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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소소한 겨울산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 28. 18:03

혹한의 호수...물안개는 '치유의 수묵화'를 그려냈다

혹한의 이른 새벽. 춘천 소양강의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오리떼들이 화선지에다 수묵화로 그려 넣은 것처럼 날아올랐다. 수은주가 영하 24도까지 곤두박질친 날이었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간이 오래 계속되고 있습니다. 감염확산이 순순히 수그러들어 거리 두기가 완화되고, 그렇게 기대처럼 좀 상황이 나아진다면 여행은 다시 시작될 수 있겠지요. 저마다 기준이나 시기는 다르겠지만요. 조심스럽게 여행이 시작될 때, 맞춤한 여행지로 추천하는 곳이 춘천입니다. 수도권에서 거리도 멀지 않고, 아직은 좀 부담스러운 숙박 없이 당일로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숙박을 한다면 여행이 좀 더 만족스럽겠지요.

거리와 입지만 좋은 게 아닙니다. 사실 춘천은 압도적인 대표 명소가 없습니다만, 품고 있는 스펙트럼이 참 다양해서 오랜 결핍의 열망을 고루 채워줍니다. 춘천에는 그동안 여행자들이 크고 화려하고 근사한 것들만 찾아다니면서 놓쳤던 곳이 있습니다. 오래된 추억으로 버무려진, 온기가 느껴지는 곳들입니다. 발을 묶어 제 욕망을 돌아보게 해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이런 곳을 비로소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런 곳들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 춘천을 여행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 좋은 안내가 좋은 여행을 만든다

널리 알려진 관광 명소만 간다면 관계없지만, 화려하고 근사한 것들 뒤에 숨어있는 공간까지 두루 찾아가는 여행을 하겠다면 전적으로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경험으로 미뤄보면 지역의 정서와 매력이란, 남들 다 가는 닳고 닳은 관광명소가 아니라 ‘꼭꼭 숨어있는 곳’에 있다. 초행의 여행자들이 그런 곳을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좋은 안내자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다. 공간에 켜켜이 깃든 시간과 이야기들을 뒤적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같은 공간도 보는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된다. 춘천 가는 길. 신발 끈을 미처 묶기도 전에 안내자의 역할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춘천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여행 가이드북 한 권을 추천하기 위해서다. 책 제목은 담박하다. ‘춘천.’ ‘대한민국 도슨트 : 한국의 땅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춘천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 춘천 토박이 소설가 전석순이 지었다.

그가 여행자들을 위해 쓴 책에는 춘천의 다양한 모습이 있다. 세탁소 딸린 단칸방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춘천부터,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달뜬 청소년기의 춘천 그리고 그 시절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지금’의 춘천이 모두 다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공간’이다.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공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춘천이란 장소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훌륭하게 담보하고 있다. 그게 이 책이 특별한 이유고, 여행자들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좌판을 깐 입담 좋은 상인처럼, 그는 춘천의 공간을 하나씩 꺼내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이 소개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여행자들의 발길로 붐비는 번듯한 곳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오래되고, 때 묻은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추억의 갈피에서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지금과는 달랐던 과거의 삶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춘천이 고향이 아니라도, 이야기 속의 무대가 춘천이 아니라 해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춘천의 중심에는, 춘천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육림고개’가 있다. ‘육림’은 춘천의 향토기업. 일제강점기 조선임업개발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모여 1955년 묘목 사업과 화물 운송업으로 시작해 육림연탄과 육림택시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육림’을 대표하는 건 지금은 문 닫은 ‘육림극장’이었는데, 극장을 끼고 이어지는 노점 좌판이 깔린 긴 언덕길을 ‘육림고개’라고 불렀다.

육림고개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다. 전석순이 책에 소개하는, 어머니에게서 들었다는 육림고개의 목격담은 감동적이다. 육림고개는 늘 인파로 붐볐는데, 육림고개의 과일 장수가 사과를 떨어뜨려 언덕 아래로 사과 알들이 주르륵 굴러갔단다. 지나던 행인들이 너도나도 사과를 주워 언덕을 오르는 이들에게 쥐여 줬고, 그 사람이 주인에게 돌려줬다는 얘기. 사과를 돌려받은 주인은 ‘마음이 고맙다’며 행인에게 사과를 도로 내밀었고, 행인은 ‘이것도 인연’이라며 포도와 배를 샀다고 했다. 가난하고 어려웠으되 모두 순박하게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 춘천의 겨울 추위와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곳. 50m 높이로 얼어붙은 강촌의 구곡폭포다. 겨울이면 폭포에는 빙벽 등반을 하는 이들로 가득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폭포 출입이 통제돼 얼음기둥으로 홀로 서 있는 폭포를 볼 수 있다.

