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인성과 현대문화

지역·지식 공동체 둘 다 무너지는 중...장막 뒤에 인터넷이 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6. 10:49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지역·지식 공동체 둘 다 무너지는 중...장막 뒤에 인터넷이 있다

이웃 간 벽 높이는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가 지역공동체 무너뜨리고
객관적 자세·숙의의 시간 없애는 가짜뉴스와 SNS가 지식공동체 허물어
12일은 제1회 ‘도서관의 날’, 독서 모임이 두 공동체 복원 첫발 될 것

입력 2023.04.06. 00:00업데이트 2023.04.06. 08:13
 

6년 전 독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온라인 독서 모임을 열었다. 팟캐스트 제작 팀원들과 함께 주제 도서를 읽으며 인터넷 공유 문서에서 감상을 나눴다. 가끔 토론도 벌였다. 처음에는 독서 모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팟캐스트 대본을 쓰기 위한 재료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한 일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 모임에 아무 기대가 없었다. 원래 ‘책은 혼자 읽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팀원들과 책 얘기를 하는 사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맨 정신에 서먹한 상대 앞에서는 좀처럼 꺼낼 수 없는 진지하고 심각한 화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깊은 밤 술자리에서도 털어놓지 않는 자기 사연을 고백하게 됐다.

 

가족에 대한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 치자. 소설이건 인문 교양서이건, 내용이나 수준이 어떻건 간에 그 책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 참석자들은 가족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말하게 된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말하게 된다. 책은 진지한 대화의 문을 열어주며, 일종의 무게중심이 되어 그 자리의 이야기들이 의미 없는 수다나 가십으로 궤도를 벗어나지 않게 막아준다.

 

이거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이후에도 그때의 경험을 에세이 몇 편에서 소개했고, 그 작은 독서 모임에서 내가 본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종종, 꽤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런 독서 모임들이 독서 생태계, 출판 생태계를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봤다. 요즘은 우리 문명 자체를 지켜줄 것 같다고 믿는다.

 

민주주의의 위기, 혹은 후퇴를 말하는 이가 많다. 진단도, 원인 분석도 쏟아져 나온다. 거론되는 요소가 워낙 다종다양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다. 양극화와 중산층 붕괴, 엘리트 세습과 포퓰리즘, 팬덤 현상과 정치 부족주의, 소셜미디어와 가짜 뉴스,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의 한계 등등.

/일러스트=이철원

 

나더러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한다면 두 가지 사건이 진행 중이라고 정리하겠다. 하나는 지역 공동체의 붕괴, 또 하나는 지식 공동체의 붕괴다. 민주주의는 지역 공동체와 지식 공동체 위에서 작동한다. 성숙한 시민은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지식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는 이웃의 운명에 책임을 느끼며, 그 운명에 영향을 끼칠 사안을 판단하고 토론할 때 자기 이익이나 기분이 아니라 지식과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그 시민도, 그런 시민이 설 자리도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양극화, 중산층 붕괴, 엘리트 세습 같은 문제는 지역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같은 지역에 살아도 자산 수준이 너무 다른 사람은 이웃으로 삼기 어렵다. 부자들은 자신의 집 주변에 높은 벽을 쌓고, 저소득층은 자기 동네와 건강한 유대 관계를 쌓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도시 빈민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며, 자신들의 주거지를 싫어한다.

 

포퓰리즘, 팬덤 현상, 소셜미디어, 가짜 뉴스는 지식 공동체를 허문다. 지식은 사실에 대한 존중과 객관적인 자세로 사물을 보려는 노력에서 시작하는데 가짜 뉴스는 노골적으로 이를 부정한다. 소셜미디어는 현상의 일부분만 취사선택해 퍼뜨리고 숙의의 시간을 앗아간다. 정치 부족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지식이 아닌 얄팍한 구호에 열광한다.

 

지역 공동체와 지식 공동체가 망가지는 데 공통적으로 인터넷이라는 배경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인터넷은 현실 대신 가상공간을 제공하면서 이웃이라는 개념을 축소하거나 왜곡한다. 익명 게시판에서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발언하고, 하이퍼링크들 속에 맥락은 사라진다. 지식은 짜부라져 ‘밈’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하면 지역 공동체와 지식 공동체를 함께 복원할 수 있을까. 개인이 시민이 되는 공간이 어디일까. 그런 장소를 사회 곳곳에 두고,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만나 지식을 중심에 두고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내 상상 속에서는 공공 도서관의 독서 모임이 그에 가장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도서관의 사명, 도서관의 미래가 주민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는 데 있다고 본다.

 

오는 12일은 제1회 도서관의 날이다. 개정된 도서관법에 따라 매년 4월 12일이 도서관의 날로, 그 뒤 일주일이 도서관 주간으로, 법으로 정해졌다. 전국 도서관들이 이 기간에 다양한 행사를 연다. 다음 주에는 하루쯤 집 근처 공공 도서관을 찾아보면 어떨까.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