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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내 생각

나의 안부를 묻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4. 21. 14:51

나의 안부를 묻다

나호열

 

 

지난 삼 년은 길고 길었다. 불쑥 우리 앞에 괴물로 튀어나온 역병이 공포와 불안의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내몰았다. 세상은 단절되고 복면의 시간이 서로를 외면하게 하는 시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느덧 황혼이 저만큼 고개를 내밀고 그리움과 외로움마저 잊어버린 채로 꽃이 피었다.

고희라 하니 안타깝고 종심이라 하니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나이에 시집『안부』는 지난 사십 년의 시업을 축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섬기는 사람으로 살고자 애써왔는데, “말에 말을 덧붙이는 중층의 언어의 두께도, 심오한 의미의 무게도 담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가볍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의 시들은 가벼워져 가는 언어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어들은 없어진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가벼워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황정산)말에 또 한 번 심장이 움찔거린다.

 

문득 “울타리가 없는 집이라고 오랜 친구가 나를 일러 그리 불렀다. 무리(無籬)라 읽어야 마땅한데 그는 나를 늘 무이라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무리(無理)와 무이(無二) 사이에서 할 말을 잃었.”(「자서」)음을 떠올리면서 가시 돋친 독설들을 버리고 각주구검(刻舟求劍)의 헛된 지식을 잊어버리고자, 그리하여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으려는 몸짓만 남기고자 했던 지난 세월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한 뼘 땅 뙈기 없이 살아 왔지만 신천지를 찾아 헤매는 것 보다 내 뒤에 남는 세월의 흔적을 더듬다보니 “가시밭길 걸어도 / 멈출 수 없는 것은 / 뒤돌아보면 살아온 날들이 / 꽃밭이 되어 / 따라오기 때문이”(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2」)었기에 희망을 가졌고, “벌거벗어도 보일 것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는다 해도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는 휴지가 되기로 한다 나는 당당한 나무의 후생”(「후생」)으로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남보다 앞 서 가기 보다는 “누군가의 뒤에 서서 배경이 되는 ...중략 ...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풍경과 배경」)는 나만의 오르가슴이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 내 몸무게를 원망하는 절망의 순간을 이겨내게 했던 것이다.

 

결코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모든 사람이 착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악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가끔씩 착하고 가끔씩 어리석게도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분노와 서툰 증오에 휩싸이지 않는 “이제는 무너질 일만 남은 고독한 사내”가 될지라도 “심장의 박동이 묵정밭에 푸른” (「탑이라는 사람」) 탑으로 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오직 흙과 불의 혼으로 기억하는 나만의 오르가슴이 피어나고 있”(「화병」마지막 부분)을 때, 증오와 분노의 모순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은 찾아오지 않겠는가!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물의 신비한 체온일 뿐이다

 

- 「사랑의 온도」 마지막 부분

 

눈부신 봄날이다. 어느 사람은 부고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우리는 거짓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꽃을 찾아 헤맨다. 가까이 있어 안부를 묻지 않고, 역병의 탓으로 안부를 묻지도 않는다. 시는 누구에게 보내는 안부인가? 어쩌면 시는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일기이며, 자신의 행방을 묻는 안부가 아니던가?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 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을

이제야 귀가 열리는 밤

안부를 기다리던 사람이

내게 안부를 묻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구불구불

부끄럽게 닿는다

 

 

- 「안부安否」전문

 

다산(茶山)의 맏형 정약현은 그의 당호(堂號)를 수오당(守悟堂)이라 하였다. 산천은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차지하려고 허둥대다 세상을 등진다. 수오(守悟)는 무엇인가?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마음은 형체도 없이 탐욕을 좆아 시간을 탕진한다. 끝끝내 나에게 안부를 묻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 내게 남은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랑해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해서

너무 많은 말을 배웠다

 

-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전문

 

 

계간 『시에』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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