# 육림고개, 다시 살아나다

신도시가 개발되고 복합영화관이 문을 열고, 대형할인점이 들어서는 속도를 육림고개는 따라잡지 못했다. 육림극장이 문을 닫고 난 뒤 육림고개의 상권은 빠르게 무너졌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육림고개가 기적처럼 되살아난 건, 춘천시의 도시재생사업 덕이었다. 2015년 막걸리촌 특화거리 조성, 2016년 청년상인 창업지원사업, 2017년 청년몰 조성사업이 이어졌다. 오래된 건물과 누추한 골목에 파스텔 톤의 감각적인 상점들이 들어섰고 세련된 커피숍, 식당이 새로 문을 열었다. 작지만 개성 넘치는 공방과 갤러리도 자리를 잡았다. 한때 도시를 대표했던, 분주한 골목시장이었던 육림고개는 오랜 쇠락의 시간을 건너와 특색있는 점포와 식당들이 들어선 춘천에서 가장 ‘핫’한 골목이 됐다.

춘천의 육림고개는 다른 도시의 도시재생 공간과는 풍경이 조금 다르다. 가장 크게 다른 건 ‘뉴트로’를 표방하는 젊은이들의 감각적인 점포와 누추하고 오래된 진짜 옛날 가게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란서 홍차’를 파는 키치 풍의 상점 곁에 참기름을 짜서 빈 소주병에 담아 파는 ‘일미 기름집’이 있고, 1980년대 풍을 재현한 경양식집 옆에 오래된 올챙이국수 식당이 있는 식이다. 브라타 치즈 샐러드와 수플레 디저트를 내는 레스토랑과 튀긴 강냉이를 파는 구멍가게가 나란히 영업한다. 옛것과 오래된 것이 그대로라면 ‘쇠락’이고, 새것과 젊은 것만 있다면 ‘작위’다. 춘천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의 육림고개는 옛것과 새것의 딱 중간쯤에 있다. 이곳이 자연스러운 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장사하는 청년상인들과 전통상인들의 협업에 힘입은 것일 테다.

그런데 춘천의 새로운 명소가 된 육림고개가 코로나19로 다시 텅 비었다. 육림고개를 찾아간 날이 평일이었는데, 점포의 절반쯤이 문을 닫았다. 그 덕분에 이전에는 줄을 서서 대기표를 받아야 했던 육림고개의 이름난 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대기 줄이 길기로 이름났던 ‘경양식 1988’에도 점심시간에 손님이 딱 한 테이블이었다. 무료해진 젊은 식당 주인이 30년 전쯤 어머니가 홍천에서 경양식당을 했던 시절 이야기를 꺼냈고, 이어 식당 안의 오래된 전축을 자랑하다가 LP판을 올려놓고 가수 김정호의 노래 ‘하얀 나비’를 들려줬다.


소양강의 물안개가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의 노랗고 붉은 기운을 받아 산불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소양호와 춘천호, 의암호에 둘러싸인 춘천은 안개가 끼는 날이 잦다. 조금만 운이 좋다면 이른 아침 강변이나 호반에서 몽환적인 경관과 맞닥뜨릴 수 있다.



# 춘천에서 만나는 유년의 과거 풍경

춘천에서 박제된 공간으로 남아 추억을 보여주는 곳이 육림고개에서 걸어서 15분쯤이면 닿는 약사동의 망대골목이다. ‘망대’란 산동네 마을 화재감시를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세운 망루. 망루 옆에는 폭이 두 뼘도 안 되는 골목에 다닥다닥 처마를 붙여 지은 집들이 빽빽하다. 시간이 미처 데려가지 못한 풍경. 기이하다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30년 전쯤 도시 변두리 달동네의 남루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망대골목 주변은 말끔한 아파트촌이다. 망대골목도 재개발사업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늘어난 사업비에 몇몇 주민들이 개발동의를 철회하면서 수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게 됐다. 일부가 철거되고 골목도 옹색해져서 뭐 이렇다 할 볼 것은 없지만,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이 간혹 망대골목을 찾아든다. 망대골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중년이 보고 싶어 했던 건 춘천의 골목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는 30년 혹은 40년 전쯤의 서울 변두리, 봉천동이나 신길동쯤의 달동네가 아니었을까.

