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언어와 존재의 언어
김재진 시인
‘번뇌는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있다고 생각하지만 번뇌는 실제로는 없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불교의 선지식 나가르주나(용수)의 말씀이다. 그런데 번뇌가 없다면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쓰기는 번뇌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내 경우다. 다른 이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말을 따른다면, 나는 ‘있지도 않은 번뇌라는 것’에 끄달려 글을 쓴다. 따라서 번뇌가 없는 순간 글이 안된다고 느낄 때도 있다. 번뇌가 없으면 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겐 글을 쓰기 위해 번뇌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마치 필요를 위해 결과를 불러오는 것과 같다. 아닌가? 결과를 위해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어쨌건 나는 번뇌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이 말은 글 쓰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바꾸어 말해도 무방하다. 글은 이럴 때 치유가 아니라 버려야 할 짐이다. 무겁게 들고 있는 모든 것은 짐이며 그 짐은 내려놓아야 편하다. 치유가 뭔가? 편한 것이 치유 아닌가. 불편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모두 벗어나고 싶다. 자발적가난이라는 말이 있지만, 자발적 불편이라는 말도 만들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자발적이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불편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는 결코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만들어낸 의지의 산물이다.
짐이 되는 번뇌가 어찌 치유의 방편이 되겠는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시는 그러나 번뇌이면서 치유다. 다시 한 번 말로 장난질을 하자면, 번뇌가 곧 치유다.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없는 번뇌’는 치유의 궁극을 뜻하는 것이다. 번뇌가 극에 달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치유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진정한 치유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번뇌없는 치유란 달콤할지언정 안락이나 안주 같은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좋은 시 또한 그런 것이다. 번뇌 끝에 탄생한 어떤 것, 번뇌라는 것이 ‘있지만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시적인 순간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더 쓸 것 없이 비어버린 상태를 꿈꾸며 시는 나아가는 것이다. 이른바 ‘비움의 철학’이 내가 생각하는 시의 진정한 지향점이라는 말이다. 아무것도 더 쓸 것이 없는 궁극의 그 텅 빈 상태를 용수는 공(空)이라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공묘유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의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의 ‘텅 빔’과는 다르다. 그런 상태를 경전에서는 ‘텅 빈 충만’이라 일컫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는데 충만하다니? 진정한 시인이라면 느껴보았을 텅 빈 그 충만의 상태를 혹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충분하다.
이 몇 단어들이면 충분하다.
이 단어들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 호흡이면 충분하다.
이 호흡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David Whyte)
우연히 읽었던 시다. 호흡을 지켜보며 좌선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 같은 이 짧은 글을 좌선이 아니라 시에 대한 비유로 읽어도 좋다. 진리를 드러내는 데는 몇 단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언어를 뛰어넘어 숨소리 한번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선(禪)과 마찬가지로 시는 소유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다. 존재에 무슨 군더더기가 필요하겠는가. 무엇인가를 얻거나 가지기 위해서라면 설득과 간청과 호소가 필요하겠지만, 존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호흡 뿐이다.
깨달음의 스승이었던 구르지예프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를 부모로 이 세상에 왔다. 신비주의자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깊은 산 속의 어느 수피수도원에서 모든 악이 인류가 정신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에서 지식의 길과 존재의 길이 벌어지게 되는 이유를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선 흘려보낼 수 없는 발언이다.
구르지에프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말로 서로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각자가 다르게 해석을 하면서도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같은 문장 앞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면서도 시인들은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진 않은가? 인간의 언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보편적인 언어(내 생각: 에스페란토어처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을 고안해내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구르지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할 때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서로 확실하게 이해한다.”
영어와 영어로 만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어와 한국어가 만나면 서로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말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가서도 우리는 결코 굶어죽지 않고 잘 돌아다닌다. 외국어를 못한다고 해서 존재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뭔가를 소유하려고 하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쓰는 글은 결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시는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킬지언정 결코 가슴에 무늬를 남기지 못한다. 시집을 열어보라.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언어와 문장으로 가득찬 시를 통해 사랑이나 연민, 자비심 같은 것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말, 언어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편이 아니라 소유의 편이다. 소유에는 사랑이나 연민, 자비심 같은 것이 깃들 공간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가지려 하는 마음은 욕망이며 그 욕망을 통해 획득한 어떤 것은 시가 아니라 일종의 성취일 뿐이다. 그러나 좋은 시는 결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끝없는 결핍의 언어이며 그 결핍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공(空)이다. 그것은 시가 소유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구르지예프는 말한다. “두 사람이 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으며 서로 동의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고 있으며 조금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구르지예프의 말 위로 나는 시를 얹어 본다. 이때의 말은 언어로서의 말이 아니라 안장을 얹고 달리는 속도로서의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경주마 같은 것은 아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체로서의 언어를 뜻한다. 시로 말할 때도 우린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문법으로서의 시가 아닌 몸으로서의, 체온으로서의, 느낌으로서의 시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척 보면 아는 단계, 느낌과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은 수사(修辭)가 필요없다. 수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수사가 만들어낸 벽을 넘어 직통으로 소통하고, 직통으로 교감하는 세상에 있고 싶다.
