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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16. 22:27

明 황제가 말차를 금하니 일본이 도자기로 일어서더라

[229] 충남 내포 이야기③/끝 주원장의 용단차 금지령과 나비효과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9.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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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2대에 왕이 날 자리를 찾아 자기 선친 묘를 이장한 곳이 충남 예산 남연군묘다. 예산은 조선 왕실과 관계가 깊은 땅이었다. 광해군 아들이 유배된 강화도에서 탈출해 달아나려던 목적지도 이곳이었다. 순조 때 추사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내포를 샅샅이 훑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해냈는데, 그 공덕비와 그가 적발해낸 사또 공덕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남연군묘 자리에 서 있던 탑에서 송나라 때 떡차, 용단승설차 네 덩이가 발견됐다. 한 덩이를 대원군과 친했던 역관 이상적이 받았고, 어찌어찌하여 그게 김정희에게 들어갔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줬는데, 그게 ‘세한도’다. 자, 그다음 이야기다. ‘떡차’는 어찌하여 조선 시대에는 희귀해졌는가. 떡차를 전면 금지한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서 일본 메이지유신까지 ‘나비효과’.

청나라 '사고전서'에 기록된 송나라 차 '용단승설'(오른쪽 끝). 육면체로 다진 차에 용이 새겨져 있다.

폭군 주원장과 문자옥(文字獄)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한족이다. 1368년 남송이 망한 지 89년 만에 한족이 중원을 차지했으니 소위 중화(中華) 부활 의지가 활활 불탔다. 새 나라 기강 잡는 데는 악랄할 정도로 지독했다. 개국공신을 포함해 자기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은 낱낱이 숙청해버렸다. 숙청할 때는 허리를 자르고[腰斬⋅요참], 사지를 찢고[車裂⋅거열], 사람을 산 채로 겉을 데친 뒤 피부를 쇠 빗으로 벗겨내[梳洗⋅소세] 죽이곤 했다. 조정 신하와 사대부는 그를 폭군이라고 불렀다.

주원장은 거지였고, 굶다 못해 머리 깎고 절로 간 탁발승이었다. 절도 주리긴 마찬가지라 마침내 주원장은 홍건적에 가담해 두령이 되었다. 그러다 황제가 되었으니, 주원장은 동서고금에 개천에서 솟아오른 대표적인 용이다.

그 용이 가장 혐오한 글자가 승려의 ‘僧(승)’이었고, 홍건적의 ‘賊(적)’이었고 도적의 ‘盜(도)’ 자였다. ‘조야이문록(朝野異聞錄)’에 따르면 주원장은 상소문에 이 세 글자는 물론 발음이 비슷한 ‘生(생)’ ‘則(즉)’ ‘道(도)’ 자를 쓴 자들은 모두 죽였다.(조익, ‘명사(明史)’) 이를 문자옥(文字獄)이라 한다.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티끌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讎·군지시신여토개 칙신시군여구수)’고 적힌 ‘맹자(孟子)’를 읽다가 “이 미친 노인이!” 하며 80군데가 넘는 부분을 삭제한 ‘맹자절목’을 과거 과목으로 삼기도 했다.(명사 ‘전당전·錢唐傳’ 등) 관료와 선비 할 것 없이 주원장을 폭군이라 불렀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 어릴 적 겪은 '끔찍하게 힘든' 말차 제조 노역에 질린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후 말차 제조를 금지시켜버렸다.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

성군 주원장과 기괴한 초상화

민간에서는 그를 명군이라 불렀다. 그들에게 주원장은 부패를 척결하고 치수(治水)와 개간으로 생활을 안정시킨 군주였다. 주원장은 초상화를 굉장히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 생김이 기괴하다. 이마와 턱이 튀어나오고, 점투성이다. 기록에는 그가 ‘기이한 뼈가 정수리에 튀어나왔다(奇骨貫頂·기골관정, ‘명사 태조본기’)’라고 돼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이 기괴한 초상화를 ‘과장된 오악조천(五嶽朝天) 저룡(豬龍·돼지처럼 생긴 용)형’을 뜻한다고 추정한다. 하늘이 내린 존재요,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상이라는 것이다. 상류사회에 잔학했던 그가 평민들에게는 부럽고 존경스러운 존재로 비친 것이다.

