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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말하는 시창작법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25.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3. 22. 23:42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25.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사랑하라 그러면 써질지니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시론>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중국의 문학이론>)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청장관전서>)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사랑법>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 최영철, <밤에>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걷는다는 것> 전문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15.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행과 연의 화음으로 시를 ‘노래’하라

 

행-연갈이는 시인의 특권

다만 계획적으로 나눌 것

그리고 끝없이 변화 줄 것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김소월, <가는 길> 일부) 이렇듯 절묘하게 우리의 전통적 율격인 3음보를 활용하던 시절은 차라리 행복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박목월, <윤사월> 전문). 간략한 7·5조에 기대어 봄날의 애틋한 정취를 짧게 노래하던 시절도 먼 옛날이 되었다.

 

시를 쓰게 되면 누구나 행과 연을 구분하게 되고, 그에 따른 리듬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문학수업 시간에 귀가 닳도록 듣게 되는 그놈의 내재율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내재율은 정형시의 율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의 내부에 숨어 있는 리듬을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리듬은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형식적 잣대가 되기도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만 모든 자유시가 내재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창작자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우창은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 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고 했고, 이형기는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소리를 예술적으로 조직한 구조물이 시”라면서 시의 음악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 대부분의 창작자는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의 형상화를 고심하는 동안 리듬에 대한 배려는 뒤로 밀쳐두는 일이 빈번해진다. 시인들은 형식을 낯설게 변화시키는 일을 내심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설혹 과감하게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한다. 그렇게 현재의 형식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낀 존재, 그가 시인이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연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고저·장단·강약, 문장 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시의 행과 연은 외형적으로 시와 산문을 가장 잘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행과 연을 활용해 무엇을 쓴다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자 시인에게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이처럼 중요한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시지 않으면 시인으로서 낙제다. 당신이 시를 쓸 때 아무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과 연을 바꾸었다면 지금부터 자중하라. 관습적인 행갈이는 당신이 쓰는 시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관습화한다. 시의 호흡에 따라 적당히 행을 바꾸면 된다고, 행갈이에 특별한 규칙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빨리 그 나쁜 생각을 버려라. 행갈이에 ‘적당히’란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고, 충분한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과 의도 없이 절대로 행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지 마라. 시의 리듬을 고려해 행을 바꾸었다고 구차하게 변명 좀 하지 마라.

 

예컨대 최근에 당신이 10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그 시행의 길이가 다 고만고만하고, 각각의 시의 길이가 모두 비슷비슷하다면 당신의 시작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그때 당신의 리듬은 기계적인 리듬이어서 아무도 당신의 리듬에 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리듬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도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박노해의 시 <지문을 부른다> 일부이다. 우리는 그동안 박노해가 현장노동자 출신의 시인이라거나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노동자의 당파성과 미래를 향한 진보적인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에만 주목해왔다. 물론 박노해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여기에 세 번 등장하는 ‘없어’에 사정없이 꽂혀버렸다. 주민등록증 갱신을 위해 지문을 찍다가 노동자로 산 덕분에 문드러지고 사라져버린 지문을 어쩌면 이렇게 선명하게 부조할 수 있는가! 인용 부분의 첫 번째 ‘없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놀라움이 있고, 두 번째 ‘없어’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의 까무러치는 비명이 있고, 세 번째 ‘없어’에는 절망으로 들끓는 복잡한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또한 ‘없어’의 뒤에 붙은 쉼표 하나하나는 시의 호흡을 가파르게 하면서 앞에서 터져 나온 ‘아’라는 감탄사를 뒤로 계속 밀어붙이는 구실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없어’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이외에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자의 존재란 없다는 각성까지 환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중 한 부분을 행갈이와 쉼표 없이 적어보자.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어떤가? 행갈이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한 글자, 혹은 두 글자라도 그게 하나의 시행이 되려면 시의 전체 흐름에 힘을 가하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체 20행의 시가 있다면 한 행은 이십분의 일의 언어 밀도와 생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에서 시행 구분의 원리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제출한 적 있다. 그는 일본 시인 기다조노 가즈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의 각 행은 ‘사상의 분량’ ‘의미의 분량’ ‘이미지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계산된 의도 없는 시행 바꾸기가 시를 얼마나 허약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시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써야 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형식을 변화시킬 만한 에너지를 행 바꾸기에서부터 찾아라. 습관적으로 바꾸고 나눠왔던 행과 연에 변화를 도모하라.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바꿔보라. 시의 길이를 지금보다 길게 늘이거나 대폭 줄여보라. 모두들 긴바지를 입는 겨울에 시인은 반바지를 입고 뚜벅뚜벅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행이 산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리듬이나 이미지보다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오규원 <현대시작법>)고 했다. 행갈이가 애매하고 지겨워지면 아예 행을 무시한 산문시로 건너가 보라. 거꾸로 산문시가 구태의연하다고 느껴지면 다섯 줄 이하의 짧은 시로 건너가 보라.