대화를 하면서도 우리는 벽에 막힌다. 수많은 위로의 말과, 수많은 지적인 대화는 때로 침묵 보다 못할 때가 있다. 입을 다물 때 우리는 아마 더 많은 말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단 한 줄의 문장, 단 한번의 심호흡이 막혀있던 가슴을 소통하게 한다. 높은 지식이나 뛰어난 비유로 가득한 글은 아름답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머리를 만족하게 할 뿐 가슴을 뛰게 하지 못한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 찾아온 이에게 차를 따라주던 스승은 잔이 넘치도록 기울인 주전자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 차는 넘쳐서 흐르고, 기다리다 못한 방문객은 스승에게 말한다. “차가 넘쳐서 탁자를 다 적십니다.” 스승은 대답한다. “그대의 머리가 이와 같다네. 지식이 너무 많아 넘쳐 흐르지.”
우리가 시인이라 부르는 이들,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것들도 그런 것은 아닐까? 뭔가가 넘쳐서 탁자를 적시건만 넘치는 줄도 모르고 자꾸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뭔가를 성취하고,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 움직이는 삶은 불안하다. 존재의 언어가 아닌 소유의 언어로 움직이는 시 또한 불안하다. 끊임없는 내면의 그 불안이 시를 어렵게 하거나 무겁게 하는 건 아닐까? 회교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모든 움직임은 움직이는 자로부터 나온다. 모든 갈망은 우리를 바다로 끌어들인다’라고 노래했다. 행복하길 원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행복과는 다른 궤도에서 일어난다. ‘움직이는 자로부터 나오는 움직임’을 망각한 채 스스로 행복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고통과 갈등과 슬픔의 과잉된 언어로 시는 세상살이의 신산(辛酸)을 기록한다. 그러나 기록은 시가 아니다. 시는 노래다. 노래는 결코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느끼고 공유할 뿐이다.
상처는 나의 기쁨, 나는 그것을 통해 배운다.
잃을 것 남아 있어 행복한
상실은 나의 희망, 그것을 통해 나는 채운다.
부서진 도끼날이 나무 결을 기억하듯
예민한 칼날이 사과 향을 기억하듯
나무가 품은 봄 향기에 언덕의 풀이 깨어나듯
두려움은 나의 스승, 그것을 통해 나는 세상을 외경한다.
(내가 쓴 시, 외경)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했듯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있다’는 생각은 우주의 원리를 깨달은 현자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삼라만상에 깃든 생의 비의(秘意)를 캐묻는 시인 또한 시를 통해 우주가 홀로그램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은 환상이며 파편이며 동시에 전체다. 파편 속에 전체가 깃들어 있다는 홀로그램적인 진실을 진정한 시인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알고 나서 세상을 보면, 부딪히는 모든 것에 외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고 노래했던 윌리엄 브레이크 같은 시인은 ‘한 알의 모래’라는 그 파편 같은 조각 속에 광대한 우주가 통째로 숨어있다는 홀로그램적인 통찰을 한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는 그의 통찰을 따라가다 보면 이유없이 길던 시는 차츰 짧아진다.
인도의 존경받는 사상가이며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스리 오로빈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분리는 미망이며, 만물은 궁극적으로 일체이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 또한 윌리엄브레이크가 노래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시구와 흡사하지 않은가. 작은 조각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홀로그램적 시각은 그것 자체로 시적(詩的)이다. 생략과 압축을 통해 생의 비의를 한 줄로 꿰뚫는 하이쿠 같은 것을 누가 시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스리 오로빈도’는 “분리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은 오직 높은 진동의 현실차원으로부터 낮은 진동의 차원으로 내려올 때 뿐”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시는 어떤가? 당신의 시는 분리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높은 자아(自我)의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가? 우리가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은 의식의 낮은 차원으로부터 벗어나 높은 진동의 현실 속으로 의식이 고양될 때이다. 뛰어난 시는 그 순간에 솟아나며 시가 치유일 수 있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내가 쓴 시, 치유)
언젠가 문학 계간지에 연재했던 시와 치유에 대해 쓴 글이다.
긴 글이니 필요한 분만 읽으시라.
* 페이스북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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