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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춘 사진집 『고택문화유산 안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4. 12. 00:06

안동 고택·선비 정신, 시간 멈춘 듯 켜켜이…

[중앙선데이] 입력 2021.02.06 00:20 수정 2021.02.15 15:10

이동춘 사진집 『고택문화유산 안동』

사진 작가 이동춘. 박종근 기자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기와 담벼락 너머로 시간이 묵직하게 얹혀진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두꺼운 양장본 표지를 넘기는 순간, 담 너머 세상이 펼쳐진다.

수백 년 세월을 품은 경북 안동의 고택과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집 『고택문화유산 안동』이 최근 발간됐다. 한국유네스코 안동협회가 펴낸 이 책에는 사진작가 이동춘(61)씨가 안동의 고택 107곳을 방문해 찍은 사진 260장, 그리고 한옥 연구가 배영동·유영모·류수현씨가 고택에서 만난 61명의 인터뷰 기록이 담겨있다. 책의 편집을 시작한 건 지난해 6월이지만 책에 담긴 고택 사진들은 이동춘씨가 홀로 안동을 누볐던 15년간의 결과물이다. 덕분에 사계절이 녹아든 고택 풍경과 1년에도 수십 번씩 행해지는 안동의 귀한 제례 문화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사진집 『고택문화유산 안동』. [사진 이동춘]

 

“처음엔 정말 막막했어요. 사진을 찍으며 ‘이건 왜 이런 건가요?’ 물어도 대답해주는 분들이 없었어요. ‘남의 집 제사에 어디 여자가 끼어드느냐’는 호통만 수시로 들었죠. 약이 올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남자 옷만 입고 다녔어요. 그렇게 4~5년을 열심히 드나들며 인사를 드리니 그때서야 어르신들이 마음을 여시더라고요.”

도산서원의 향사에 선 돼지를 두 토막 내서 위패를 모신 퇴계 이황 선생과 제자 월천 조목 선생에게 각각 올린다. [사진 이동춘]

 

안경만 빼면 조선시대 풍경이라 해도 믿을 만한 제례 풍경을 촬영하려면 카메라는 제사상과 위패 뒤에 서야 한다. 여자가, 게다가 외지인이 그 자리에 서서 촬영을 할 수 있었던 건 15년을 진심을 다해 안동을 찾았던 이 작가의 진정성이 어르신들에게 통했다는 얘기다.

소호헌 누마루의 눈썹 천장 모습. 평서까래, 선자서까래, 현판 글씨까지 한옥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사진 이동춘]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 근무했던 이 작가는 전통과 장인 등을 주제로 한 촬영을 전담하면서 자연스레 한국 고유의 건축 미학이 담긴 고택과 그 안에 서려 있는 선비 정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독일·헝가리·미국 주재 한국 문화원에서 열렸던 사진전 주제도 ‘선비 정신과 예를 간직한 집, 종가’였다.

군자마을 후 조당 사랑채의 들어열개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앉아 즐기는 차경. [사진 이동춘]

 

“누군가 지금까지 작업해온 사진을 한 단어로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결국 ‘안동’이에요.”

그가 안동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옛 조리서 『수운잡방』이 발견된 설월당(雪月堂)의 종손이 돌아가시기 전 아들에게 전했다는 유언이었다.

“‘나는 이 집을 비운 적이 없다. 부득이 외출할 때면 사돈의 팔촌이라도 앉혀 놓았다. 그렇게 조상에게 물려받은 이 집의 종이 한 장 훼손되지 않게 지켜서 너에게 물려주니 너도 이 집을 그렇게 지켜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왜란, 호란, 일제 강점기, 6·25를 겪으면서도 고택들을 지켜냈던 안동 선비들의 꼿꼿한 정신을 제가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경당종택 불천위 제사를 위해 종손이 준비하는 땅콩 고임. 바늘로 땅콩을 찍어 올린 다음 밀가루 풀로 고정시킨다. 30㎝ 정도 고이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사진 이동춘]

 

마침 설이 코앞이라 안동 여러 종가에선 어떤 음식들을 준비할까 궁금해졌다. 이 작가는 “예를 들어 상에 올리는 30cm 높이의 고임음식은 종손이 직접 ‘한 알 한 알’ 쌓아서 만드는 것”이라며 “밤·잣·땅콩 등 종류별로 하루에 1개씩 밖에 못 만들 만큼 종가 음식은 정성 그 자체”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이 소중한 고택들이 몇십 년 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걱정이 많다. “낡아서 여기저기 보수를 하는데 행정기관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시멘트를 바르고, 플라스틱 기둥을 세우며 엉터리로 ‘땜빵’ 하는 통에 고택들이 몸살을 치르고 있어요.”

하회마을 서애 종가에 전해오는 음식 ‘중계(中桂)’. 서애 류성룡이 생시에 즐겨드신 거라 불천위 제사상에도 올린다고 한다. [사진 이동춘]

사진집 출간으로 한시름 놓았겠다 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곧 퇴계 선생의 서세 450주년 불천위 제사가 있어요. 그때 안동에 꼭 있어야 해요.”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