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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7. 21:11

[뉴스 속의 한국사] '잡가' 취급받던 노래, 문화재로 만든 신재효

입력 : 2015.12.07 03:08

[판소리]

유행하던 12곡 중 춘향가·심청가 등 6곡 선별
5곡은 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

제자 진채선을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키워
작곡한 '도리화가' 제자 향한 사랑가란 해석도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도리화가' 때문에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해요. 도리화가는 사실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짧은 노래인 '단가'예요. 조선 후기 판소리를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신재효가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핀 봄의 경치를 도리화가(桃李花歌·복숭아와 자두꽃의 노래)를 지어 표현했지요. 이 노래는 한 여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해요. 그 여인의 이름은 진채선, 신재효의 여자 제자로 판소리 최초의 여류 명창이지요. 그런데 판소리는 무엇이고, 신재효가 살았던 조선 후기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조선 백성을 웃기고 울린 우리 음악 '판소리'

1753년 조선 21대 임금 영조 때 유진한이라는 문인이 호남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어떤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어요. 이 공연은 유진한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이몽룡과 춘향이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로 펼쳐내니 참 재미있구나! 어떤 대목은 찔끔찔끔 눈물이 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키득키득 웃음이 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네." 그가 듣고 보며 마음을 빼앗긴 공연은 춘향가라는 판소리였지요. 그는 여행을 마친 1754년 고향인 충청도 천안에 돌아와 판소리 춘향가를 한시로 옮겼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잡가' 취급받던 노래, 문화재로 만든 신재효
/그림=이혁
판소리는 부채를 든 한 명의 소리꾼이 북 치는 사람의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말, 몸짓을 섞어서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공연이에요.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는 '소리', 말은 '아니리', 몸짓은 '발림'이라고 해요. 언제 생겨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영·정조 때부터 판소리의 높은 경지에 이른 명창들이 있었고, 1754년 유진한이 판소리 춘향가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생겨났을 거라 짐작하지요.

조선 후기 문학이자 예술인 '판소리 여섯 마당'

판소리는 한글 소설의 인기를 바탕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공연하며 서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춘향가'를 비롯해 12개의 내용을 판소리로 주로 불렀지요. 이때는 판소리를 '타령' '소리' '잡가' 등으로 불렀다고 해요. 1800년대 말 고종 때 신재효는 12개의 판소리 중 6개를 선별하고 당시까지 계통 없이 불려오던 판소리의 체계를 세웠어요. 그는 판소리 여러 대목과 구절을 실감 나게 고쳐 판소리가 음악뿐 아니라 문학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했지요. 또한 판소리가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게 했어요. 판소리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예요. 그리고 현재는 이 중에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어요. 현재까지 남아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은 모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아 200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록되었지요.

신재효(왼쪽), 진채선.
신재효(왼쪽), 진채선.
신재효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마을 이방을 거쳐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인데, 재산을 많이 모아 병이 들거나 가난한 백성을 도왔어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당시에는 큰돈인 원납전 500냥을 바쳤고,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했을 뿐 아니라 자신 또한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지요. 신재효는 판소리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어요. "판소리 광대가 되려면 뛰어난 얼굴에 좋은 목소리로 장단과 선율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분명하고 정확한 발음의 사설로 이야기를 엮어갈 수 있어야 하며, 구성지고 맵시 있는 너름새 즉 발림으로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판소리를 가르친 제자 중에 여자인 진채선도 있었지요. 당시 조선 사회는 여자가 판소리 하는 것을 무척 꺼렸다고 해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신재효는 진채선의 재능을 알아보고 판소리를 교육했고, 그 후 경복궁 완공을 축하하는 중요한 잔치에서 진채선이 실력을 보이자 흥선대원군은 그녀를 판소리 명창으로 인정했어요.

서민 문화를 대표하다

판소리는 조선 백성의 삶의 모습과 감정을 음악과 더불어 해학(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적으로 표현해요. 이 점 덕분에 서민들뿐 아니라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즐겨 듣고 보는 공연 예술이 됐어요. 판소리의 계통은 지역을 중심으로 나뉘지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전라도 동북 지역의 소리를 '동편제', 섬진강 서쪽인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를 '서편제', 경기도와 충청도의 소리를 '중고제'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왜 오래전부터 있었던 판소리가 조선 후기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을까요? 신재효의 역할이 컸지만 시대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기도 해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고, 점점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때 서민들의 삶과 꿈을 작품으로 표현하면서 양반을 풍자한 문화를 서민 문화라고 불러요.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글 소설, 탈놀이, 민화, 풍속화 등을 들 수 있답니다.


[당시 세계는?]

신재효가 진채선을 만나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을 무렵인 1861~1865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한창이었어요.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은 서부를 개척하는 한편, 남과 북으로 넓게 퍼져 살았는데 남·북부 간 생활 양식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컸어요. 남부 사람들은 흑인 노예를 이용해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며 지방 분권을 주장한 반면, 북부에선 상공업이 발달해 중앙집권화된 연방 정부가 필요했거든요. 1863년 미 연방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노예 해방과 인권·자유를 대의명분으로 삼은 북부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어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