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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탐문 探問과 언어의 탈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11. 22:49

 

존재의 탐문 探問과 언어의 탈주

김명아 시집 『붉은 악보』

(한국대표시인선 .93 시와산문사 2013)

나호열(시인)

 

『붉은 악보』는 2009년 시단에 등장한 김명아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 수록된 60편의 시가 주는 인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혹감과 당돌함이다. 정밀한 그 어떤 독법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구성이 주는 당혹감,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독자의 공감 여부에 개의치 않는) 당돌함은 시인과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다. 대체로 첫 시집은 등단을 전후로 한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활동을 예감하게 하는 것인데, 『붉은 악보』는 시를 둘러싼 기존의 통념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시 읽기의 정도正道를 무력화함으로써 신인新人의 의미를 환기하는 강열한 인상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아마도 어느 독자는 자신의 독해력을 탓하며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시집을 덮을 지도 모르며, 또 어느 독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시집을 독파하고 난 다음에 밀려오는 빈 손의 허탈감에 몸을 떨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악보』는 그만큼 독하고 독특하다. 시집을 구성하고 있는 60 편의 시는 60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꽃이다.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으면서 불가사의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되는 환상을 『붉은 악보』는 보여준다. 어느 시를 읽어도(몇 편의 주목할 만한 시는 예외로 한다고 해도)수 만보를 걸었으나 사실은 한 자리를 맴돌았다는 낭패감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60 편의 시들이 결국은 한 편의 시라는 인식으로 끝맺음을 할 때 시인은 아무렇지 않게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앞 선 시인의 전언을 슬쩍 고단한 발밑에 내려놓는 것이다.

 

시집 『붉은 악보』는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명제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재탐색하게 만든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언어’와 ‘존재’라는 관념을 상기하고 다시 정의 定義해야하는 책무를 지게 된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생각의 실재를 언어라는 모사수단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필요조건인 언어는 언어 자체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애매성으로 인하여 영원히 존재의 기의 記意에 닿을 수 없다. 존재는 또 어떨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성질이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항존 恒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일자一者’의 존재 이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즉, 인간 인식의 한계는 ‘일자一者’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에 봉착하는 것이고, 기껏해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작동하는 ‘일자一者’의 기미를 포착하는 일이기에 시는 예상한대로 모방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시는 결코 존재의 전모를 밝힐 수 없고 의미를 확정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현장 現場의 논란꺼리인 시의 순수(개별적 감성)와 참여(보편적 이념)의 갈등, 의식(이성)의 해체 여부와 같은 문제는 ‘문제’로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기껏해야 유동 流動하는 세계와 범주화되는 의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활동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 유동하는 세계를 감지하는 순간에 제어되지 않은 채로 튀어 오르는 언어를 빌어 존재의 섬광을 느끼는 것이 시인이 수행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붉은 악보』는 존재가 항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각으로 기억(인상)된다는 사태의 중첩된 기록이다. 거의 전 편의 시에 지루하게, 집요하게 드러나는 “ ~ 다”로 끝나는 행간의 단절은 이와 같은 시인의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반어법과 역설을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좀처럼 추리를 통한 의미의 연계를 허용하지 않는 시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 시를 둘러싼 시인의 개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의 추세로 보이는 언어의 무의미성이나 이성의 해체, 현실의 적극적 참여나 고발과 같은 다양한 어떤 유행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붉은 악보』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세계를 변화의 양상으로 보기 때문에) 시인의 확고한 자유의지가 집적되어 있는 것이다.

 

 

만삭의 몸으로 누워 있다 주름살을 당기며 짐작하는 물의 무게, 사라진 입술은 굽은 어깨를 불러내 눈을 치웠다 무등산 옛길 문턱을 넘나들며 지워진 자리마다 소나기가 심어졌다 소호카페 수면 위로 오리 떼를 몰며 물줄기로 치솟는다 빗소리 삼키며 계곡은 넘쳐났고 죽순은 마디가 자라고 있다

 

도청 별관 앞을 지나는 차창 밖으로 5월의 문이 열리고 검은 휘장이 펄럭였다 아스팔트 위로 먹구름이 밀려들며 바퀴자국마다 덮쳤다 잠을 불러들이지 못하고 절룩거리던,마이크를 잡고 몸을 비틀며 유년시절로 갔다 5월의 문 앞에서 그는 넘쳐난 무등산 계곡이 되어 우르렁거렸다

 

- 「잠을 불러들이지 못하고」 - 광주댐 전문

 

