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
김문숙
사랑은 질병이다. 사랑이라는 질환에 감염된 이들의 작태를 보라. 그들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특히 발열이나 흉통 등 뚜렷한 신체적 증후를 갖는 그 질환은 치유가 힘들 뿐더러 재발이 잦은, 평생에 걸쳐 완치되지 않는 매우 고약한 정신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사랑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거나 때로는 극도의 혐오감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지전능의 신이나 오작동의 경우가 없는 완벽한 기계가 아닌 바, 가끔 실수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부주의와 무신경으로 인하여, 그런 이들도 간혹 사랑이라는 병에 걸리곤 하는데 이때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한 투병 의지를 갖게 되며 병을 극복한 후로는 전보다 예방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생애 단 한 번의 감염만으로 항체가 형성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숱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면역이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는, 원인 불명의 이 몹쓸 질환은 깊은 후유증과 진한 상흔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무서운 병의 미친 증세는 3개월 이상 지속되는 법은 없으며 시간과 함께 호전될 뿐 악화되지는 않는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유전이나 전염성과도 무관해 보인다. 사랑은 매우 흔한 질병이기는 하나, 선천적이 아닌 여느 질환들처럼 바른 생활 습관과 건강한 정신의 힘으로 미리 방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는, 모든 사람이 사랑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인 기질이 강한 이들은 심지어 그 병에 걸리고 싶어 하기까지 한다. 이는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기실 어떤 병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마치 순결하고 여린 영혼의 표지인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창백한 얼굴과 푸른 입술을 가진 가냘픈 소녀를 연상시키는 심장병이나 슬픈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죽어가는 주인공의 백혈병 같은 예가 그것이다. 하지만 심장병이나 백혈병에 한번 걸려보라. 사랑도 그러하다. 지독한 통증뿐인 것이다.
나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재원은 또 괴상한 소설을 하나 쓰기 시작했나 보다. 다만 말장난 같은 비유가 있을 뿐 재원이 쓰다 만 글에는 사랑에 대한 어떤 통찰도 엿보이지 않는다. 재원이 질병이라 쉽게 단언한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사랑은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없다. 재원이 쓰는 표현이나 문체, 어휘조차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의상 아무리 좋게 봐주려 애써도 재원은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
글을 쓴답시고 재능도 없이 온갖 폼을 다 잡는 소설가 지망생은 삼 년째 두문불출, 보람 없는 수고에 청춘을 소모하고 있는 중이다. 저의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한다면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지만 재원 때문에 시들어가는 내 아까운 젊음이 문제인 것이다. 재원은 ‘고통 분담’의 책임을 지려 들지 않는다. 생계유지의 부담은 온전히 내 몫이다.
돼먹지 않은 글을 쓰다 말고 아침부터 어딜 나간 걸까. 노트북을 켜놓은 채 재원은 방에 없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지만 담배 냄새가 역하게 풍겨온다. 그토록 밖에 나가 피우라고 말했건만. 벽에 바짝 붙어 선 채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힘껏 연기를 뿜어내는 짓을 간밤에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것일까. 흡연자들은 사회악이다. 담배는 자신이 피우고 연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이마시게 한다. 여기저기 냄새를 묻혀놓고 다닌다. 담배가 없으면 글이 안 써진다니, 게다가 노트북이 없어서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궤변이라니.
재원은 아마 담배를 사러 나간 모양이다. 나는 그만 방을 나가려다 말고 재촉하듯 깜박이는 커서에 닿아있는 글자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문장 하나가 슬근슬근, 목구멍을 간질인다. 나는 재빠른 타자 솜씨로 문장을 만들어 넣는다. 만족스럽다.
나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사회의 악이고 밥버러지이며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며 현지에서 글을 쓰고 싶어 안달하는 재원에게 생일 선물했던 노트북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재원의 생일이 들어있던 지난 4월에 나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단 한 닢의 동전도 쓸 수 없었다. 그 달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나는 씹어 뱉듯 나직하면서도 또박또박 끊어지는 소리로, 부재중인 방의 주인을 향해 말한다.
“최재원. 너는 정신이 썩었어.”
분주한 출근길에 걸려오는 전화란 한밤중의 전화벨소리만큼이나 수상하다. 나는 가방을 열고 보채듯 울어대는 전화기를 꺼내든다. 재원이다.
“야! 누가 내 글에 함부로 손을 대라고 했니? 너, 제정신이야?
