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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8. 5. 13:06
전남 장흥 '정자 호핑투어'
탐진강 줄기 따라 줄줄이 누각 정자...편액 속 한시에는 풍류가 넘실넘실

전남 장흥의 탐진강 변에는 여덟 개의 누정(樓亭·누각과 정자)이 있다. 이름하여 탐진강 변 8 정자.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 탐진강 지류 부산천 물길을 끼고 있는 사진 속의 정자 동백정이다. 정자는 물가의 봉긋한 언덕 위 동백나무숲과 솔숲 사이에 숨은 듯 있다.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이 정자에서 대동계 집회를 하기도 했다. 동백정처럼 장흥의 정자는 주민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던 공유의 공간이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부산면 기동리 경호정 - 탐진강 수면이 거울처럼 펼쳐져

장동면 만년리 동백정 - 동백·소나무에 둘러싸여 별천지

장흥읍 송암리 사인정 - 생육신 김시습이 10년간 머물러

부산면 부춘리 부춘정 - 외지인에 허락된 목침과 선풍기

부산면 용반리 용호정 - 강가 벼랑에 효심으로 쌓아올려


유명하지 않고 늦게 지어졌지만

어디든 문이 활짝 열려 개방적

84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29개



휴양여행이 보편화하면서 ‘호핑 투어’는 이제 따로 말 풀이가 필요 없는 일상어처럼 쓰입니다. 호핑(hopping)은 ‘팔짝팔짝 뛰다’라는 뜻이고, 그렇게 팔짝거리며 뛰듯이 섬과 섬을 돌면서 해수욕과 스노클링을 즐기는 투어를 일컬어 호핑 투어라고 합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오래 머물거나 함께 나누며 깊이 교류하는 여행이 어려워진 시대. 전혀 다른 의미의 여행을 제안합니다. 탈 많고 번잡한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고요한 섬처럼 떠 있는 누각과 정자를 돌아보는 여행. 이른바 ‘정자 호핑 투어’입니다. 목적지는 전남 장흥. 탐진강을 끼고 늘어선 근사한 누각과 정자를 징검다리 딛듯 건너가는 여행입니다. 여름날 강바람 부는 서늘한 정자 마루는 적요하게 비어 있더군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명승은 아니지만, 정자에 걸린 편액의 몇 구절 시(詩)를 읽는 것만으로도 찬물로 세수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강물이 내려다뵈는 대청마루에 앉아 맞는 시원한 강바람도 좋았지만, 편액에 걸린 문장이 그려내는 수묵화 같은 풍경이 마음을 더 말갛게 씻어줬습니다. 시 몇 구절과 함께 탐진강 변 정자의 정취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 담양·봉화 말고, 장흥에 가는 이유

이름난 정자가 몰려 있기로는 전남 담양이 첫손으로 꼽힌다. 담양에는 ‘내로라’하는 정자가 많기도 하다. 우선 조선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꼽히는 소쇄원이 있고, 가사 문학의 중심 영역인 식영정과 송강정이 있다. 어디 이뿐인가. 주위에는 면앙정, 취가정, 환벽당, 부용당도 있다. 지도를 펴들고 정자를 건너다니기만 해도 한나절쯤은 금방 간다.

담양의 정자가 이름난 건 빼어난 건축미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절묘한 자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자에 깃든 인물의 지명도와 명성에 결정적으로 힘입는다. 담양의 정자는 사화와 당쟁 속에 권력에서 밀려나 낙향한 선비들의 것이었다. 정철, 양산보, 임억령, 고경명, 송시열, 김성원, 오희도…. 누명과 모함으로 죽고 죽이는 세상을 등지고서 정자의 자연에 들어 한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누각과 정자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단연 경북 봉화다. 봉화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누각과 정자는 103개다. 퇴락해 사라진 것까지 더하면 170곳을 헤아렸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긴다면 압도적인 1위다. 봉화의 누정은 다른 곳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봉화의 정자는 선비들이 모여 여흥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공간이었다. 풍류보다는 강학의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정자가 공유하거나 개방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기 집 담 안에 있는 경우가 많은 건 그래서다. 봉화의 정자가 많이 남아 있고 보존이 잘 된 이유는 분명하다. 다름 아닌 ‘내 집 안에 있어서’다.

이미 관광명소가 된 담양의 정자는 ‘누리는’ 정자가 아니라 ‘구경하는’ 정자다. 고택 담 안에 있는 봉화의 정자는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아 구경조차 쉽잖다. 하지만 장흥의 누정은 다르다. ‘정자 호핑투어’에 맞춤한 목적지로 장흥의 탐진강 변을 권하는 이유다.


