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시의 정의’는 무수히 생성되고 소멸한다. 지구는 하나이지만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 수 만큼의 세계가 존재하듯이 ‘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시인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똑같은 지문, 똑같은 음성을 가진 사람들이 없듯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가 펼쳐 놓은 다양한 층위는 더욱 간절하게 강고한 시의 도그마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시를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나의 시가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기를 욕망하는 넋두리라고 고백한다.
오 십 년 동안 써온 ‘수 천 편의 시들이 과연 시가 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懷疑와 두려움은 아무리 쌓아도 탑이 되지 못하는 난국 難局의 증명이기도 하지만 시를 떠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이데아에 다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늘 새로움을 향한 도전을 거듭하게 만들었던 것. 시를 쓰기 위한 – 시의 원형에 다르고자 하는 열망-은 시지프스의 형벌을 감내하게 만들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바위(시)를 정상을 향해 밀어올리는 일이 괴롭지만은 않았던 것. 시인은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섬기는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이 세계의 경이 驚異를 내 삶의 에너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시인으로의 입신立身이 무엇인가? 전인미답의 독특한 세계관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다는 것이 현세의 양명揚名에 몰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글을 쓰면서 내게 그러한 시론詩論이 있었나 자문해 본다. 오직,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포착해 내는 것, 그 포착된 날(生) 이미지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로 남기는 것이 그동안의 시작 詩作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시작 행위는 아무리 시가 허구이고 상상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시의 생산자인 시인의 정신과 삼투되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림이나 음악을 들으면서 화가나 음악가의 인격을 가늠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시는 항상 문여기인 文如其人의 의식 속에 잠겨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가 시인의 삶, 특히 일상의 행동거지와 온전히 결부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시인이 시로 추구하는 길과 삶의 맥이 닿아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음을 어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의 시 쓰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몇 년 전 모 잡지에 시 뒷글로 쓴 아래 글로 충분할 것 같아 전문을 옮긴다.
*변방의 즐거움
시인에게 시를 쓴 연유를 묻는 것이 대단한 실례인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꾸로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이러저러 군말을 붙이는 것 또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한 마디로 시는 시인의 정신이 변태變態한 것이다. 시인의 심층에서 유충이나 애벌레로 꿈틀대던 불온한 생각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것! 그래서 ‘시인은 오직 시로 말한다’는 금언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외로운 존재라고 하는 것은 변태한 자신의 정신이 오직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는다는 것이고 일상적 소통의 언어를 벗어난 상태에서, 언어의 그물(언전言詮)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의 거처는 변방邊方이 마땅하다. 인과에 얽혀있지 않은 공간, 세속의 구심력이 작동하지 않은 그 경계쯤에 서 있는 것. 그쯤에서 눈 먼 자아를 바라보고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한 톨 먼지만한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 하는 것. 눈동자가 흔들리고 슬픔이 깔려 있는 허무의 끝까지 가보는 것은 그 무엇에게도 포획되지 않겠다는 아나키스트의 숙명이자 숙제라고 나는 믿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사랑을 믿기에는 너무 영악해져버린 나는 가끔 내가 아름다워지기를, 사랑으로 충만된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바로 그 때, 시는 내게로 온다. 절망을 깨우치지 않으면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세상의 냄새나는 부조리와 불안과 조우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랑의 고귀함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세속화된 나와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본심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내게 있어서 변방은 명예와 권력의 중심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 나온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를 유배한 자유의 땅이다. 나는 이곳에서 소외와 망각을 배우고 절망을 사육했다. 나의 시는 소외와 망각이 그리고 절망이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노래가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 이 글은 월간 『우리시』 2016년 10월호 신작 소시집에 붙인 시작 메모이다.
** 모던포엠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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