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자중하다 기회가 오면 와락 출동해야 하네”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신라~조선 서화가 역사 정리
당대 최고의 감식안 오세창
새해 들어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다시 전시된다고 한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중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작품. 사실 ‘세한도’는 가로 70㎝ 정도의 작은 그림이고, 장장 14m에 달하는 중국과 조선 문인 20명의 감상평이 진짜 압권이다. 이 중 1949년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쓴 글이 두루마리 끝자락에 나온다. “금년 9월에 군(君)이 문득 소매에 넣고 와서 나에게 보이기에 서로 펴서 읽고 어루만지니 비유컨대 황천(黃泉)에 있는 친구를 일으켜 악수하는 것과 같이 기쁨과 슬픔이 한량없다.”
오세창의 이런 감격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한도’의 원주인 이상적은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1831~1879)의 직속 스승이었다. 그러니 이상적이 감상평을 받은 중국 문사들에는 오경석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이도 있었다.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은 그가 열다섯 살 때 작고했는데, 부친의 문고(文庫)에서 봤던 숱한 이름을 이 두루마리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것이 “황천에 있는 친구를 일으켜” 세운 기쁨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오경석의 모험
오경석은 스승 이상적과 마찬가지로 중국어 역관이었다. 이상적은 평생 열두 번, 오경석은 열세 번 중국에 가서, 갈 때마다 반년 이상 머물곤 했다. 문관들은 숱한 ‘순환 보직’으로 사행을 가봐야 기껏 한두 번이었을 뿐이지만, 역관들은 달랐다. 이들은 언어도 능통했고 오랫동안 중국에 체류하며 중국을 포함한 당시 세계 정세에 누구보다 해박했다. 게다가 역관에게 주어진 특권, 무역업을 통해 중인 신분임에도 양반보다 부자인 경우가 많았다.
오경석은 8대가 역관을 했던 해주 오씨 집안 출신이다. 역관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던 오경석의 아버지는 당시 1등이었던 친구 이상적을 아들의 스승으로 붙였다. 가숙(家塾), 즉 집에 선생을 모셔 시험 공부를 시키는 게 역관 집안의 전통이었다. 오경석은 7세부터 이상적에게 배워 15세에 역관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이후 이상적의 중국인 인맥을 이어받아 22세 첫 사행부터 친구를 대거 사귀었다. 이홍장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양무운동의 핵심 인물부터, 프랑스·러시아통 외교 전문가, 금석학 대가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인물로 가득했다.
문제는 오경석이 중국을 드나들던 시기, 중국은 망해가고 있었다는 것. 톈진조약·베이징조약을 거쳐 중국이 서양 열강에 잠식되는 모습을 오경석은 생생히 목도하며 “조선에도 곧 비극이 닥칠 것”을 예감했다. 그는 혼자 마음이 급했다. 공자님 말씀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는 생각을 수백 년 굳게 믿어 온 조선인에게, 세계는 둥글고 지구 반대편에는 중국보다 강력한 나라들이 있음을 일깨워야 할 최초의 조선인이 된 것이다.
오경석은 수많은 신서(新書)와 세계 지도를 사비로 들여와 조선에 유포했다. 한의사 유대치가 그의 동지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중인 신분으로는 안 되니, 양반 가문의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를 통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는 양반 자제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을 가르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의 헌법재판소 뒤 하얀 소나무가 서 있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말이다. 지금은 실감이 안 나겠지만,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오경석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중국인 친구들에게 고급 정보를 입수해 전쟁 방어를 성공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외교력을 인정받아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는 일본어 역관도 아닌 그가 실무 책임자로 발탁돼 그야말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는 조약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엄청난 질책을 받았고, 과로에 중풍으로 쓰러져 3년 후 숨을 거뒀다. 향년 48세였다.
◇오세창의 꿈과 좌절
오경석이 죽은 해인 1879년, 외아들 오세창이 역관 시험에 붙었다. 오세창의 ‘가숙’ 스승은 부친의 절친 유대치였다. 부친이 죽은 후 나라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오세창은 정변의 막후 인물인 스승 유대치를 모시고 경기도 광주까지 도피했다. 유대치의 아내는 자결했고, 유대치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간 후 홀연히 사라졌다. 풍운의 시대였다.
오세창의 이후 행적 또한 파란만장했다. 박영효·유길준 같은 개화 세력이 다시 등용될 때는 그도 박문국 주사가 돼 ‘한성주보’에 외국 소식을 번역해 싣는 일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가 실권을 잡자, 내무부 주사로서 개혁 핵심 부서 비서관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다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개화 세력이 쫓겨났을 때는 그도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외국어학교 교사 생활을 하며 지냈고,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됐을 때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일본에 망명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저 세파에 흘러 다녔다.
