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년 된 춘포 도정공장, 거대한 설치미술이 되다
조덕현 화가가 춘포에서 영감 받아 그린 ‘&memoir’, 260x588㎝. [사진 PKM갤러리]
녹슨 철대문, 어릴적 그림책에서나 본 듯한 단순한 형태의 건물, 내부 천장에 정교하게 얽히고설킨 목재, 삐그덕거리는 나무 바닥···. 그곳엔 평범하게 생긴 게 하나도 없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걸음걸음이 감탄의 연속이다. 108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곳, 키 큰 나무들 사이 햇살도, 비바람에 떨어져 풀밭에 뒹구는 모과 열매도 치밀하게 계획된 설치미술 같다.
익산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춘포면 옛날 도정공장 얘기다. 20여 년간 방치됐던 도정공장(정미소)이 최근 다시 숨쉬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버려진 기계 벨트를 활용해 만든 설치작품 ‘&rains’. [사진 PKM갤러리]
춘포 도정공장은 일제 강점기에 춘포 일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1883~970)가 1914년에 건립했다. 인근 지역에서 거둬들인 벼를 도정한 뒤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후에 정부, 민간 소유 도정공장으로 운영되다 1998년부터 방치돼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조덕현(65·이화여대 명예교수) 작가의 개인전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가 열리고 있다. 4월 23일부터 내년 4월 22일까지, 무려 1년에 달하는 전시 기간도 놀랍지만, 도정 기계가 있던 가운데 건물을 포함해 옛날 창고와 별채 등 2300㎡(약 700평) 총 7개 공간에서 열리는 규모가 남다르다.
조덕현의 ‘&history’를 보고 있는 김용택 시인. [사진 PKM갤러리]
방문객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독특한 공간과 공명하는 작품들이다. 마당의 풀과 나무, 춘포에 실제로 살았던 인물 이춘기(1906~1991) 이야기, 섬진강 시인 김용택(74) 시인의 시가 이곳에서 함께 작품이 되었다. 이른바 ‘장소맞춤형’ 개인전이다.
조덕현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며 근현대 시공간을 작품에 끌어들여 작업해온 작가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가상의 영화배우를 주인공으로 작업해온 연작으로 유명하다.
물, 흙과 함께 김용택의 미발표 시가 담긴 그릇. 시는 건물 안팎에 설치됐다. [뉴시스]
“지난해 7월 남도 여행 중 자동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우연히 이 동네에 들렀다”는 작가는 “비록 수탈의 역사로 시작된 건물이지만 100년의 세월이 쌓인 공간에 압도됐고, 목구조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듯이 작품을 손보고 살피며 선보이는 실험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4년 전 이 공장 건물을 사들이고 ‘이 공간을 어떻게 살려낼까’ 고민하던 서문근 대표 역시 “이곳을 ‘영감의 정원’으로 써보자”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작가는 이 ‘장소’를 모티프로 작품을 만들어갔다. 조 작가는 “장소의 역사성과 대결하는 대신 겸손하게 이 지역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렸다”고 말했다.
구석에 버려져 있던 기계 벨트는 색을 입고 4면의 커다란 수조 위에 무한 루프 형태로 천장에 매달렸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얽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형태의 설치작품이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북 익산시 춘포 도정공장.
일제 강점기 시절 찍은 이 동네 사람들의 단체 사진을 바탕으로 작가가 시공간을 변주해 장지에 그린 대형 그림도 고색창연한 공간과 하나가 되었다. 이곳의 역사를 아는 ‘어제’의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오늘’의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하다.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처음 알게 됐다는 춘포의 실존 인물 이춘기씨 가족도 이 안에 있다.
이춘기는 이 전시의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인물이다. 작가는 그가 30년간 쓴 일기(사본)를 빼곡히 붙여 높고 넓은 양면의 탑 벽과 같은 설치물을 완성했다. 이춘기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 해 다섯 남매를 키우며 정갈한 글씨와 그림으로 기록한 삶이 그 안에 있다. 이춘기가 남긴 글과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의 바통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가 이어받았다.
조덕현(左), 김용택(右)
작가는 시인의 허락을 받아 미발표 시들을 전시장에 펼쳤다. 투명한 아크릴판 2~3개를 겹쳐 고운 글씨체로 시를 새기고 공장에 남아 있던 기둥들 위에 하나씩 배치했다. 정원 곳곳 풀밭 위에도 화분 대신에 물과 흙과 시가 담긴 ‘시분(詩盆)’을 놓았다.
김용택 시인은 “종이책으로 시집을 발표해온 내가 이런 방식으로 내 시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오랜 건물과 자연 속에, 그리고 물그릇 속에 내 시가 들어가 있다. 몸과 마음에 뭐하나 걸리는 것 없이 내 시가 여기에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조 작가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지점에 김용택 시인의 시가 딱 맞을 것 같았다”며 “생전에 홀로 예술혼을 불태운 보통사람 이춘기와 평생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시를 쓴 김 시인을 하나의 이야기로 잇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여기서 내 시는 밥 같기도, 국 같기도 하고 너무 평화로운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기선 돌멩이도, 풀도, 햇살도 다 새로워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 살려낼 수 있을까 감탄했다”며 “아 진짜 예술이라는 게 이렇게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일이구나 했다”고 말했다. 춘포 공장에서 시작된 화가와 시인과의 협업은 완주군 오스 갤러리와 아원고택에서도 볼 수 있다. 내년 4월 22일까지.
익산=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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