‘광주댐’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5월의 광주, 즉 민주 항쟁이라는 사회, 정치적 이슈를 연상하게 하지만, 억압과 투쟁, 분노의 상기와 같은 익숙한 이미지는 배제되고 냉철한 풍경의 묘사에 치중되어 있다. 무심한 듯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는 풍파를 가슴에 아로새긴 노인의 목소리처럼 둔중해 보이기조차 하다. 이런 태도는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섬, 연평도를 방문하고 쓴 「연평도라는 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포격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풍경을 ‘산산조각 난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도로가 갈라졌다’는 메마른 진술로 대신할 뿐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감성의 토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명아 시인의 시법의 두 번째 특성은 이와 같이 화자의 목소리가 사회성이 배제된 건조한 제 3자의 냉정함과 닮아 있어 시를 읽는 독자는 역설적인 현실의 이면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말하는 얼굴에는 입이 없다 미용실에 다녀 온 얼굴을 깨진 액자에 끼웠다 어디에 걸어 둘까 오드 아이 odd -eye가 윙크를 한다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가장무도회가 열렸다

 

- 「말하는 얼굴」 1연

 

이 시에도 시인은 개성이 감춰진 화자를 통해 주체를 상실한 삶의 의미를 각성시킬 뿐이다. 소통은 사라지고 상징만이 소비되는 삶을 ‘말하는 얼굴에는 입이 없다’고 환치할 때 눈동자 색이 각각 다르듯이(odd eye) 현실적 자아는 ‘가장 假裝’ 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가장되어 왜곡된 자아를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백운철’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래의 시는 제주도의 돌 문화공원을 기획하고 있는 “탐라목석원”의 원장인 백운철 씨를 소재로 삼고 있는 시이다. 제주도 100만 평의 땅에 ‘돌 문화’를 이식하는 작업을 수십 년에 걸쳐 하고 있는 인물(신문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면 그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가치 있는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을 오직 돌의 은유로 보여주는 시도는 아래와 같이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빛을 가두지 않고 감싸며 초입에서 출구까지 용암석, 조록나무 뿌리는 흑단처럼 단단한 말을 걸었다 돌집이 밀짚모자를 쓰고 햇볕을 쬔다 평생 품어온 나무 조각과 돌을 돌려주고 해벽 海壁에 매달린 피뢰침 되어 땅을 제 살처럼 보듬고 있다

 

- 「단단히 말을 건다」 마지막 연

 

이와 같이 자아의 왜곡을 배제하고 존재의 항존성을 부정하며 언어의 애매성을 인정할 때 시인은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합니다 사이에 팝니다」첫 연 마지막 부분)는 맞물림이 없는 세계의 진실에 도달한다. 맞물림이 없는 세계는 인과론이 무용한 헛도는 세계이다. 사실 우리가 꾸는 꿈은 관계와 유대로 맞물려 있는 사회적 인간의 결과물이다. 그 꿈이 깨졌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시인이 인과론의 사슬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짧은 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2연 첫 부분)이나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마지막 연 마지막 부분)과 같은 진술은 관계와 유대의 사슬이 끊어졌을 때의 공황恐慌상태를 직시하는 표현들이다. 이 시에서 암시하고 있는 바, ‘팔고 사는’ 행위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또한 인과를 벗어난 존재의 비극이기도 하다. 팔고 사는 행위는 선후의 관계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마주침이며 엇갈림이다. 욕망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욕망이 거세되는 순간이다. 건너가야 할(생존) 신호가 짧음에도 횡단보도를 늘리는(세속적 자아의 욕망)이 아이러니야말로 김명아 시인이 『붉은 악보』에서 힘들게 조우해야 할(이미 조우했을지도 모를) 존재인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의례를 통과해야만, 『붉은 악보』에서 보여졌던 불온한 당혹감과 부쾌한 당돌함은 막연히 존재를 부정하고 언어를 희롱하는 얄팍한 전략 戰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하여 존재의 항존성을 확인하고 언어의 애매성을 극복하려는 열망의 표지 標識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시 「붉은 악보」는 시집 『붉은 악보』의 종착점이자 시인 김명아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 어느 시 보다도 서정 抒情이 도드라지고 표현(詩行)의 압축미가 정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논리성에 까지 짜임새를 갖춤으로서 시집을 끝까지 통독한 독자들에게 안도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 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 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 「붉은 악보」 전문

 

‘붉은 악보’는 노을의 은유이다. 희망을 상징하는 해(태양)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악보를 담고 있다. 아침의 노을은 솟대와 같고 저녁의 노을은 집집마다 평화와 휴식의 불빛을 선사한다. 어디 그 뿐인가! 그 노을은 악보가 되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된다. 해 - 노을 - 악보 - 희망의 노래로 유기적으로 전환되는 진경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지의 꿈이 아니라 이미 ‘달려온 얼굴’이기에 절실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