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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오도송(悟道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8. 17:36

[오후여담]

만해의 오도송(悟道頌)

문화일보입력 2023-06-08 11:37

오승훈 논설위원

툇마루에 앉으니 아직은 시원한 바람이 6월 한낮 따가운 볕을 막아주는 듯했다. 좁은 비탈길을 오르느라 차올랐던 숨도 잦아든다. 한양 도성의 북쪽,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고택 심우장(尋牛莊)이다. 수행을 소 찾는 일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안방과 사랑방 등이 일자로 배치된 정면 4칸의 단출하고 너무 소박한 한옥. 만해는 3·1 독립선언식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전전하다 1933년 벽산 스님과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이 마련해준 이 집에서 입적할 때까지 지냈다.

그 시절엔 인가가 드문 골짜기였을 게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함석 챙을 단 것으로 보아 북촌 등에 개축 바람이 불었던 1930년대 조선집과 크게 다를 바는 없으나, 그 모습만으로 신산(辛酸)했을 만해의 여생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일제는 더 목을 조여오고, 동지들은 하나둘씩 제 갈 길로 가고.

안방 자리에 걸린 목판을 보니 심란이 더했다. 만해가 출가한 지 10년이 되던 1917년 겨울에 백담사 오세암에서 견성한 뒤에 읊은 친필 시, 오도송(悟道頌)을 새겨넣었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남아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나그네 수심에 오래 잠긴 이가 몇이던가)

一聲喝破三千界일성할파삼천계(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飛설리도화편편비(눈 속에 복사꽃이 흩어져 날리네).

 

진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란다. 이후 만해는 독립운동과 창작에 열정을 쏟아냈다는데, 그 깨달음의 시가 예견이나 한 듯이 모진 현실이 그를 쉬 놓아주지 않았다.

오도송은 선승이 득도한 뒤 적는 선시(禪詩)다. 불교의 가르침을 시로 나타내는 것을 게송(偈頌)이라 하는데, 오도송도 그중 하나다. 고승들이 남긴 오도송들은 대체로 선문답 같지만, 몸으로 부딪친 수행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깨달음의 경지와 해석은 제각각이어도, 고투의 육필이란 점에선 한결같다는 말이다.

그 이치라면 사부대중이 아닌 속인에게도 저마다 오도송이 있을 법하다. 지쳐 쓰러진 날에 절로 나오는 한숨도, 시원한 바람이 오랜 고민을 날려줄 때 “하~” 하는 날숨도 일상의 오도송이 되지 않을까. 오는 6월 29일은 만해가 해방을 못보고 세상을 뜬 지 79년째 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