다시 극장 얘기로 돌아가 보자. 춘천에는 육림극장 말고도 수많은 극장이 있었다. 소양극장, 중앙극장, 신도극장, 제일극장이 육림극장 이전의 아버지나 형님뻘이었다면 육림극장 이후에 문을 연 남부극장과 문화극장은 동생 격이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춘천의 인구를 다 긁어 세어봐야 12만 명이던 시절, 춘천의 극장 한 해 누적 영화관람객 수가 100만 명이 넘었단다. 그때 춘천은 ‘영화의 도시’였다.

영화관은 문을 닫았지만, 문 닫기 전의 모습을 여태 간직한 극장도 있다. 1955년 문을 연 춘천 최초의 극장이었던 ‘소양극장’을 1990년 신식으로 단장해 개관한 ‘피카디리극장’이다. 피카디리극장은 2011년에 폐관했지만 아직도 ‘피카디리’라는 극장 간판을 걸고 있는 영화관 건물이 폐허처럼 남아있다. 쓸모를 찾지 못해서일까. 소유권 분쟁 문제일까. 이달 초 춘천시는 적잖은 예산을 들여 피카디리극장 한쪽 벽면에다가 춘천의 상인 15명의 전신을 그려 넣은 벽화를 완성했다. 도시 브랜드를 활용한 공공미술작품을 문 닫은 극장 담벼락에 그려 넣었으니 아직까지 춘천사람들에게 피카디리가 영 잊힌 것은 아닌 듯하다.


# 혹한과 안개, 얼음꽃으로 피다

이번에는 겨울의 춘천, 그러니까 춘천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얘기해보자. 춘천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춘천 동쪽의 대룡산에 올라보면 소쿠리 형상이 뚜렷하다. 분지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겨울철 최저기온의 도시로 철원과 함께 춘천이 자주 거명되는 이유다. 철원도 마찬가지로 분지 지형이다. 혹서의 여름과 혹한의 겨울을 가졌다는 건 말하자면 겨울을 겨울답게, 여름을 여름답게 건너가는 도시라는 얘기다. 마침 춘천을 찾은 날도 수은주가 영하 24도까지 내려갔다.

쩡쩡 언 춘천의 혹독한 겨울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구곡폭포다. 강촌의 구곡폭포 관광지 입구에서 20분쯤 걸어 들어간 봉화산 자락 50m 높이에 걸린 구곡폭포는, 겨울이면 꽝꽝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기둥을 이룬다. 구곡폭포는 빙벽 등반의 명소. 해마다 겨울이면 폭포에는 빙벽 등반을 하는 산악인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올겨울은 코로나19로 빙벽 등반이 금지됐다. 그러니 이번 겨울에는 아무도 딛지 않은, 순백의 얼음 기둥으로 홀로 서 있는 구곡폭포를 볼 수 있다.

춘천댐과 의암댐, 소양강댐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호반의 도시가 된 춘천에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안개가 피어오른다. 물안개는 봄, 가을이 가장 운치 있지만, 춘천의 겨울 안개는 색다른 풍경을 빚어낸다. 겨울 안개는 나뭇가지마다 얼어붙어 얼음꽃으로 핀다. 호반의 얼음꽃, 그러니까 상고대는 높은 습도와 혹한의 날씨가 맞아떨어져야 만들어지니 겨울 추위가 매섭기로 이름난 춘천 말고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렵다.

이런 연유로 혹한이 닥치는 날이면 상고대 명소로 이름난 춘천의 소양 3교와 소양 5교 다리 주변에는 새벽부터 사진가들이 몰려든다. 소양호 물길을 따라 피어나는 순백의 상고대는 사진촬영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해도, 직접 가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른 새벽에 동화 속 겨울 풍경 같은 상고대와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런 경험을 아침잠과 바꾸는 게 얼마나 ‘남는 장사’인지 알 수 있다.

