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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고독한 북채로 울리는 공(空)의 노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3. 4. 10:10

 

나호열 시인 조명

 

고독한 북채로 울리는 공(空)의 노래

 

강경희(문학평론가)

 

시인은 구도자가 아니다. 생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고행과 수행의 길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시는 통달의 체험도 구원의 열반도 완성하지 않는다. 시인이 경건한 시간과 숭고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행위는 종교가 되려는 몸짓이 아니다. 선(禪)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탈신성화된 극악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가깝다. 현대시의 정신주의적 경향의 밑바탕에는 부정과 타락, 갈등과 반목의 파행적 삶에 대한 자기성찰이 내재한다.

자기 성찰은 본질적으로 내부지향적이다. 즉 문제적 현실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되돌려 놓는다. 외적 세계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외부세계가 본질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는 짙은 허무주의이며, 둘째는 개별자의 주체적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모순이 극복될 수 없다는 자기인식이다.

나호열의 시는 이러한 두 가지 인식을 모두 보여준다. 그는 생의 근원적 허무주의와의 씨름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부단한 탈주를 위한 자기극복을 감행한다. 그의 시가 하나의 명제로 귀결되는 경향은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혀지지 않은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 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슬픔도 오래 되면 울울해진다」 전문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은 나무의 내적 진실을 온전히 포착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한 그루 나무”는 풍경이 아니라 존재이다. ‘나무’를 ‘나무’로 존재하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의 터전에는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다. “견디지 못할 슬픔” “삭혀지지 않은 슬픔”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은 모두 고통의 시간을 암시한다. 순간의 고통이 아닌 지속적 고통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한 그루의 나무” 자신인 것이다. “600년의 고독”을 지탱해온 슬픔의 역사가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로 표상된다. 고통과 슬픔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 희망이 된다”는 역설은 지독한 고독과 상처의 시간이 곧 삶의 본질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지독한 생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목숨’이자 ‘희망’일 수 있다는 자기 인식은 아픈 깨달음이다. 푸름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난한 시간을 소나무는 온몸의 “상형”으로 증언한다. 상처와 슬픔이 위안이자 희망의 거름이 된다는 진실은 아픈 진실이다. 진실을 모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아 슬픈 것이다.

나호열은 슬픔과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는 순간의 찬란함에 현혹되지 않고 무상의 환희에 몰두하지 않는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오랜 시간의 집적(集積)이며 고난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밤의 은밀한 바람이

결국 욕정의 결말을 삐라처럼 뿌려놓은 뒤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

겉과 속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만

가시밭길로 숨어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백꽃 뚜욱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치며

뭔가를 배웠다면 나는 고마워하리라

 

- 「나의 멘티에게」 부분

 

시간은 속절없이 인생을 강타한다. 광풍처럼 몰아치던 “욕정의 결말”도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가는 시간의 장난처럼 존재를 압박한다. “뚜우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잡으며 “가시밭길”로 들어서는 생의 종점은 어둡고 우울하다. 시간의 도도한 흐름은 부정과 반항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주체의 의지를 벗어난 존재의 한계 상황을 시인은 주시한다. 나호열의 힘은 바로 이 ‘주시’의 시선에 있다.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것이 회피와 거부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당당한 ‘응시’의 시선은 모든 허물어져가는 것들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그의 시가 지닌 장렬함을 여기서 빛난다. 붉은 “동백꽃”이 “모가지”를 떨어뜨리듯 어두워가는 생의 시간 앞에서 장렬하게 몰락할 수 있는 자의 의연함을 그는 생의 “교훈”으로 삼는다. 아픔이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은 오랜 고통의 시간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세월의 미학은 시간이 소비가 아니라 체험의 누적임을 보여준다. 켜켜이 쌓인 경험적 진실로 그는 외적 풍경을 존재의 미학으로 되돌려 놓는다.

