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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마음으로 사진 읽기

[19] 주름진 보따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12. 17:31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9] 주름진 보따리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4.22 03:00
 
 
 
 
 
 
                                                                          김수강, ‘Bojagi 017′, 2004

어릴 적 멀리 살던 외할머니가 집에 오실 때면 양손 가득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울퉁불퉁하게 싸인 묵직한 덩어리들이 거실 한가운데 놓이고 나면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해체 쇼가 시작되었다. 엄마의 엄마가 보자기 속 주머니들을 끝도 없이 풀어헤치는 모습을 엄마와 내가 둘러 앉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름진 할머니의 손끝에서 단단히 묶인 매듭이 느슨해지고 이내 스르륵 열리던 순간은 짜릿했다. 펼쳐진 보자기에 남은 주름을 차곡차곡 손으로 쓸어가며 작은 네모로 접어 개던 엄마의 손끝을 어느새 내가 따라 한다. 그러고 보니 보자기는 어머니들의 이야기인가 보다.

 

김수강 작가는 일상의 사물들, 그중에서도 너무 익숙해서 귀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물건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그릇, 수건, 옷가지처럼 늘 집 안에 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게 되는 물건들이다. 필수품이지만 대체 가능한 물건, 매일 쓰다 보면 낡아져서 바꾸게 되는 물건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보자기’ 연작은 작가의 어머니가 장롱에 묻어 두셨던 자투리 천에서부터 손수건까지, 물건을 쌀 수 있는 재료들을 선택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손끝에 닿는 감각을 천천히 느끼면서 천을 마르고 매듭을 만들어 여미고 주름을 매만지는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주인공이 만들어진다.

 

아무리 잘생긴 배우를 모델로 한데도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선 머리와 화장, 옷 매무새를 꼼꼼하게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작가의 손길이 닿는 동안 물건은 사랑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작가는 손을 놓지 않았다. 검 프린트(Gum print)라는 초기 사진술을 활용해서 독특한 질감의 인화를 완성하기 위해선 빛에 반응하는 염료를 제작하고 빛을 쬐고 물에 씻어내기를 열다섯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돌아섰다간 다시 들여다보는 애정과 관심이 물건에도 이렇게 생기를 돌게 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랴. 오늘은 만나는 사람마다 눈에 진심을 담아서 ‘예쁘다’고 말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