“난 그저 수고를 조금 덜어주려 했던 것뿐이야. 우리 소설가 선생께서 쓰려던 말이 그거 아니었나? 난 그런 줄 알았는데.”
“다시 그러면 가만 안 둔다.”
“오랜만에 화내는 걸 보니 무섭군.”
“오늘은 제발 일찍 들어 와.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담배를 사서 돌아온 재원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을 것이다. 그러곤 기겁을 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언제 이런 말을 썼지? 썩은 정신이긴 해도, 제 작품이 가필되어 있는 가공할 만한 사건의 전말을 꿰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분을 못 이겨 부리나케 내게 전화를 걸었겠지. 제발 일찍 들어오라는 입에 젖은 말도 빼놓을 수 없었겠지.
이럴 때 보면 꽤 순진한 구석이 있긴 해도 고작 세 살 위인 재원은 간혹 딸 가진 아비처럼 굴 때가 있다.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히스테리로 생의 위안을 삼는, 이젠 할 일이 없어진 누군가의 늙은 어미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 차라리 진짜 아버지라면 좋겠다. 아니 심지가 굳고 건강한 어머니였으면. 귀가 시간을 단속하고 입성을 트집 잡는 따위, 남의 일상을 통제하려 드는 꼴이란 차마 가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버릇일 뿐 재원 자신조차 이젠 메아리 없는 외침이란 걸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함과 생활에 대한 불충한 태도 때문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그녀는 재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죽도록. 지난밤의 폭음, 그로 인한 두통과 속앓이 때문에 출근하지 못한 채 종일토록 누워 있던 날이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승주야, 내가 너를 죽도록 사랑하니까 너는 너 자신을 아껴야 해. 몸을 아끼고 마음을 아껴. 함부로 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나는 토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 병원에 있다. 하지만 머잖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미래이며 불변의 사실이자 오래 전에 이미 결정된 운명이다. 신장에 든 그녀의 병은 결코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녀 자신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들고 있었다. 하루 세 번, 제 시간을 잊지 않고 먹어야 할 약과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투석 받는 일, 소금이 적게 든 음식을 먹고 몸의 수분을 조절해야 하는 일 따위에 지치면 그녀는 볼거리 앓는 아이처럼 부어오른 얼굴로 다급히 입원 수속을 밟고는 했다.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예민한 감수성과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그녀는 그러나 간혹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기는 할지언정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재원 역시 더 이상 연적이 아니다. 셋이 함께 살아온 짧지 않은 동안,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얻지 못해 절망하던 시간들이 이제 와 아깝다. 그녀는 재원만을 위해 살았다. 재원을 위해 식탁을 차렸고 재원을 위해 커튼을 갈았으며 재원을 위해 뜰을 가꿨다. 살림까지도 치장에 역점을 두는 그녀가 손톱이 잘 다듬어진 깨끗한 손으로 재원의 머리칼을 쓰다듬거나 등을 토닥일 때면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앞섶을 헤치고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뭐 하는 거니, 어린애처럼. 귀찮게 굴지 마.”
그녀는 재원에게도 젖가슴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아니, 젖꼭지까지 물려주려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새삼스레 울화가 치민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변했다. 심지어는 내가 사들고 온 토마토 주스를 재원이 너무 많이 마신다며 화를 내기까지 한다. 눈칫밥 먹고 크는 아이처럼 주눅 들고 쭈뼛거리던 날들, 죄 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던 지난 시간들은 끝났지만 그녀와 재원에 대한 원망은 그대로 남았다. 이젠 그녀가 눈치를 본다. 변함없이 당당한 건, 아니 뻔뻔스러운 건 재원 혼자 뿐이다. 많은 게 변했어도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가는 건 그뿐이다. 가소롭기 그지없게도, 그는 소설이란 걸 쓴다. 소설 때문에 재원은 그녀의 사랑을 잃었다.
지병을 핑계로 퇴행을 거듭하는 여자.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여자.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어이없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 우리가 사랑했던 여자. 그녀가 남김 없는 제 마음을 주었다. 그러나 연적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은 자랑스러움 따윈 다만 찰나의 희열일 뿐이었다.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이메일을 확인한다. 아무도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는 누군가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Painkiller일 수밖에 없다. Painkiller는 닷새째 편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나는 발신함 폴더를 열어 최근 Painkiller에게 보냈던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수신인이 기분 상할 만한 내용은 없어 보인다. 무얼 잘못한 걸까.
