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철학 강의실

철학의 사명은 철학자 배출 아니라 시민사회 교육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11. 26. 20:41

김재권 브라운대 명예교수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14.11.26 00:05 / 수정 2014.11.26 00:18

“철학의 사명은 철학자 배출 아니라 시민사회 교육”

김재권 교수(오른쪽)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계기 중 하나는 조지 마이로라는 선배를 만난 것이다. 실존주의에 대해 토론했는데 철학도인 마이로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김 교수는 “생존을 위해” 철학도가 됐다. [오종택 기자]

인간의 마음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신비롭게 느껴진다. 온갖 감각의 파노라마가 마음을 둘러싸고 연출된다. 마음은 복잡한 문제가 풀리고, 창의성이 드러나고, 미적·예술적 감성이 녹아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마음의 신비를 풀기 위해, 또 과학이 마음의 신비를 어디까지 파헤쳤는가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김재권(80) 브라운대 명예교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심리철학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세계적 대가다. 미국의 철학자들이 그의 논문과 책을 철학적 글쓰기의 모범으로 추천할 정도다. 수려하고도 명료한 문체로 유명하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미국 정부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 간 후 철학의 엄밀성에 매료돼 철학자가 됐다. 동양인 중에서 처음으로 미국철학회장을 역임하고, 미국학술원 정회원이 됐다. 미국 미시간대를 거쳐 브라운대에서 30년을 봉직하고 은퇴했다. 경암학술상을 받기 위해 내한한 김재권 교수를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55) 교수가 10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두가헌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김기현 교수=50여 년에 걸친 교수 생활을 뒤로 하고 은퇴했는데 소감은.

 김재권 교수=은퇴는 자유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는 일요일만 해도 월요일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은퇴 후 생활은 토요일이 매일 계속되는 것과 같다. 특히 젊은 시절처럼 읽고 싶은 문학 작품과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김기현=한때 시인이 되려는 꿈을 지닌 불문학도였는데.

 김재권=중학생 때부터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불문학과에 입학했는데 미국으로 유학 간 다음에도 1년 동안 불문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증거에 입각해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철학에 끌리게 돼 철학 전공으로 바꿨다.

 김기현=문학과 철학은 둘 다 인문학이지만 정반대라고도 볼 수 있다. 의외의 진로 전환이다.

 김재권=사실 나는 불문학 중에서도 프랑스 실존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사르트르·카뮈 같은 작가들은 매우 철학적이다. 분석철학으로 가는 중간 단계가 실존주의였던 셈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도약과 전환을 항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 발생하는 일도 있다. 내가 과학철학에 관심을 같게 된 것은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서 카를 헴펠(1905~97)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놀라운 철학자, 놀라운 사람이었다. 지극히 겸손하기도 한 전형적인 유럽 신사였다.

 김기현=철학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철학 하면 ‘운명철학관’이나 명상을 연상하기도 한다.

 김재권=맞는 말이다. 미시간대에 재직할 때 형이상학을 가르쳤는데 ‘앤아버 형이상학 스쿨’이라는 데서 ‘함께 일해보자’고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명상·선불교와 관련된 단체였다.

 유명한 군인이나 기업인들이 은퇴하면서 ‘나의 국방 철학’ ‘나의 비즈니스 철학’ 같은 제목으로 자서전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철학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용도가 있다. 이러한 여러 모습 또한 철학이 지닌 매력의 일부분이다.

 일반인들은 철학에 대해 정반대 되는 두 관점을 믿는 경향이 있다. ‘철학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와 ‘철학은 뭐든지 바라는 대로 증명할 수 있다’이다. 철학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본다. 증명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겸허함이 필요하며 동시에 허무주의적인 태도도 피해야 한다.

 물론 내게 철학은 이성에 입각한 진지한 탐구다.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활동의 목표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철학은 과학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김기현=과학을 포함해 모든 지성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김재권=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윤리학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 ‘훌륭한 삶을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같은 규범적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답보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윤리학은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진리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일부 과학자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한다. 아인슈타인, 에어빈 슈뢰딩거 같은 과학자들은 철학자들과 같은 문제로 고심했다.