# 장흥의 정자는 뭐가 다를까

장흥 탐진강 변을 따라 들어선 누각과 정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정리해보자. 첫 번째, 장흥에는 이름난 정자가 없다. 정자의 명성은 지은 이의 이름을 따라가는 법인데, 정자를 지은 이가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는 얘기다. 장흥에서야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이고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한 이도 있지만, ‘전국구’의 명성은 드물다. 두 번째 특징은 장흥의 누정이 대부분 늦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오랜 내력의 정자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유명하지 않고 늦게 지어졌다’는 것이 약점으로 느껴지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유명하지 않거나 늦게 지어져서 장흥의 정자는 개방적이다. 어떤 정자든 문을 다 활짝 열어뒀다. 그렇다고 정자를 내버려뒀다는 뜻은 아니다. 돌보지 않아 퇴락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후손들이 집안의 자랑으로 여기고 쓸고 닦으며 정갈하게 관리한다. 그러니 지금도 누구든 쥘부채 들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정자 툇마루에 앉아 강바람에 더위를 식힐 수 있다. 장흥의 정자는 아직도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장흥에는 지금도 정자가 세워진다. 마을마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 정자가 하나쯤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 정자 아래서 강바람을 쐬거나 목침을 베고 낮잠을 자면서 폭염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지은 정자이니 건축적 완성도나 문화재적 가치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법 격식을 갖춰 처마에 근사한 이름의 현판을 달았다. 기둥에 주련을 걸어둔 곳까지 있다. 장흥의 누정 수는 모두 29개. 사라진 55개를 합치면 장흥에는 84개의 누정이 있거나 있었다지만, 이 숫자는 소위 ‘내력 있는 것’들만 헤아린 것이다. 장흥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정자가 있다.






장흥에서 정자는 아직도 쓸모를 잃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정자가 새로 지어진 게 그 증거다.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관산읍 송촌리의 느티나무 노거수 곁에다 지은 정자 청풍정(淸風亭). 지은 지 30년쯤 됐다. 크고 기품 있는 탐진강 변의 정자 경호정의 널찍한 마루. 부산면 호계리 들판의 느티나무 아래 정자 용계유선정(龍溪遊仙亭). 청풍김씨 가문 소유의 정자 부춘정 아래 강변에 쓰여 있는 글씨. 큰 글씨가 龍湖(용호)고 작은 글씨가 桐江(동강)이다. 탐진강 물가의 배롱나무꽃 뒤에 숨어 있는 정자 부춘정.



# 정자에 올라앉아 시를 읽다


장흥에서 정자를 찾아간다. 어떤 순서가 좋을까. 탐진강을 끼고 있는 장흥의 정자는 물길을 따라 방향을 정하고 순서대로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경관의 순위로 순서를 정한다. 기준은 ‘가장 좋은 곳’부터다. 소개하는 곳 중 가볼 곳을 정하고 나서 지도 위에 점을 찍어 동선을 정해 찾아가 보면 좋겠다. 소개는 ‘좋은 곳부터’지만, 찾아갈 때는 ‘좋은 곳은 나중’인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탐진강을 끼고 있는 부산면 기동리, 봉긋한 언덕 위 솔숲에 경호정이 있다. ‘거울 경(鏡)’에 ‘호수 호(湖)’ 자를 이름으로 삼았는데, 과연 정자 앞의 탐진강 수면이 거울 같다. 강물이 내다보이는 마당 끝에는 기이한 형태의 괴석을 울타리처럼 박아놨다.

경호정은 장흥에서 명문가로 꼽히는 장흥위씨 집안의 누정이다. 정자를 들인 자리는 오래전부터 장흥위씨가 대대로 노닐던 곳이었다는데, 정자는 1912년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정자 건물은 1964년에 인근 마을에 있던 정자 ‘송암정’을 뜯어다가 그 자재로 다시 지은 것이라는데, 정자가 크고 단정한 데다 늘 쓸고 닦는지 마루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강변의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정자 주변의 거목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루에 앉아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정자 안에는 상량문과 중건기 시문을 적은 현판이 빼곡한데 뒷짐 지고 서서 그걸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경호정 현판에 후손이 적어놓은 시 한 구절을 읽는다. “…한여름 바둑 두는 소리, 선인이 사시는가 / 봄철 내내 꽃이 피니 벗들이 돌아갈 줄 모르네 / 늙은 말년 남은 생애 자연에 취하고 보니 / 인간사 늙어가는 세월을 도리어 잊겠구나.” 과연 그럴까. 정자에 깃들어서 자연에 취해 바둑을 두면 늙어가는 세월을 잊을 수 있을까.