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꼽아본 후 더 이상 애태우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Painkiller는 단지 시간에 쫓겨 답장할 겨를을 낼 수 없을 뿐일 게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들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 편집장이 고개를 들고 일별한다. 시선을 다시 휴대전화로 옮긴 편집장은 말이 없고, 나는 라이터를 켜 담뱃불을 붙인다.
옥상에서 내려와 책상 앞에 앉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주 안에는 출력소에 넘기라는 편집장의 지시가 떨어진 원고의 OK 교정지를 천천히 펼친다. 오늘은 금요일, 채 반도 보지 못한 교정용 원고 더미가 편집장의 침묵만큼의 무게로 내 가슴을 짓누른다. 나는 왜 불안한가. 교정지의 무게 때문인가. 텅 비어 있던 메일함 때문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과 5분 전에 확인했던 메일함을 다시 열어본다. 새 편지 1통. 담배 한 대를 피운 사이 누군가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훅 끼치면서 어지럼증이 인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은 온통 꽃밭이다. 눈을 뜨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우스 단추를 누르는 오른손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 스스로 움직인다. 천지개벽처럼 페이지가 열리면, 그곳에 낯선 발신인의 이름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의 편지가 있다. 열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울고 싶어진다. 스팸이다. 나는 비탄에 젖는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 2호선 안은 저마다의 탁한 숨결과 시적지근한 땀냄새와 몸이 내뿜는 온기로 가득하다. 하루치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피로한 얼굴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한 기분 좋은 고단함 속에 충일과 자긍이 서려 있다. 나는 다만 피곤할 뿐이다. 끝내지 못한 일은 아랫배에 잔뇨감처럼 남아 불쾌감을 자극한다. 편집장의 차가운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정시에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오로지 Painkiller 때문이었다. Painkiller를 만나야만 했다. Painkiller를 만나지 않고는 일상의 다음 차례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지 않는 이메일을 확인하느라 내내 두서없이 흘려보낸 근무 시간, 몸살을 앓는 것처럼 얼굴에 열이 나고 도무지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Painkiller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Painkiller는 내게 유일한 대안이다. 희망이다. 꿈이다. 나는 교정지를 버려두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균열의 조짐이 보이는 일상의 틈새 속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 때문에 삶이 균열을 시작하게 된 건지 아니면 이미 벌어진 틈을 그가 메우게 된 건지가 분명치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Painkiller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나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 시간에 용케 자리를 얻어 앉은 젊은 엄마와 어린 남매가 내 눈길을 잡아 끈다. 몸을 뒤채며 목이 마르다고 칭얼대는 계집아이는 제 엄마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려 애를 쓰고, 엄마는 너덧 살이나 되었을까 한 아이를 팔꿈치로 밀쳐내며 사나운 표정을 지어내는 중이다. 작은 소란에 개의치 않고 엄마 옆에 얌전히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는 사내아이는 계집아이보다 두어 살 쯤 더 먹어 보인다. 오른편에 앉힌 아들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다가 왼편의 딸아이에게 눈 흘기기를 반복하는, 처녀처럼 보이는 젊은 엄마가 우습게도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그녀는 신파 같은 내력을 가졌다. 그녀는 불우한 유년을 보냈으며 병약한 사춘기를 겪었고 자폐적인 처녀 시절을 지냈다. 결혼은 자폐적이고 선병질적이며 음울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처녀기를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로 짧게 마감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사건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좋아했다. 남편 역시 그녀 마음 같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음에도 마치 내 것처럼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은 대개 재원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그녀의 구질구질한 가족사나 결혼 전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재원보다 그녀에 관해 아는 바가 적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한때가 있었다. 그녀에 관해서라면 원하지 않는 정보나 필요하지 않은 지식이란 세상에 없었다. 달갑지 않은 친절처럼 이젠 그녀가 쏟아 붓는 애정이 부담스럽다. 새삼스레 토해놓는 그녀의 지난 이야기들이 귀에 거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광산업을 하는 부유한 남자였다. 전쟁이 있던 시절에 그녀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가 열여섯이 되도록 혼자 지내던 그녀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새 여자를 들였다. 어린 여자였다. 그녀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으니까. 그녀, 그리고 그녀와 같은 또래였던 계모와의 관계는 결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 이상은 아니었다.