 

어두워서 춥고

추워서 더욱 어두운 마을 밖에서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쓰고

저, 외톨이 나무의 꿈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부분

 

“외톨이 나무”는 시인 자신이다. 춥고 어둡고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쓴 나무의 초상을 통해 그는 자신의 본다. 여위고 아픈,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신을 끝끝내 지켜보는 행위에 그의 비범함이 자리한다.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 어둠이다. 어둠의 정면을 돌파하는 것은 상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임을 수용한다. 수용이 아니라 의지에 가깝다. “끝까지”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그는 비장하다. 이러한 비장함이 일상을 지배하는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연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짜릿한 감각에 길들여지고, 익숙한 삶의 편린들을 쫓아가고, 적당한 중간지대를 옹호하려는 세태로부터 그는 단호한 선을 긋는다. “꺾어져 돌아가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는 위험한 지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확실한 삶의 위험한 곡예를 감내하려는 그의 단단한 정신은 타협을 모른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 보는 것, 길의 끝을 마주하려는 정신의 모험을 중단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호열의 삶의 철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운 길이다. 때문에 ‘고독’ ‘외톨이’ ‘눈물’은 외로운 자가 감수해야 할 형벌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형극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시인 자신을 이토록 외로운 길로 이끄는가? 존재의 해탈을 위한 수행의 과정인가? 고통 극복을 위한 자기실현의 의지인가? 모두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눈물이 시킨 일」 부분

 

“경전”은 진실의 요체이다. 경전은 가르침이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시인은 경전의 “힘”을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 말한다. 그는 관념의 경전을 버리고 체험의 경전을 온몸으로 읽는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완성을 위한 종지부를 찍기 위해 경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자신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힘이 경전임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억 만 년”의 “산”을 “세우는 힘”,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는 “바다”를 만드는 “힘”은 모두가 “시작”에 대한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열망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삶은 무서운 집념과 의지와 이성으로만 이끄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라는 한 구절이 간절하고도 진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없이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나호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으로 간파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살갗과 끓는 피로 호흡한 삶의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의 눈물과 고통은 진짜임을 증명한다. 관념의 포즈와 깨달음의 제스처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일종의 정신주의 시가 범할 수 있는 초월의 함정을 벗어난다. 용해되지 않는 내적 관념을 무차별하게 살포하는 선시류의 강제적 깨달음의 주는 피곤함을 경험한 독자라면 나호열의 간절하고도 순수한 문법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관념의 진실을 설파하려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월의 연륜이 그를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채움에 집착하고 깨달음에 몰입하고 해탈에 집중하는 것만이 ‘진실’일 수 있다는 중압감으로부터 그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든다.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서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 「매화」 부분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라는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롭다. “꽃이 아니어도 / 꽃으로 보이는” “세월”의 ‘눈’을 그는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당위의 세계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이동했다. 개념과 명제가 가득한 세계로부터 그는 자기 구현과 완성의 세계로 발을 옮겼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눈물 고이는 세월”을 스스로 끌어안고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그저 흘러간 시간의 결과가 아니라 치열한 시간과의 싸움이 만들어낸 성장의 열매인 것이다. 그의 시의 ‘초연함’의 배경에 뜨거운 눈물과 고통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 「북」 전문

 

“한 마디 말로 / 평생을 노래”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존재하는가. 하나의 언어로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 시인은 위대한 시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시인은 단 하나의 언어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소리, 하나의 진실, 하나의 울림을 위해 시인은 허망하고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과 조우한다. “평생의 노래”를 “한 마디 말”로 바꾸려는 간절함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얼마나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가. 하지만 단 하나의 소리도 남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허무한 세계에 진실한 하나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시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나호열은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 북채를 드는 사람”이다. “북”의 “소리”처럼 “한 마디” 울림으로 그는 세상과 교신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발성하는 ‘공(空)’의 언어가 가장 큰 소리임을 그는 우리에게 아프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계간 『시와 산문』 2014년 봄호 시인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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