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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없는 지하철 보며, 잔인한 ‘의자 뺏기’ 게임을 생각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31. 16:08

[정희원의 늙기의 기술]

의자 없는 지하철 보며, 잔인한 ‘의자 뺏기’ 게임을 생각했다

입력 2024.01.31. 03:00
 
 
 
 
 
 
일러스트=양진경

 

서울교통공사는 올해 1월 10일 출근 시간부터 지하철 4호선 혼잡도를 줄이고자 ‘의자 없는 열차’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이 사건만큼 ‘의자 앉기 게임’ 모습을 띤 우리 사회를 잘 반영할 만한 일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게임에서는 참여자보다 의자 개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재빠르게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의자 개수는 계속 줄어들고, 최후까지 의자에 앉는 데 성공한 1인만 승자가 된다. 중소기업뉴스의 2022년 분석에 따르면 서울에는 전국 대기업의 52.1%, 중소기업의 21.4%가 몰려 있다. 상대적으로 질 좋은 일자리를 찾아 전국 젊은이가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의자는 충분치 않다. 일자리는 많지만 모든 이가 직장에 가까운 곳에서 살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따르는 현상이 길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옥 출퇴근이다. 출퇴근해야 할 사람 수를 줄일 수도, 배차를 늘릴 수도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의자를 없애기에 이르렀다.

그래픽=양진경

 

필자가 건강한 생활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화를 내는 분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내 몸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노화 시계의 템포는 내가 무엇을 먹고, 어떤 운동을 하고, 어떻게 스트레스를 받느냐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뀐다. 달력이 1년 치 지나갔을 때, 노화 시계가 1년 흐르는 것은 정속 노화다. 가속 노화는 1배속보다 빠르게 노화 시계가 흘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하지 않은 가공식품, 단순 당, 정제 곡물투성이 식사,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생활 습관, 술, 담배, 정신적 스트레스, 수면 부족 등이 노화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 통상적으로 노화에는 유전자가 30, 생활 습관이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본다. 가속 노화가 유지되는 상태를 지속하면 나중에는 생물학적 나이(몸 나이)가 숫자 나이보다 많게 된다. 생물학적 나이는 중·노년기의 만성 질환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화 시계라는 통장에 가속 노화를 꾸준히 쌓으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뇌혈관 질환, 암, 치매를 더 일찍 만나게 된다. 몸에 고장이 빨리 쌓이는 셈이다. 이 고장이 어느 선을 넘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간병인과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아픈 장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가속 노화 생활 습관을 피하기가 개인의 의지력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긴 시간 출퇴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나아가 가정을 이뤄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을까? 스스로 몸과 마음을 잘 돌보며 노화 시계가 천천히 굴러가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을 나는 가처분 소득에 빗대어 ‘가처분 시간’으로 설명한다. 건강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책도 사 보고 연주회도 보러 가려면 가처분 소득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픽=양진경

 

첫째, 절대적인 가처분 시간의 결핍이 문제다. 한국인의 출퇴근 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16년 자료에서 한국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은 58분이었는데, OECD 국가 전체 평균 28분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202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근로자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72.6분이며 수도권 직장인은 83.2분이었다. 2019년 국토교통부 조사에 따르면,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은 일평균 시간이 자그마치 168분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도 무척 많이 한다. 2022년 OECD 연간 노동 시간 자료에서, 한국인은 연간 1901시간을 일했다.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OECD 평균인 1752시간보다 길고, 독일의 1341시간에 비하면 거의 1.5배를 일한 셈이다. 장시간 노동이 기본값이 된 사회, 장거리 출퇴근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는 절대적 가처분 시간이 일단 귀하다. 미국 코넬대의 게리 에번스 교수에 따르면, 편도 출퇴근 시간이 1시간인 사람들보다 2시간으로 갑절인 사람들은 타액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유의미하게 높았고, 주관적 스트레스 정도도 심했으며 심지어 출근 때 인지 기능도 약했다. 출퇴근 시간이 1분 늘 때마다 잠이 0.2분 줄고, 식사 준비에 0.04분, 운동에 0.03분을 덜 쓴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 잠, 식사, 운동은 모두 수명이나 노화 속도와 연관이 있는 인자다.

둘째는 상대적 가처분 시간의 결핍 문제다. 모두가 불안에 시달리는 ‘의자 앉기 게임’ 형국에서, 경쟁에서 이기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그득하다. 경제적 불안감으로 여가에도 여러 부업을 해야 하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건강한 식사와 운동은 사치가 된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가처분 시간 결핍 현상에서 살아남은 시간을 쪼개어 잠, 운동, 식사, 마음챙김에 써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자극이 넘쳐나는 지금 사회에서는 가처분 시간 활용의 왜곡이 따른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그나마 스트레스를 쉽게 푸는 방법에 손이 간다. 술, 담배, 마약, 소셜미디어와 쇼트폼 비디오, 명품 구입, 상품화된 여행…. 빠른 보상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아쉬운 가처분 시간과 가처분 소득을 점유하고야 만다. 필자 역시 편도 두 시간 넘게 출퇴근한 경험이 있다. 자정에 귀가하고 새벽 5시에 집을 나서곤 했다. 급히 술을 들이켜고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며 잠에 드는 습관이 생겼고, 체중이 늘고 고혈압이 생겼다. 가속 노화의 악순환이다.

경쟁국보다 빠른 성장을 채근당하며 선진국으로 변모한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가속 사회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삶 속의 모든 것은 더 자극적으로 진화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책을 이겼고, 더 짧은 유튜브 동영상이 대세가 되더니 이제는 쇼트폼 시대다. 즐거움은 늘었지만,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이래, 전 세계 젊은이들은 더 우울하고 불안해졌다. 지난 60년 동안 한국인 1인당 당류 소비는 수십 배 증가했다. 젊은 당뇨 환자와 암 환자가 빠르게 는다. 그럴수록 건강관리를 또 한 측면의 자기 계발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가속 노화는 개인 문제도, 세대 문제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이 가속 사회의 문제다. 여유로운 가처분 시간을 얻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볼 여지가 생겨야, 가정도 형성하고 아이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