 

문장의 빛깔과 무늬를 문채(文彩)라고 한다. 시의 문채는 행과 연의 배치, 어휘의 선택 등을 통해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시에 대폭 도입된 ‘양행 걸침’ 형태는 시의 형식과 내용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을 선도한 것은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이다. 이 양행 걸침 기법은 한국시에 고질적으로 스며 있던 관망과 관조의 태도를 일시에 혁파하였다. 행갈이의 변화가 한국시의 질서 전체를 역동적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파급력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와서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멈추었다가 최근에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세 시인이 있다. 서정춘, 위선환, 신현정 시인이 그들이다. 이 시인들의 시가 왜 좋은가? 다른 것 다 젖혀두고, 행과 연부터 다르다. 문채가 다르다. 오랜 시간의 내공이 개성적인 형식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17.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누더기의 삶 그러나 눈부신 순간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의 얼굴이 핼쑥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가 그랬다.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없었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경림의 <농무>가 솟아나왔다.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주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침묵 강요하는 참담했던 시절

신경림 ‘농무’ 현실묘사 ‘충격’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 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창작의 원칙 같은 것도 나름대로 정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향기롭기만 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시골 큰집>)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하찮은 세계가 한 권의 시집 속에 그렇게 눈부신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서정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이용악의 <낡은 집>이다. 이 시에서 이용악은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30년대의 상황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그려낸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농무>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는 전체 5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다.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의 이슬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두어 방울은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 <삶> 전문이다.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서정 만나면 ‘시’ 탄생

감정 구성하고 소재 장악해야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 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의 <허공 한줌> 전문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시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9. 감정을 쏟아 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허리 낮춰 들여다봐 달개비 속에 뭐가 보이나

 

학교에서 시를 공부하면 할수록 왜 시와 멀어지는 것일까? 시를 왜 어렵고 모호하고 복잡하고 이상한 물건으로 여기게 될까? 혹시 교과서가 시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과서에서는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나는 이 케케묵은 사전적인 정의를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내용을 이룬다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이 말을 ‘사람의 생각과 느낌’으로 순화시켜 읽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시 아닌 다른 문학 장르에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다루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함축과 운율’이 시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 시는 운율적 결속력이 대단히 미미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운율을 따지는 게 난처할 때가 많다. 한 비평가는 시의 함축성보다는 오히려 시가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긴 이야기를 짧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표현의 사용”이 시의 특성에 가깝다는 말이다.(이남호,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현대문학) 매우 정확하고 적절한 의견이다.