 김기현=과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며 진보한다. 한데 과학은 그 출발선상에서 지식이나 시간·공간, 인과관계 같은 개념에 대해 일단 기본적인 가정을 해야 한다. 과학 연구활동을 진행하면 할수록 기본 가정에 개념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 과학자들은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과학의 기본 가정이 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과학에 공헌할 수 있다. 심리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관한 과학은 결국 심리철학과 만나게 돼 있다.

 김재권=의식(consciousness)에 대한 심리철학의 관심은 뇌를 다루는 신경과학(neuroscience)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의식이 없다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후에 화장하는 경우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화장하지는 않는다. 차이가 뭔가. 의식이다.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를 걱정하지만 의자나 책상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의식이 있는 대상이냐 아니냐가 차이다.

 한데 신경과학은 의식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자의 존재론에는 의식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의식은 변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철학적인 설명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설명이 없을 수도 있다. 설명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철학 고유의 특별한 통찰(insight)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자의 역할은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제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지 또 없는지에 대해 말하는 게 철학자다.

 김기현=과학자들은 간혹 그들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과장할 때가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의 함의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게 필요한 경우가 있다.

 김재권=영국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좋은 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곧 뇌다”라고 주장했다.

 김기현=김재권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물리주의자(physicalist) 중에서도 강경한 입장으로 알려졌는데, 인간의 정신을 의식으로 접근한다고 하니 놀랍다.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연상시킨다.

 김재권=내가 물리주의자인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물질의 배열에 달려 있다는 의미에서다. 세상에서 모든 물질이 사라진다면 시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의식이 실재한다면, 의식은 물질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김기현=철학은 대학에서 비판적·분석적 사고를 교육하고 있다. 큰 공헌이다. 기업가가 되건 과학자가 되건 사고하는 법은 삶의 기초다. 철학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항상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김재권=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 교수의 사명은, 학생들을 그들의 삶과 세상의 이슈에 대해 엄격한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더 많이 배출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철학 교육을 하는 게 철학자들의 사명이다.

 내가 가르친 학부 강의의 경우 40~50명 중 10명가량만이 철학과 학생들이다. 나머지는 영문과·역사학과·공대 등 전공이 다양했다. 일반 교양 교육(liberal arts education)이 좋은 점은 훗날 법률가·기업인·엔지니어·의사가 될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만난 사람=김환영 논설위원


[인터뷰 후기] 문학도 심성 간직한 철학자

김재권 교수는 어린이 같기도 하고 시인 같기도 한 심성을 지닌 노 철학자였다. 질문에 대해 재미있는 대답이 생각나면 우선 소녀처럼 수줍은 웃음소리를 냈다.

 - 철학자로서 들어본 가장 멍청한 말은.

 “철학자들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가 저절로 샘솟는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열심히 노력한다.”

 - 플라톤의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은 현실성 있는 구상인가.

 “철학이 과학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이 과학의 시녀라는 인식도 있다. 두 관점 모두 어떤 면에서는 철학을 지적인 활동으로부터 분리한다고 본다. 양쪽 다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겠지만 현실을 왜곡한다고 본다.”

 - 철학자가 되려면 지능지수가 매우 높아야 하는가.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대학원 입학을 위한 수능시험) 점수상으로 보면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수리 분야에서 수학과 학생들 다음으로 높다. 언어 점수는 최고다. 하지만 무슨 일이건 어느 정도의 지능이 필요할 뿐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다른 분야보다 머리가 더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50년 동안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철학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게 있어서 너무 기쁘다. 또 내가 철학에 몸담을 수 있었다는 게 기쁘다. 철학은 인간에게 멋지고 신나는 모험이요 여정이다.”


김재권 명예교수는 …

서울대 문리대 수석으로 입학해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났다. 미시간대·브라운대에서 가르쳤다.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 『수반과 마음』 『물리계 내에서의 마음』 등이 있다.


김기현 교수는 …

연구 분야는 분석철학·심리철학·현대인식론이다.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클라호마대·서울시립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에 부임했다. 세계철학대회(2008년)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한국인지과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현대인식론』 등이 있다.
 

끝 김재권 미 브라운대 석좌교수[중앙일보] 입력 2008.03.04 05:20 / 수정 2008.03.04 06:44

 

대담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자 김재권(74·미 브라운대 석좌교수)씨는 현대 심리철학계의 거장이다.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전공을 철학으로 바꾼 이래 심리철학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계속 제시해 왔다.