원치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심지어 뱃속에서 죽어버리기를 빌어 마지않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아기는 태어나기 마련이다. 계모는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어째서 아버지와 붙어먹은 그따위 계집이 싸질러놓은 새끼가 자신의 동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계모와 이복동생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긴 장마 뒤의 햇살이 좋아 갓 백일을 넘긴 아들을 안고 볕바라기를 하던 그녀의 계모는 혼겁한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맨발로 선 그녀가 부엌칼을 겨눈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기도원에 갇힌 후에도 계모는 눈물로 번뜩이던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이 떠올라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맞선을 보이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기도원에서 딸을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처음 선을 본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안겨다주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어도 그녀의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불쌍한 사람이잖아. 그러니 좀 살갑게 굴어.”
재원은 그렇게 타이르곤 한다.
“어서 이 집을 떠나고 싶어. 나 결혼할 거야. 둘이 잘 살아 봐.”
그녀에 관해서라면 그지없이 선량하고 너그러운 재원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고작 그 정도 뿐이다.
퍼뜩, 정신이 든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무릎 위에 세워 놓았던 가방을 그만 의자 밑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러나 우연히 같은 열차에 동승했을 뿐인 승객의 하찮은 실수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홍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란 머리칼을 길게 기른, 대개가 마르고 키 큰 젊은 남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Painkiller를 떠올리게 된다. 찢은 청바지에 해골 따위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큼직한 목걸이를 반짝이며 지나가는 그들은 Painkiller와 동류일 것이다.
10여 년 만의 동창회에서 만난 Painkiller는 학창 시절처럼 머리가 짧았다. Painkiller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기르면 되잖아.”
Painkiller는 누구든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상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머리 긴 의사 봤니?”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뒤로 모아 하나로 단정하게 묶으면 되지 않을까?”
“글쎄.”
Painkiller는 헤드뱅잉을 하기엔 제 머리가 너무 짧은 게 탈이라고 했다. 헤드뱅잉이라니.
“나 부업으로 가수 하잖아. 시간 나면 홍대로 놀러 와. 금요일마다 공연을 해.”
Painkiller는 <Yard Bird>라는 클럽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이름을 짐작할 수 없는 검은 새 한 마리가 그려진 철제문이 나온다. 문을 열면 귀청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가 기습하듯 달겨들고, 눅눅한 곰팡내와 찌든 담뱃내와 엎지른 술의 시큼한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훅 끼쳐온다. <Yard Bird>는 비좁고 더럽다. 허름하고 어둡다. 어둠 속을 아무리 둘러봐도 좌석은 없다. 나는 깊이 숙인 고개를 흔들며 춤을 추거나 선 채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입구에서 산 맥주 캔을 딴다. 희미한 조명의 무대 위에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이들이 기타를 안고 발을 구르거나 악을 쓰며 뛰어다니고 있다. 성별이 모호하기 때문에 나는 저들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남자라면 파워풀하고 섹시하지만 만약 저들이 여자라면 지나치게 과격하고 선정적이다. 상대의 성별을 파악할 수 없을 때처럼 당혹스러울 때가 또 있을까. 성별은 존재를 억압한다.
괴성을 지르는 싱어의 머리칼은 짧지만 보랏빛이다. 체인을 늘어뜨린 검정 가죽바지와 깃이 넓은 붉은 셔츠는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타이트하다. 나는 싱어의 가슴을 유심히 바라본다. 어지럽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다. 허기를 채우려 맥주를 마신다. Painkiller는 어디 있는가. Painkiller를 위해 준비한 분홍 장미 다발이 빛을 잃어간다. 향기를 잃어간다. 물기를 잃어간다. Painkiller는 어디 있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든다.
<Yard Bird>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물리적으로도 멀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재원의 방부터 들어간다.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던 재원이 습관처럼 내뱉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좀 다녀.”
“일이 많았어. 노트북 좀 쓸게.”
“나 작업하는 중인데…….”
“누가 사준 노트북인데. 잠깐이면 돼.”
재원을 밀치다시피해 차지한 책상 앞, 노트북을 마주하고 의자에 앉는다. 화면 속은 온종일 고심참담했을 재원의 문장들로 숨이 막힌다. 재능 없는 재원이 겪었을 고충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재원의 글이 역겹다. 제 소설이 얼마나 같잖은지를 재원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나는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어 재원에게 묻는다.
“외롭지 않아?”
“괜찮은 여자 하나 소개시켜 주고 그런 말을 해라.”
“글 쓰는 거 말이야.”
“안 풀릴 때는.”
재원의 말은 창작의 충일감으로 고독을 잊을 수 있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그렇겠지. 다만 잠시 잊을 수 있을 뿐이겠지.
“왜 소설을 쓰는 거야?”