 

 

함축보다는 비유가 중요

과장·감상·현학 배척하고

나 대신 사물이 얘기하게

 

시를 느끼고 이해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창작자도 시의 사전적인 정의에 갇혀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인간의 사상을 한 자루의 펜으로 표현하겠다고 대드는 일은 무모할 뿐이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사상적 체계에 관여하고 거기에 기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상을 해설하거나 추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시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감정과 유사한 용어인 감성·정서·느낌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들이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시가 고백적 양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게 세 가지가 있다. 당신은 시를 쓰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이것들을 과감하게 배척해야 한다. 첫 번째는 과장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우습다. 두 번째는 감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그런 것들은 역겹다. 세 번째는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그런 것들은 느끼하다.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시란 개인적인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발산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의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남과 다른 세계를 유형화해 보여주는 의도적 행위이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고 눈에 번쩍 뜨이는 말을 해준 이는 연암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받아 적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정을 언어화하는 이 과정을 ‘묘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란 감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것이다. 시인이 묘사한 언어를 보고 독자는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 그림을 이미지라고 한다.

 

묘사는 본질에 이르는 관문

대상과 일정한 ‘거리 유지’

하고 싶은 말 참을 줄 알아야

 

시를 쓰는 사람이 묘사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미술에서 데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묘사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옛 시인들이 산정에 올라 천하를 둘러보며 호연지기를 노래했던 일은 감정의 움직임에 충실한 것이었다. 현대의 시인들은 그걸 따라 흉내 내면 안 된다. 산에 오르기 전에 눈에 띄는 식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귀에 들리는 새소리를 언어의 그림으로 그릴 준비를 해야 한다.

 

혹시 들길을 걷다가 당신은 달개비 꽃잎 속에 코끼리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달개비 떼 앞에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황동규, <풍장 58> 중에서) 나도 이 시를 읽고 실제로 달개비를 찾아 꽃잎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달개비 꽃잎 속에는 코끼리가 들어 있었다! (믿어지지 않으면 허리를 낮추고 가만히 달개비 꽃잎 속을 한 번 들여다보라.) 이 구절 때문에, 한 발 늦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나는 요즈음도 꽃잎을 보면 무조건 오래 들여다본다.

 

어떤 시가 언어예술로서의 기본적인 꼴을 갖추었는가의 여부도 묘사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에 대한 묘사 능력으로 시의 품격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묘사는 시쓰기의 출발이면서, 또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정확하고, 절실하게 언어로 그릴 책임이 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 드러내면 시가 추해진다. 내 마음을 최대한 정성을 들여 그려서 보여주기, 그게 시다.

 

다음은 조선 후기 한욱(韓旭)이라는 시인이 쓴 한시다. (정양ㆍ부사회 공역, <한국 리얼리즘 한시의 이해>, 새문사)

 

 

① 小築依山似鶴巢 산등에 붙은 오막살이 까치둥지 같다

② 荒籬生色鑽春梢 그래도 울타리에는 가지마다 봄꽃이 곱다

③ 東風似惜吾蘆弊 집이 너무 헐어서 바람도 딱하게 여기나 보다

④ ? 送飛花覆破茅 꽃이파리 휘몰아다가 낡은 지붕을 깁는다

 

서정시에서 흔히 자아가 대상에 스며드는 것을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하고, 거꾸로 어떤 대상한테 자아를 맡기고 비춰보는 것을 ‘의탁’ ‘투사’ 혹은 ‘투영’이라고 한다. 주체와 객체의 동일시라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 시에서 ①과 ②는 자아가 풍경에 동화되는 순간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③과 ④는 자아의 감정을 바람에 의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산등성이 오막살이집의 낡은 지붕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을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에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애처롭고 딱한 감정(惜)을 단순히 토로하는 게 아니라 꽃잎이 낡은 지붕을 덮는 객관화된 풍경과 동일시하는 이 기법은 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묘사는 무엇보다 구체적 형상화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는 중국의 시론이 있다. 본질을 그리기 위해서는 묘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시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묘사의 생생함이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사는 시의 화자인 ‘나’를 객관화하는 데 기여하는 형상화 방식이므로 묘사를 통해 대상과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도현 시인· 전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