거지 출신 황제의 단차 금지령

나라를 세우고 23년이 지난 뒤, ‘하늘에서 내린’ 그 황제가 칙령을 내린다. “백성을 심하게 부려먹는 용단차 제조를 금지한다(以重勞民力 罷造龍團·이중로민력 파조룡단).”(1391년 9월 16일 ‘태조고황제실록’)

용단차가 무엇인가. ‘용단승설’이라고도 하는 이 차가 바로 흥선대원군이 충남 예산 남연군묘 자리에 있던 탑 속에서 발견한 그 차다. 대원군으로부터 한 덩이를 얻었던 역관 이상적은 ‘사방 한 치요 절반 두께에 위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고 기록했다.(이상적, ‘기용단승설’, 은송당집 속집) 청나라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전직 탁발승, 전직 마적 두령이 황명으로 용단차 제조를 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금지령이 먼 훗날 흥선대원군과 이상적과 김정희를 흥분시킨 원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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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가 김자인이 말차를 시연한다. 김자인이 "쓸데없는 것들의 총체"가 말차 다도라고 할 정도로 말차는 제작부터 마시는 법까지 사치스럽고 까다로웠다. /박종인

사치와 노동의 극, 말차

‘황실에 진상하는 차는 4000여 가지인데, 복건성과 건녕성 차가 상품이었다. 옛날에는 이를 모두 분쇄하고 은판으로 눌러 크고 작은 용단을 만들었다. 백성이 힘들다 하여 태조가 이를 없애고 오로지 차싹(茶芽·차아)만 따서 바치라 하였다.’(‘명사’ 권80, ‘식화·食貨’)

용단차는 가루차다. 말차(抹茶)는 가루차다. 입이 넓은 다완(茶碗)에 차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대나무로 만든 다선(茶筅)으로 거품을 일으켜 마신다. 찻잎을 우려서 내는 엽차와 달리 부드러운 거품과 진한 맛 그리고 명징한 차 색깔이 일품이다. 말차를 마실 때는 차를 내는 다완을 감상하며 품평을 한다. 녹색 차빛이 다완에 비치면 또 다른 색이 나오니, 이 또한 말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조목조목 따지는 음다법이다. 거품을 얼마나 곱게 내느냐에 따라 차 솜씨가 달라지니, 송대(宋代)에는 이 거품 내기를 겨루는 투다(鬪茶) 대회가 열릴 정도였다.

한마디로, 사치의 극을 달린 차요, 말차 다인 김자인에 따르면 “쓸데없는 것들의 총체”였다. ‘쓸데없는’이라는 말은 ‘예술적’이라는 말과도 같다.

귀족들이 그 쓸데없는 미학을 즐기기 위해 백성은 죽을 고생을 했다. 찻잎을 따서 말리고, 이를 분쇄해 떡처럼 덩어리를 만들고, 그 위에 은판으로 문양을 찍는 중노동이었다. 그 중노동을 거렁뱅이 출신 빈민 주원장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다. 그러니 차 맛이 날 턱이 없었다. 황제는 잔학한 숙청으로 20년 건국 작업을 마무리한 뒤 그 말차를 없애버린 것이다.

국법으로 말차가 금지되자 명나라 상류 사회는 신속하게 엽차로 취향을 바꿨다. 엽차 또한 제조법이 발전하면서 명차(名茶)가 속속 나왔다. 결국 명나라 백성은 새로운 차를 진상하기 위해 또 허리를 굽혀야 했다. ‘물고기가 살찌면 내 아들을 팔아야 하고 차가 향기로우면 내 집이 파산 나니 이 넓은 하늘은 어찌 이리도 불인(不仁)한고?’(명 세종 때 문신 한방기(韓邦奇), ‘차가·茶歌’, 쓰촨대 객좌교수 박영환, ‘명차의 발전 과정’, 2017년 8월 1일 자 ‘불교 저널’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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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를 담은 흑유 다완을 내려다본 모습. 녹색 차빛이 비친 이 다완의 색과 빛을 즐기는 법도 알아야 제대로 된 다도라고 했다. 가평요 청곡 김시영 작품. /박종인

조선에서 사라진 말차

송, 원 제국과 운명을 같이한 고려 귀족들 또한 말차를 즐겼다. 차를 만들어 진상하는 부락 다소(茶所)가 있었는가 하면 왕이 행차를 할 때 차물 끓이는 행로 군사가 동행할 정도로 차 문화가 발달했다. 성종은 제사를 지낼 때 직접 맷돌에 차를 갈았고(고려사 ‘최승로 열전’), 절에서는 차 끓이기를 겨루는 ‘명전(茗戰)’ 풍속이 유행했다.(정미숙, ‘한일 말차 다례법 고찰’, 목포대 박사논문, 2018) 명전은 송나라 투다 행사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 건국 30년 뒤 건국한 조선에서는 이 말차 문화가 급속히 사라졌다.

