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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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말하는 시창작법

짧은 시를 많이 읽어라 / 이문재 시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11. 16:40

짧은 시를 많이 읽어라 / 이문재 시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 중에는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때문에 보내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우편으로 시집을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 잡은 시를 본다. 그다움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있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 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를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않은 삶을 살면서 2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김초혜, 병상일기 5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최종수, 달처럼

 

위의 두 편의 시는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짧은 시다. 병상일기 5는 김초혜 시인이 계간 시와 시학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달처럼은 최종수 시인의 첫 시집 지독한 갈증에 실린 시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병상일기 5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이고 만개한 꽃 속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처럼의 시는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 혹은 연대의 은유이다.

짧은 시를 되도록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과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 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자.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자.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구체적인 우리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보낼 때, 외우고 있는 한 편의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