠다. 퇴계의 첫째 부인 허씨가 의령 출신으로 차남 이채가 의령의 외가에서 자랐다. [사진 이숙인]

퇴계의 부부 생활은 어땠을까. 부부 사이를 고민하던 문인 이함형(평숙)에게 퇴계가 보낸 편지가 나왔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부부의 인륜은 지극히 소중하기에 정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소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대의 금실이 좋지 않아 불행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라.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대개는 부인의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렵거나 못생긴 데다 슬기롭지 못한 경우가 있고, 남편이 광포하고 방종한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편 쪽에 원인이 있다. 따라서 남편이 반성하여 노력하면 대부분 해결될 일들이다. 또 성질 나쁜 여자라도 큰 죄가 아니라면 잘 선처하여 결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어서 퇴계는 자신의 경험을 전해준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줄곧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박하게 하지 않고 노력하여 잘 처신한 것이 수십 년 되었습니다. 몹시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대로 하여 대륜(大倫)을 소홀히 해서 편모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퇴계집』 37, ‘여이평숙(與李平叔)’). 예순의 퇴계가 손자 안도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너도 들어서 아는 바이니,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이다”(‘여안도손(與安道孫)’). 또 아들 준에게는 “모든 형제자매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만 가법이 제대로 선다”고 하는데, 철인(哲人)의 가족 경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34세에 출사하여 30년 이상의 세월을 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그 30년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출처(出處, 나아가고 물러남)를 반복하는데 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위한 학문)과 군신지의(君臣之義, 군신의 큰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벼슬살이 중에도 늘 돌아가 이르지 못한 경지를 꿈꾸었다. 1553년 남명 조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43세부터 지금에 이른 10년 동안 세 번 돌아갔다가 세 번 소환되었다고 썼다. 그는 늘 산림으로 돌아가 원 없이 공부하며 일취월장하는 학문과 함께 즐기는 인생을 꿈꾸었다.

삶의 고단함 통해 세계적 지식 유산 남겨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퇴계 묘소의 묘비. [사진 이숙인]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 그 어떤 벼슬을 내려도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며 호소하는 퇴계에게 임금은 제발 돌아와 달라며 애원하는 패턴이 58세에서 67세에 이르기까지 십수 차례 반복되었다. “저로 하여금 길이 물러 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퇴계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는데, 또 퇴계를 소환했다. “경연 석상에 두고 그 행동을 보면서 논하는 것을 들으면, 나의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울 수 있으리라.” 68세의 퇴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임금의 부름에 응해 도성에 들어갔다. 대제학으로 경연에 참여키로 한 것이다. 69세 3월에 왕으로부터 겨우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 이황, 현인(賢人)의 삶에도 나름의 고단함이 있었다. 만물 존재의 법칙을 밝힌 이기론과 인간 본성을 밝힌 심성론, 실천을 위한 수양론으로 구성된 그의 철학 체계는 인간 퇴계가 고뇌하고 성찰하며 일구어낸 우리의 지적 유산이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