한데 애석하게도 올겨울 소양교의 상고대 풍경은 초라하다.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호우와 소양댐 집중 방류로 물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낸 수몰 나무들이 죄다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버드나무들이 다시 뿌리를 내려 몸집을 키우기 전에는 예전의 장관을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실망할 건 없다. 상고대가 없어도 혹한의 추위가 닥치는 날이면 소양교 일대에는 여전히 겨울 안개로 가득 찬다. 일출 무렵의 해를 받아 안개가 붉게 물들었다. 드문드문 남은 나무들은 화염 속에 타오르는 듯했다. 기록적인 혹한에도 얼지 않은 강물 위에서 서로 몸을 비비며 체온을 나누던 오리 떼가 일순 물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안개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먹으로 찍어 그려낸 산수화의 풍경이었다.


▲ 사진 위는 춘천 도심의 육림고개를 끼고 있는 골목. 사진 아래는 2018년 문 닫은 춘천의 유서 깊은 서점인 ‘경춘서점’ 자리에서 비슷한 상호와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식당. 간판은 ‘서적’이지만, 일본 가정식을 낸다.



# 소양강 처녀와 오백 나한

소양강은 강을 막은 소양댐과 의암댐 건설로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대중가요 속에서 노 젓는 처녀 뱃사공으로 또렷하다. 소양 2교 인근에는 ‘소양강 처녀’ 노래비가 있고, 그 뒤에 7m 높이의 노래에 등장하는 ‘소양강 처녀상’이 치마를 붙잡고 서 있다. 국민애창곡 ‘소양강 처녀’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쓴 반야월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노래에 등장하는 ‘소양강 처녀’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강원도가 관광지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소양강 처녀의 진짜 주인공을 가려내려고 했다. 먼저 후보에 오른 이는 춘천 출신의 윤기순(67) 씨. 실제 소양강 뱃사공의 딸인 윤 씨는 열여덟 살이던 1968년 상경해 한국가요예술작가동지회에서 노래를 배우며 잔심부름을 했는데, 뱃사공인 아버지가 음악가들을 춘천으로 초대했을 때 동행한 반야월이 소양강 풍경과 그녀의 모습을 담아 노래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후보인 박경희(71) 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소양강 변의 호수장 여관에서 반야월이 보름 동안 머물며 노랫말을 구상했다며, 쪽배를 타고 노를 젓던 중 반야월로부터 ‘네 사연을 노래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강원지사와 춘천시장까지 나섰던 ‘진짜 소양강 처녀 찾기’의 승부는 무승부. 증언과 자료를 분석한 결과, 반야월이 박 씨의 주장대로 1967년 3월에, 윤 씨의 주장대로 1968년 6월에 춘천을 방문한 사실을 확인하고 박 씨와 윤 씨 모두를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으로 인정했다. 노래에 등장하는 진짜 소양강 처녀가 누구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한 도시가 가진 문화적 자산을 생각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건 국립춘천박물관을 빼놓지 말라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꼭 보아야 할 국보와 보물이 한둘이 아니지만, 박물관 브랜드 전시실의 ‘창령사 터 오백나한, 나에게로 가는 길’의 전시는 그것 하나만 보러 춘천에 다녀온다 해도 밑질 일 하나 없을 정도로 감명 깊다. 영월 창령사 터에서 발굴된 돌로 새긴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의 나한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이다. 화선지에 먹을 찍은 듯 고요하게 연출된 공간에 놓인 화강암의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맑고 천진한 나한상의 표정 앞에서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다. 매시 정각에 박물관 로비의 둥근 내벽을 스크린 삼아 울진 월송정과 망양정,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해금강 총석정 등을 디지털로 재현한 초대형 실감 영상을 상영하는데, 대형 화면에 펼쳐지는 몰입감 높은 초고화질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휴식과 치유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 춘천의 작명법

춘천시가 소양강의 다리에 붙여준 이름이 참으로 무성의하다. 소양 1교, 소양 2교, 소양 3교, 소양 5교, 소양 6교, 소양 7교…. ‘죽을 사(死)’ 자가 연상돼 ‘소양 4교’는 없는 대신, 조성 중인 레고랜드 출입교량인 춘천대교가 있으니 소양강에 놓인 다리는 모두 7개다. 구분이 쉬울지는 모르겠지만, 일련번호 식의 이름이 주는 건조함이라니…. 춘천이 ‘봄(春)내(川)’란 함의를 지닌 서정적 지명을 갖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