# 정자에서 세한도를 생각하다

경호정과 우열을 가리기 쉽잖은 곳이 장동면 만년리의 동백정이다. 앉은자리의 풍류나 운치로 치자면 물가의 봉긋한 언덕 위 숲 한가운데 숨은 듯 들어선 동백정이 단연 으뜸이다. 동백정은 지금으로 치면 부총리급쯤 되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세조의 왕위찬탈 직후 낙향해 처음 지었으니 그 내력이 자그마치 550년에 달한다. 그가 내려온 뒤 지역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자 정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후에 몇 번을 고쳐 지었고 1986년에 마지막으로 중수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시문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동백정이 선비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자는 때로 주민들의 대동계 집회장소나 별신제의 장소로 쓰였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쓰는 ‘마을 정자’ 역할을 한 셈이었다. 부총리급 퇴직 관료가 지은 정자에 마을 주민 누구나 무시로 드나들었다. 이쯤 되면 장흥의 정자에는 개방적 전통이 있었고, 그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동백정은 이런 내력과 역사보다는 앉은자리의 빼어남이 가장 돋보이는 정자다. 정자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맑은 냇물을 가둔 보(洑)나, 계단을 딛고 오르는 길의 동백나무며 아름드리 소나무가 이룬 울창한 숲의 어둑한 기운도 훌륭하다. 정자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노라면 어디 먼 외딴 별천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바깥에서 동백정을 바라보는 때는 동백숲에 붉은 꽃이 낭자하게 떨어지는 겨울이 제격이지만, 정자 마루에 앉아 바깥을 보는 경치는 지금 같은 여름이 최고다.

내력이 오랜 만큼 정자에는 기문과 시가 빼곡하다. 그중 시 한 구절을 읽는다. “야윈 대(竹)와 성긴 솔(松)도 감히 앞설 수 없으니 / 정자에 오르면 매번 세한(歲寒)의 절개를 생각하네 / 주인만이 꽃 사이에서 술 취해 있는데 / 객은 다투어 안개 서린 잎에 시를 쓰네/….”


# 산과 사람이 서로 이름을 바꾸다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장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둔했던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정사품 벼슬이니 지금으로 치면 부이사관급 공무원쯤 될까. 사인(舍人)이란 벼슬자리에 올랐던 김필이다. 장흥으로 내려온 그는 장흥읍 송암리의 흰 바위 벼랑으로 우뚝 솟은 설암산 아래에 정자 사인정을 짓고 은거했다.

장흥읍에서 탐진강 하류 쪽 탐진 2교와 평장교 사이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 있는데 정상이 상어지느러미 형상의 흰 바위 벼랑으로 이뤄져 있어 설암산이라고 불렸다. 설암(雪巖)은 ‘흰 눈이 쌓인 듯하다’는 뜻이다. 이 산이 인상적이었던지 김필은 설암을 자신의 호로 삼고, 산 아래에 정자를 지어 자신이 지낸 벼슬 이름을 따 ‘사인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 뒤로 산정의 바위 벼랑 이름이 ‘사인암’이 됐다. 산 이름은 낙향한 선비의 호가 됐고, 선비가 지낸 벼슬이 산의 이름이 됐다. 산과 바위, 그리고 거기 깃들인 이가 서로 이름을 주고받았던 셈이다. 사인정에는 정자뿐만 아니라 신도비와 함께 영정각, 설암각 등의 건물이 있어 다른 정자보다 규모가 제법 크다.

사인정에는 여러 인물이 다녀갔는데, 그중 두 사람의 자취가 뚜렷하다. 한 사람은 생육신의 한 명인 김시습.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단종이 묻힌 북쪽을 향해 절했다는 김필을 찾아온 김시습은 여기 사인정에서 10년을 머물다 갔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사인정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 정자 뒤편 벼랑에는 김필이 새겼다는 단종의 얼굴 암각화가 흐리게 남아 있고, 정자 주변 바위무더기에는 백범이 쓰고 갔다는 ‘제일강산(第一江山·사진)’이란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사인정의 방문 양쪽 기둥에는 김필이 세종대왕과 번갈아 문장을 쓴 연구(聯句)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연구란 여러 사람이 한 구(句)씩 지어 이를 모아 만든 한 편의 시를 말한다. 세종대왕의 글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먼저 세종대왕이 쓴 글. “時雨半晴人半醉(시우반청인반취·비가 내렸으나 반만 개었으니 민심도 그러한가).” 짐짓 떠보는 이야기. 이를 받아 김필이 썼다. “暮雲初捲月初生(모운초권월초생·날이 저물어 구름이 일었지만 달이 새로 뜨니 근심할 게 없습니다).”

주련 말고 편액으로 걸린 시도 여럿이다. 그중 한 구절을 읽는다. “…사인(舍人)이 떠난 뒤 빈 정자만 우뚝한데, 뜰 앞 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 나그네만 듣고 있네.” 지금 사인정에서 느끼는 감상이 딱 이렇다.