심리철학은 영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발전해온 분석철학의 한 분야다. 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천착한다. 자연의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마음은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등을 연구한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도 이 같은 심신 문제를 탐구,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며 마음의 본성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의 손이 닿지 않는 최후의 신비 영역으로 간주되던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재권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를 강력히 옹호한다. 데카르트와 달리 심신일원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마음에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마음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을 뇌의 사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서울대 김기현 교수가 그를 만났다.


김기현=인간의 마음은 동서양을 떠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자뿐 아니라 종교인의 화두이기도 하다. 마음을 물질에 귀속시키는 당신의 물리주의는 서양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사유에서 볼 때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재권=마음처럼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없다. 우주는 물질이 격렬히 부딪치고 움직이는 어둡고 황량한 공간이고, 그 드넓은 공간의 아주 미세한 일부인 이 지구에 마음이 거주하고 있다. 이 드넓은 공간의 일부에 어떻게 이런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초자연적 존재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것은 한 수수께끼의 자리에 다른 수수께끼를 들여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현상은 시공간계의 법칙과 사건, 그리고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자연계 내에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현상 또한 신비로운 것이지만, 다윈의 진화론과 최근 분자유전학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신경과학·인공지능·언어학 등으로 이뤄진 인지과학을 통해 마음의 여러 측면이 연구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정보처리·언어처리 능력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그 기반이 되는 신경생물학적인 기제도 밝혀지고 있다.

김기현=마음현상이 신경생물학적 현상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모든 정신현상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가.

김재권=내가 최근에 낸 책 『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여전히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이 뇌의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한가지 예외사항을 인정한다. 그것은 감각, 또는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커피 향을 맡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여 인지할 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감각도 함께 느낀다. 이런 감각 또는 느낌의 영역은 인지 영역과 달리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다른 부분인 인지적 상태는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물리주의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세계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김기현=인간은 우월한 정신세계를 갖춘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되곤 한다. 인간의 마음과 동물의 마음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김재권=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합리적·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예술품을 만들고 윤리적 규범을 구성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과 다른 동물의 마음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이들 사이에 질적으로 구분되는 명확한 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현=인간이 진화의 정도에서 다를 뿐, 정신적 차원에서 다른 동물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가.

김재권=그렇다. 인간의 마음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신적·지성적 능력을 사용해 다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을 만들었지만, 그 ‘우월한 마음’이 전쟁·학살·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과 지능이 세계를 위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축복인지 저주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계의 일부이며, 우리의 능력은 이 세계 다른 동물과의 능력과 연속선 상에 있다고 믿는다.

김기현=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으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인간만이 사고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재권=동물의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많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마음 사이에 언어능력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수 있다. 또 인간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동물이 진화하지 못한 것은 단지 역사상의 우연일지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적으로 가능한 입장임에도 아직 명백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런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김기현=영국의 논리학자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 공학이 발전하고 인간을 모델로 하는 사이보그에 관한 영화가 나오면서 이 질문은 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생각하는 기계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김재권=기계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런 의미라면,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술이 마치 우리처럼 생각하고 대화하는 로봇을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단서를 빼면, 이 질문은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인간은 세포·분자·원자 등으로 만들어진 물질적 존재다. 나라는 존재도 세포 단위로 해체됐다가 재조합될 수 있다. 초인간적 기술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초인간적 존재에게 나는 결국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생물학적으로 번식된 존재이므로 엄밀한 의미의 기계는 아니다. 그러나 번식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됐을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능한 신에 의하여 지어진 기계일지도 모른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 =『심리철학』(김재권 지음, 하종호·김선희 옮김, 철학과 현실사), 『물질과 마음』(처칠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서광사), 『심리철학과 인지과학』(김영정 지음, 철학과 현실사), 『물리주의』(김재권 지음, 하종호 옮김, 아카넷)

◇김재권 =1934년 대구 출생. 서울대 불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나 철학을 전공.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학위. 미시건대에서 오랫동안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수반과 마음』『물리계 내에서의 마음』『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 등이 있다.

◇김기현 =1959년생.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 서울대 철학과 교수. 2008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저서로 『현대인식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