“소설은 내 인생의 전부니까.”
나는 손으로 책상을 쳐대고 발을 구르며 한참을 웃는다.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나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최근 3년간 들은 말 가운데 가장 웃겼어. 코미디 대본을 쓰지 그래?”
재원의 얼굴이 몹시 붉어져 있다. 시원하게 웃은 덕분에 한껏 유쾌해진 나는 재원의 기분 따윈 아랑곳 않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Painkiller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Painkiller은 오늘 일을 끝내고 공연을 했다. 노래하는 Painkiller는 전혀 의사 같지 않았다. 나는 내심 실망했지만 Painkiller에게 꽃다발을 건네면서 멋있었노라고 말했다. Painkiller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불현듯 수치스럽다. 누군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비웃고 있는 듯하다.
책상에서 일어서는 나를 보고 재원이 말한다.
“병원에 좀 들러. 보고 싶어 해.”
“며칠 됐다구.”
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는다. Painkiller가 보이지 않자 Painkiller가 다시 좋아진다. 한 가지씩 옷을 벗을 때마다 부끄럽게 드러나는 맨살에 Painkiller의 시선이 와 닿는다. 나는 몸을 웅크린다. 그녀보다는 그녀의 남편을 닮아 뼈대가 굵고 살집이 좋은 내 몸이 싫다. 하지만 재원은 그녀를 닮았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홍시가 주렁주렁한 가지를 담 너머로 늘어뜨리곤 하던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도는 열매들 사이에서 유독 붉게 익어가는 감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끌던 9월이었다. 그녀의 독촉에 남편은 높은 가지 끝 홀로 붉게 매달린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 위를 올랐다. 팔을 뻗어 감을 손아귀에 쥐고 비트는 순간, 그의 건장한 몸은 삭은 나뭇가지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농익은 열매의 붉은 속살이 각혈처럼 비어져 나왔다.
그녀의 신장에 든 병은 악화되었다. 재원에 대한 몰두, 새삼스런 관심과 기대로써 죄책감을 상쇄하려 들지 않았다면, 재원에 대한 사랑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을 잊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깊어가는 자신의 병을 방치하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죽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남편은 감을 따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어야만 했다.
재원이 땀 흘려 일해 번 돈으로 내가 뒤늦게 대학을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의 미움을 사던 날들이 있었다. 그 시절조차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언제나 그녀를 사랑했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대체로 그렇듯 그녀는 게을렀고 사치스러웠으며 천진했다. 그럴 나이가 지났음에도 인형 모으기를 취미 삼았던 그녀는 다만 미적 쾌감을 위해서 실용성 없는 물건들을 탐닉하듯 사들이곤 했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소녀기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순결하고 무구한 여자였다. 한 번도 노동력을 팔아본 적 없는 그녀의 손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사랑을 잃을 염려뿐 다른 근심 없는 그녀의 몸가짐은 지나치게 우아하고 여성스러웠다. 애교가 흠씬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 앞에서는 들어주기 힘든 요구란 결코 없었다. 사랑은, 그녀에게 있어 생존하기 위한 본능처럼 보였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누구에게든지 그녀를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이메일 박스를 열어본다. 아무도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는 누군가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Painkiller일 수밖에 없다. Painkiller는 엿새째 편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책상 서랍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들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라이터를 켜고 담뱃불을 붙인다. 나는 Painkiller를 생각한다. 내 책상으로 돌아와 5분 전에 확인했던 메일함을 다시 열어본다. 새 편지 0통. 나는 비탄에 젖는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재원의 모습은 경멸받아 마땅하다. 글이 제대로 풀리질 않을 때 재원은 곧잘 저런 포즈를 취하곤 한다.
“일찍 왔네.”
재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인사랍시고 중얼거린다.
“그러게.”
소주잔을 목에 털어 붓다가 재원은 못마땅한 눈길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옷이 그게 뭐냐? 밤무대 가수 무대복이야? 천하게…….”
다만 광택이 있는 소재의 수트를 입었을 뿐이다. 나는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빈 그릇들을 손가락질한다.
“하루 종일 뭐해? 설거지나 해놓지 않구.”
재원은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병원에서 그녀의 수발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해놓고 보니 정말 화가 난다.
“일하고 와서 내가 설거지까지 해야 돼?”
“이리 와 앉아. 같이 한잔 하자.”
재원의 눈동자가 맥없이 풀어져 있다. 까닭 없이 한숨을 내쉬는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 재원은 우울해 보인다. 나는 재원과 마주 앉는다.