오세창이 ‘각성’한 것은 일본 망명기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서라고 생각된다. 이 둘은 서울에서라면 서로 만날 일이 별로 없는 사이였다. 손병희는 충북 청주 아전의 서자 출신으로, 신분으로 말하자면 마찬가지로 중인이었지만, 서학(西學)에 반대되는 동학(東學)의 접주였다. 그는 후에 인내천(人乃天),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섬긴 천도교의 3대 교주가 된다. 하늘 아래 인간이 평등하다는 손병희의 사상은 오세창에게 큰 감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만남은 역사적으로도 중대 사건인데, 나중에 이들이 3·1운동의 주도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대단한 ‘인력 동원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오세창은 그의 부친이 소수의 양반 자제를 통해 개혁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수의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이들을 널리 일깨우는 데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을사늑약 체결 후 망명 갔던 개화 세력이 속속 국내로 돌아와 정치를 재개했지만, 1906년 귀국한 오세창은 오로지 교육과 언론 사업에만 투신했다.
오세창은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1906)와 대한협회 기관지 ‘대한민보’(1909)의 사장이 돼, 기울어가는 나라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대한민보’에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 관료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논설과 삽화를 실은 것은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결국 1910년 8월 29일 나라는 망했고, ‘대한’이라는 단어조차 못 쓰게 되자 30일 자에는 ‘민보’라는 이름으로라도 신문 제작을 계속했다. 그나마 ‘민보’도 하루 만에 강제 폐간됐다. 오세창은 할 일이 없어졌다.
◇꺾이지 않는 마음: 문화 운동
자, 이렇게 해서 오세창이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문화 운동이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두문불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중 제일 먼저 한 일이 이 땅의 역사, 그것도 예술가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신라 솔거에서부터 당대에 이르는 서화가 1117명의 역사를 정리했다. 단편적으로만 기록됐던 예술가 이야기를 총 273종의 문헌에서 발췌하고 요약하고 평을 달았다. ‘근역서화사’ 전 3권이 1917년 완성됐으니, 장장 7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근역’은 ‘무궁화가 피는 지역’,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이 책은 1928년 최남선에 의해 ‘근역서화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때까지 조선은 화가를 본업으로 하는 이들을 높게 치지 않았고, 예술이라는 개념도 천시했다. 근대 화가들 일대기에서,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들이 모두 뜯어말렸던 이유다. 그러나 오세창은 예술가야말로 나라 문화의 중추를 형성하는 핵심이라 여겼기에,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할 뿐 아니라 신진 화가를 양성하고 북돋아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자였다.
오세창을 존경했던 후배 화가 고희동의 회고에 따르면, 오세창은 경술국치 직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이런 말을 했다. “언어와 행동을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 그렇게 은인자중하는 동안, 그는 고문헌을 정리해 책을 쓰고, 금석학을 연구해 고전을 복원했으며, 서예와 인장을 대거 수집하고 손수 제작했다. 겉으로는 한가로이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919년 “와락” 일어나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했고,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라는 망했어도 ‘문화’를 통해 ‘정신’을 지키는 일을.
◇오세창의 뜻
오세창이 한 일을 가만히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르네상스는 ‘부활’을 의미하는데 이때의 부활은 그리스·로마 시대, 즉 고전의 부활을 말한다. 오세창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근역의 고대 유물을 연구하고 옛 글씨인 ‘전서(篆書)’를 되살리는 일을 했다. 이는 실로 대단한 업적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바사리가 ‘예술가열전’을 썼던 것처럼 화가의 ‘이름’을 되살리는 작업을 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했던 것처럼, 오세창 스스로도 그리고 간송 전형필의 스승으로서도, 우리 땅의 유산을 발굴하고 수집·보존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공국의 지원 속에서 화려한 문화가 꽃피었다면, 오세창이 살던 시대에는 나라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 그 어떤 다른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뚫고, 잡초처럼 뭔가가 자라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오세창의 뜻을 이 시대 예술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한참 후배 화가들에게까지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안중식과는 오랜 친구였고, 이도영·고희동과도 자주 어울렸으며, 3·1운동 후 언론계에 종사한 젊은 화가들(노수현·이상범 등)을 아꼈던 그였다. 1944년 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에는 전서 10폭 병풍을 선물했다. 김향안은 이 병풍이야말로 ‘국보’라고 말했다. 오세창은 장수했다. 1953년 4월, 아직은 전쟁 중이던 피란지 대구에서 생을 마감했다. 올해는 그의 탄생 160년이 되는 해다. 그의 계보를 이은 화가들의 이야기가 당분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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