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베토벤의 ‘합창’ 극한 고난 딛고 쏘아올린 환희의 불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7. 16:40

베토벤의 ‘합창’ 극한 고난 딛고 쏘아올린 환희의 불꽃

중앙선데이

입력 2023.08.05 00:27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하노버 오페라 하우스 외부의 베토벤 동상. [사진 사회평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베토벤의 성공 역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베토벤이 고향 본을 떠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에 입성해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였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왕권과 신분제에 도전한 이 혁명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로 황제의 여동생이었으니, 빈의 분위기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빈 시민들의 시선을 단 번에 사로잡은 음악가가 바로 베토벤이었다.

 

나폴레옹 몰락하자 유럽 반혁명 물결

 

베토벤의 음악은 이전 다른 음악가들의 것과는 달라도 크게 달랐다. 대조적인 프레이즈들로 빈틈없이 설계된 그의 음악은 거침없이 질주하며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냈고 넘치는 열정과 폭발적인 에너지는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주변국들은 혁명 사상이 자국으로 번지는 것이 두려워 대 프랑스 동맹을 맺어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나타나 유럽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였다. 강렬하고 투쟁적인 베토벤의 음악은 혼돈의 시기를 겪는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다가갔고, 격정적인 승리의 서사는 그들에게 불안을 잊게 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정상을 오르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힘든 법이다. 베토벤이 ‘교향곡 8번’을 발표하던 해,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그가 사라지자 유럽에는 반동의 물결이 일었다. 정치 질서는 군주가 지배하는 구체제로 빠르게 복귀했고, 혁명 사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경찰국가체제로 돌입했다. 시민들의 가슴 속에 불타던 사회 개혁이나 혁명의 열망은 사라졌고, 자포자기식 쾌락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사람들의 음악 취향도 바뀌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같은 유쾌하고 발랄한 음악들이 인기를 끌었다. 베토벤의 음악이 설 자리는 크게 줄어들었다.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의 베토벤 장례 행렬(프란츠 크사버 슈퇴버, 1827). [중앙포토]

 

갑자기 바뀐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하려던 것일까. 평소 음표 하나에 대해서도 엄격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베토벤도 ‘웰링턴의 승리’같이 가벼운 작품을 썼다. 웰링턴 공작이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한 이 곡은 관악기의 팡파르와 대포 소리 등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로 가득했고, 초연 당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과거 그의 음악들이 보여준 치밀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토벤은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모였던 빈회의를 위해서도 칸타타 ‘현명한 창시자이신 당신이여’와 ‘영광의 순간’을 작곡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 정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베토벤이 빈회의를 위한 행사용 음악을 작곡하다니. 베토벤 자신도 이러한 사실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 곡들에 작품번호를 붙이지 않았고 출판하지도 않았다.

 

인기와 명성이 높을수록 슬럼프도 길어지는가 보다. 그 후 베토벤은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과거 2년마다 한 번씩 만들었던 교향곡 역시 작곡하지 못했다. 그의 창조성이 돋보였던 피아노 협주곡이나 현악 4중주도 마찬가지였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쉼 없이 발표해서 유럽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던 베토벤이 아무 작품도 내놓지를 못하자 호사가들이 먼저 그의 능력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많은 사람이 이제 베토벤의 시대는 확실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불행은 항상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이 시기 베토벤은 자신이 ‘불멸의 연인’이라고 불렀던 안토니 브렌타노와 결별했다. 베토벤의 사후 비밀 서랍 속에서 세 통의 애절한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며 사랑하는 여인들로부터 거절만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던 베토벤에게 애틋한 사랑이 있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수신인의 이름이 없어, 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 그 주인공의 정체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최근에 밝혀진 비밀의 주인공은 바로 안토니 브렌타노이다. 그녀는 빈의 정치가였던 요한 폰 비르켄슈톡의 외동딸로 열아홉 살에 결혼한 후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그녀는 1809년 부친의 임종을 앞두고 빈으로 왔고 이때 베토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베토벤에 대한 안토니의 감정이 숭배에서 사랑으로 변했다. 그녀는 베토벤에게 먼저 청혼을 했고, 베토벤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나 끝내 그녀 남편과의 교분을 저버리지 못했다. 안타까운 이별 후 베토벤은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15년 11월 그의 동생 카를이 사망했다. 동생은 병을 앓는 동안 자기 아들의 양육권자로 형인 베토벤을 지목했으나 사망 이틀 전 이를 수정하여 자기 처인 요한나와 형을 공동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평소 요한나를 싫어했던 베토벤은 단독 양육권을 가지기 위해 요한나와 5년간 지루한 법적 소송을 벌였으며 양육권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수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양육권자가 되고서도 정작 베토벤은 조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에게 극도로 집착하고 엄하고 혹독하게 대했을 뿐이다. 그리고 조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기존 교향곡 형식·장르 경계 무너뜨려

올해 초연된 뮤지컬 ‘베토벤’ 중에서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작곡하는 장면. [뉴스1]

 

 

그러나 무엇보다 베토벤을 힘들게 한 것은 그의 건강이었다. 베토벤은 1815년 이후 난청이 심해져 거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청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베토벤은 평생 복통과 설사를 동반한 복부 이상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1812년 이후 설사, 탈수, 피로, 식욕부진, 복통이 더 심해졌다. 이 때문에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알코올 섭취를 늘렸으나, 알코올은 복통과 설사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류머티즘도 복부 이상만큼 베토벤을 오래 괴롭힌 질병이었다. 류머티즘은 자가 면역질환의 일종으로 고열과 함께 관절을 중심으로 전신 염증을 일으켰다. 육체적 고통도 힘들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그 이상으로 심각했다.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후 그의 자존감은 크게 낮아졌고 고립감을 자주 느꼈으며 쉽게 분노했다. 좌절에 대한 내성도 아주 낮아져 자살 충동이 동반된 우울 삽화를 자주 겪었다.

 

이토록 많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베토벤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1819년 피아노 소나타 역사상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함머클라비어’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곡의 스케일이 장대하고 지적이면서도 기교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당시 피아니스트들은 아예 도전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같은 해 빈의 출판업자인 안톤 디아벨리가 자신이 작곡한 왈츠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써 달라고 위촉하자 처음에 거절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서 이번에는 피아노 변주곡 역사상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냈다. 바로 ‘디아벨리 변주곡’이다. 단순한 짧은 왈츠를 가지고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유머와 암시 가득한 다양한 변형을 펼쳐나갈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824년 베토벤은 그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 교향곡’을 내놓아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자신의 능력과 음악 자체가 갖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 간 최고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독창과 합창을 등장시켜 기존의 교향곡이 가지는 형식적 틀을 깨고 순수 기악곡 장르인 교향곡의 장르적 경계를 무너뜨린 획기적인 파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가사는 인류 화합과 인간 해방의 이상을 노래해 젊은 시절 그의 가슴을 뛰게 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송시였다. 바리톤이 실러의 송가로 환희의 주제를 선창하면 합창이 가세하면서 눈부신 환희의 세계를 노래하고 이 외침은 힘찬 행진곡으로 변해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다가 벅찬 감격 속에 마지막으로 ‘환희여, 찬란한 신의 불꽃이여’라는 외침으로 교향곡이 끝난다.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일까. 이 곡을 초연하고 그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었고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놀라운 성공, 깊은 좌절과 많은 고난, 그리고 재기의 환희로 이어진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인 인생이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 그에게 아무런 후회도 없었으리라. 희망과 환희의 메시지를 그보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전한 이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테니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