1598년 임진왜란 때 명군 사령관으로 왔던 양호가 선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귀국에는 차가 있는데 왜 채취하지 않는가?” 선조가 이리 답했다. “우리나라는 풍습이 차를 마시지 않는다(小邦習俗 不喫茶矣·소방습속 불끽다의).”(1598년 6월 23일 ‘선조실록’)

조선 예법을 완성한 김장생(1548~1631)의 ‘가례집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옛날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에 분말을 만들어서 타 마셨는데 오늘날은 찻잎을 달여서 마신다. 제사 때 가루차를 내는 것은 옛 풍습을 보존하고자 함이다(存舊也· 존구야).’ 이미 조선 전기에 말차 문화는 골동품 정도로 희미하게 남았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성리학적 사회가 완성된 이후 말차는 부활하지 못했다. 말차를 즐기던 불교는 산속으로 숨었다. 소위 ‘실학시대’ 18세기가 오면서 차 문화가 사대부 사이에 부활했다. 그 무렵 청나라를 왕래한 관료들 가운데 기록으로만 내려오던 말차를 맛본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추사 김정희가 그 대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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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를 마시는 다완. 사진은 홍천 가평요 김시영 작품이다. 두꺼운 유약에 온갖 색이 반짝인다. /박종인

일본 국보 천목다완과 이도다완

송나라 때 말차를 즐기던 대표적인 다완은 ‘천목다완(天目茶碗)’이다. 두꺼운 유약 발색과 차 색이 결합한 미학이 일품인 다완이다. 유약에 포함된 금속 성분은 가마 속에서 불과 만나 화려한 색으로 둔갑한다.

복건성 요지에서 만든 이 다완은 절강성 천목산(天目山)에 있는 사찰 행사에 쓰였다. 그 다완을 중국으로 유학 갔던 일본 승려 에이사이(榮西)가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후 송은 망하고 원이 들어서고, 원도 망하고 명이 들어섰다. 말차는 사라졌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다완과 말차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화려한 가마쿠라 막부 시대(1192~1333)가 끝나고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가 도래했다. 그때 일본 다선(茶仙)인 승려 센노 리큐(千利休)는 소위 ‘와비사비[侘寂·차적]’한 차 문화를 제창했다. 화려한 문화 대신 적요하고 소박한 미학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 무렵 조선을 왕래하던 일본 승려 눈에 띈 다완이 조선 경상도 지역에서 나온 사발이다. 아직 용도가 불명인 이 사발들이 승려들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가면서 와비사비 미학에 최적인 다완이 되었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 도공을 대거 끌고 갔다. 이들은 그때까지 도기밖에 만들지 못하던 일본 요업 산업이 자기 수준으로 급성장하는 큰 계기가 됐다. 전쟁 종료 후 부산 초량에 설치한 왜관에서 조선 도공을 고용해 직접 다완과 각종 기물을 주문생산하기도 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 건너간 다완 가운데 ‘이도다완(井戶茶碗)’ 1점은 일본 국보로, 3점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남송 때 만든 천목다완들 가운데 5점이 국보로, 6점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일본국가지정문화재데이터베이스’) (그러니까 세간에 떠도는 ‘조선 막사발이 일본 국보’라는 말은 남송 작품이 무더기로 일본 국보라는 사실을 외면한, 절반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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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이작광-이경 형제 가운데 동생 이경이 만든 다완. /박종인

메이지유신으로 연결된 금지령

‘역사는 나비가 만든다.’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 날개가 일본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말차에 대한 집착은 다완에 대한 집착을 불렀고 다완에 대한 욕심은 전쟁을 통해 다기 원천 기술자들을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데려가도록 만들었다.

조슈번으로 끌려간 도공 이작광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 이경을 데리고 조슈로 돌아갔다.(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서 재회했다는 논의도 있다: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일어일문학 47집, 2009)

조선에서 천민에 불과하거나 천민 취급 받았던 이들은 사무라이 신분으로 자기를 만들었다. 포로가 된 도공들은 조선 정부의 귀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형제는 일본 다기 명가인 하기시 하기야키의 원조가 되었다. 이경의 후손들은 사카모토 고라이자에몬(坂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다기를 만든다. 첫 조상 이경의 작품도 보관 중이다.

조선 도공을 끌고 간 조슈, 사가, 사쓰마 세 번은 경쟁적으로 자기를 만들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사가번은 가지고 갔던 자기를 완판하고 그 돈으로 군함을 사왔다. 일본 문화가 유럽에 퍼지며, 그때까지 자기 후진국이던 독일이 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러자 사가번은 독일 과학자 고트프리트 바그너(Gottfried Wagner)를 초빙해 그 기술을 역수입했다. 안료도 발색이 뛰어나고 저가인 산화코발트를 받아들였다. 자기업이 ‘요업 산업’이 된 것이다. 메이지정부는 재래 산업인 자기 수출 확대를 목표로 사가번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아쿠쓰 마리코, ’19세기 후반 이마리야키 생산에서 유럽의 영향', 알자스 일⋅유럽 지적 교류 사업 일본 연구 세미나 ‘메이지’ 보고서, 2014)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은 대부분 이들 조슈, 사가, 사쓰마 세 번에서 나왔다.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수입한 ‘내열기술’은 용광로 건설에 기초가 됐고, 자기를 만들어 판 돈은 그 시설을 만드는 자금이 됐다. 1996년 사가번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긴 역사서를 펴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이렇게 역사는 가끔 엉뚱한 일이 원인이 되고 엉뚱한 일이 결과가 되기도 한다. 이상 남연군 묘가 있는 충청도 내포에서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역사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