“술맛 떨어져. 얼굴 좀 펴.”
“그동안 많이 힘들었어. 단 한순간도 나 자신을 잊지 못했지. 내겐 너무 많은 것이 의식되었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힘든 건 나야. 이 집에 있는 두 사람 때문에 나는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내일 여행을 떠날까 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 돈을 좀 빌려주겠니.”
재원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나는 지갑을 꺼내 열어보곤 지폐 몇 장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여행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내일 돈을 더 찾아다 줄게.”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재원의 방으로 들어간다. 노트북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재원은 글을 쓰고 있지 않았던가 보다. 나는 뭘 쓴다는 사람들이 싫다. 말과 글로 호구하는 작자들이란 멀쩡한 사기꾼이거나 못 말리는 나르시스트이기 십상이다. 출판사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저자들이 이 믿음에 확신을 더해준다. 그들은 명문 속에 자신을 은폐하고 진실을 사기 친다. 제가 쓴 글에 감동하고 도취해 생의 고통을 잊는다. 그들은 대체로 비열하다.
노트북을 열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아무도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Painkiller는. 시간은 멈추었다. 정지된 시간을 재가동시키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용기를 내느라 필요 이상 힘이 들어간 손가락으로 꾹꾹 번호를 누른다. 이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김윤호입니다.”
“나야.”
“……?”
“최승주.”
“어, 그래.”
“난 너를 사랑해.”
“…….”
“듣고 있니?”
“난 지금 신혼이야. 게다가 우린 아기를 가졌어.”
“알아. 그런데 왜 날 찾았니?”
“그냥 궁금해서. 네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넌 특별했잖아.”
“내가 말더듬이었다는 말을 하는 거니?”
“그런 말이 아니야.”
“나한테 왜 메일을 보냈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니까.”
“…….”
“이만 끊는다.”
시간은 다시 정지되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치료라기보다는 휴식과 위안의 기능을 했을 일주일간의 입원에서 돌아온 그녀는 전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인다. 눈을 빛내며 방으로 따라 들어오는 그녀에게 짜증이 인다. 집에 있을 때 그녀는 늘 내 뒤를 따라다닌다.
내가 일어난 기척에 같이 눈을 뜨는 그녀는 아침마다 방에 들어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밥을 먹을 때면 바투 앉아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놓으며 이것저것 간섭을 한다.
목이 막히지 않니? 국을 떠먹어. 왜 가지나물을 먹지 않는 거니? 맛있게 무쳤는데. 다 먹었으면 이제 물을 마셔.
그럴 때면 멀찍이 앉아 자식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흐뭇해 하며 느긋이 바라보던 아빠 생각이 난다. 그녀는 멀리서 느긋하게 바라볼 줄을 모른다. 늘 곁에 바싹 붙어 떨어지려 들지 않는다. 재원에게도 그랬다. 그녀가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드러낼 때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아니면 좀 나가줘.”
“우리 예쁜 딸을 보고 싶어서 그러지. 우리 딸 뒤꼭지라도 한 번 보고 싶어서 일주일 동안 애가 다 탔어.”
“혼자 있을래.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좀 쉬어야겠어.”
“왜 힘들지 않겠니. 돈 벌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옷 갈아입고 저녁 먹어. 그런데 재원이는 밥도 안 해놓고 어딜 간 거니? 그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니.”
“오빠는 여행을 떠났어. 언제 올지 모르겠대.”
“아픈 엄마에 힘들게 일하는 동생 내팽개치고 팔자 좋게 무슨 여행이라니.”
“다 엄마가 잘못 키운 탓이지. 안 그래?”
그녀가 말없이 방을 나간다. 병원에 누워 있다 나온 사람한테 쌀쌀맞게 군 스스로가 조금은 후회스럽다.
엄마. 나는 그녀의 오래된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언제나 그렇다. 엄마의 소아병적 애정을 반격한 쾌감 뒤엔 늘 후회와 연민이 남는다. 가시 돋친 말에 가슴을 긁혔을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 아아, 우리는 언제쯤 행복해질까. 어이없는 사고로 아빠가 떠난 이후 파편처럼 남겨진 우리는 각자 고군분투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엄마와 오빠는 나름대로 고통을 견디는 법을 터득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깊은 늪에 발목을 빠뜨린 기분이다.
나는 Painkiller를 생각한다. 그는 진통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재원……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문숙 / 199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작품집 <요루와 휘린의 완벽한 결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