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시집 『눈물이 시킨 일』 (2011)
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2001)
타인의 슬픔.1 / 나호열
문득 의자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시집 『타인의 슬픔』 (2008)
북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구백 걸음 걸어 멈추는 곳
은행나무 줄지어 푸른 잎 틔어내고
한여름 폭포처럼 매미 울음 쏟아내고
가을 깊어가자 냄새나는 눈물방울들과
쓸어도 쓸어도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편지를 가슴에서 뜯어내더니
한 차례 눈 내리고 고요해진 뼈를 드러낸
은행나무 길 구백 걸음
오가는 사람 띄엄띄엄 밤길을 걸어
오늘은 찹쌀떡 두 개 주머니에 넣고
저 혼자 껌벅거리는 신호등 앞에 선다
배워도 모자라는 공부 때문에
지은 죄가 많아
때로는 무량하게 기대고 싶어
구백 걸음 걸어 가닿는 곳
떡 하나는 내가 먹고
너 배고프지하며 먹다 만 떡 내밀 때
그예 목이 메어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마는
나에게는 학교이며
고해소이며 절간인 나의 어머니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2017)
건봉사, 그 폐허
온몸으로 무너진 자에게 또 한 번 무너지라고
넓은 가슴 송두리째 내어주는 그 사람
봄이면 이름 모를 풀꽃들에게 넉넉하게 자리 내어주고
여름에는 우중첩첩 내리쏟는 장대비 꼿꼿이 세워주더니
가을에는 이 세상 슬픔은 이렇게 우는 것이라고
풀무치, 쓰르레미, 귀뚜라미
목청껏 울게 하더니
겨울에는 그 모든 것 쓸어담아 흰 눈으로 태우는
건봉사, 그 폐허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대의 폐허가 되고 싶다
아무렇게 읽어도 사랑이 되는
사랑을 몰라도 눈물이 되는
바람의 집
그대의 종이 되고 싶다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7)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5 (반생)
유채꽃밭에 서면 유채꽃이 되고
높은 산 고고한 눈을 보면 눈이 되고
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면 나도 노을이 되고
겨울하늘 나르는 기러기 보면
그 울음이 되고 싶은 사람아
어디서나 멀리 보이고
한시도 눈돌리지 못하게 서 있어
눈물로 씻어내는 청청한 바람이려니
지나가는 구름이면 나는 비가 되고
나무를 보면 떨어지는 나뭇잎 되고
시냇물을 보면 맑은 물소리가 되는 사람아
하루 하루를 거슬러 올라와
깨끗한 피돌기로 내 영혼에 은어떼가 되리니
나는 깊어져 가고
너는 넓어져 가고
그렇게 내밀한 바다를 만들어가는
어디에 우리의 수평선을 걸어 놓겠느냐
목숨아, 사랑아
사진시집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1991)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곷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시집 당신에게 말걸기 (2007)
낭송회 회장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