# 높은 벼슬과도 안 바꾼다는 부춘정

200년 전쯤 창건한 청풍김씨 가문의 정자인 장흥 부산면 부춘리의 부춘정도 빼놓을 수 없다. 부춘정이야말로 가문의 후손들이 보석처럼 아끼고 보전하고 있는 정자다. 비석과 중수기에 후손들이 남겨놓은 감탄과 찬사를 읽다 보면 후손들이 정자를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래 부춘정 자리에는 남평문씨 가문의 정자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공신인 문희개가 벼슬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내면서 여기 청영정이란 정자를 지은 것이었다. 청영정을 사들인 청풍김씨 가문은 그 자리에다 1838년 부춘정을 지었다.

치렁치렁 꽃을 피운 배롱나무 뒤에 숨어 있는 부춘정은 고요한 강물과 연꽃 피어나는 습지가 어우러진 탐진강 구간을 끼고 있다. 정자는 한눈에 확 휘어잡는 비경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머물면 머물수록 은근하게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운데 방을 들이고 사방을 툇마루로 두른 정자 마루에는 선풍기와 목침이 있다. 춘정마을과 딱 붙어 있어 외지인들을 꺼릴 만도 한데 마을 주민은 물론이고, 외지인들도 누구나 올라앉아 더위를 피해갈 수 있도록 개방해놓았다.

부춘정 아래 강변 바위 곳곳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다퉈 글을 새겼을 정도로 부춘정 일대를 명승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글씨가 강물에 반쯤 잠긴 바위에 횡서로 흘려 쓴 ‘龍湖(용호)’다. ‘용이 사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桐江(동강)이라 적혀 있다. 동강은 부춘정을 지은 김기성의 호다. 가장 풍류 넘치는 글씨는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곳이 이 땅뿐이다)’이다. 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이 장흥 천관산을 유람한 뒤에 부춘정에 들렀다가 새긴 글이라는데, 삼공이란 중국 송나라 때 황제를 보좌하던 높은 벼슬로, 이 문장은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예찬하는 ‘조대(釣臺)’라는 송나라 때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 장흥의 정자, 쓰임새를 잃지 않다

부산면 용반리의 용호정은 들어선 자리가 빼어난 정자다. 부춘정과 경호정 사이 탐진강 변의 깊은 소를 이룬 강가의 벼랑에다 지었다. 낭주최씨 가문 소유의 이 정자는 날마다 강 건너 할아버지 묘에 성묘를 다니던 아버지가, 비가 오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본 아들이 1828년에 지은 정자다. 학문을 논하거나 시를 짓기 위한 정자가 아니라 효심을 기둥 삼아 지은 정자다.

강 건너 할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정자를 지었으니,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위로하는 정자’이자,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를 뵙는 정자’인 셈이다. 벼랑 안쪽에 축대를 쌓고 들인 정자의 주위는 온통 나무의 초록이다. 마을이 멀고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느긋하게 정자에 걸터앉아 한가한 부채질로 땀을 식히며 쉬어가기에 제격인 곳이다.

탐진강 변에는 이곳 말고도 정자가 여럿이다. 장흥읍 시가지에서 가까운 강변 언덕 위에 창랑정도 있고, 장흥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탐진호가 바라다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영귀정도 있다. 폭우로 길이 끊기고 덤불이 길을 막는 바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퇴락해 허물어져 가는 독취정도 있다. 장흥의 누정이 어디 강변에만 있을까. 천관산 아래 숲으로 둘러싸인 장흥위씨 가문의 제각인 장천재도 본래 시문을 교류하던 정자 역할을 했다.

관산읍 송촌리의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청풍정(淸風亭)이나 용계면의 용계유선정(龍溪遊仙亭)은 근래에 지은 정자이지만, 운치가 모자라지 않다. 이런 정자까지 합치면 장흥의 정자는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장흥군에 무더위쉼터로 지정된 유선각(遊仙閣)이란 이름의 누각이나 정자만 해도 62개나 되니 말이다. 장흥의 정자가 다른 곳의 정자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오래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장흥의 정자에는 아직도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반들반들한 마루가 있다. 볼거리로 박제되지 않은, 아직도 여전히 쓰임새를 잃지 않은 ‘현역’이라는 것이다.


■ 장천팔경과 바위에 새긴 글씨

전남 장흥의 천관산 아래에 온통 짙은 숲으로 둘러싸인 장흥위씨 문중의 제각인 장천재가 있다. 장천재 앞에는 계곡이 있다. 장천교 다리 아래서 차고 맑은 못 영은천까지 짧은 협곡에는 존재 위백규가 명명한 ‘장천팔경’이 있다. 서늘한 계곡을 거닐며 팔경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바위에 새겨놓은 풍류의 글씨를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에 장천동문(長川洞門), 활수연(活受淵), 월영담(月影潭), 정류조(淨流조), 세이천(洗耳泉), 탁영대(濯纓臺) 등의 글씨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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