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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작업이다.
이생진
90세가 넘은 나이로 내 문학 인생을 되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시를 쓰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었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는 80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시를 썼고 시집을 출간하며 삶을 이해하려 해 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더 이상 나를 얽매는 것들에게서 자유롭고 싶었다. 나의 시는 더 이상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작업이었다. 피카소처럼 나도 내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나에게 있어 시는 늘 나의 일부였다. 내 삶의 한 조각이자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창구였다. 시를 쓰는 행위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내 안에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내 시가 더 이상 나를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비우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시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며 조금씩 나를 비워냈다.
내가 남긴 시들은 내 삶의 기록이자 나의 마음을 담은 거울이다. 나는 내 시가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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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앞에서
이생진
나
여기 앉아 있을 테니
다들 돌아가라
유언지대遺言地帶
누구나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절벽
나
여기 앉아 있을 테니
그만 돌아들 가라
-계간 <시와 징후> 겨울호 발표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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