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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삶에 깃든 자연의 섭리를 찾는 시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0. 5. 22:15

 

삶에 깃든 자연의 섭리를 찾는 시들

- 자연에 대한 주제적 탐색을 중심으로

 

나호열

 

심상치 않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자연을 정복과 수탈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하늘과 땅, 깊은 바다 속까지 탐욕의 손이 가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안락한 삶의 향유를 위한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는 전 지구적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온난화, 사막화, 공기와 바다의 오염으로 지구는 병들고 있는데 인간은 소비의 욕망을 억제할 방도를 찾는 대신 과학의 기술을 빌려 대안을 찾는데 골몰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의 사슬로 이루어진 정교한 자연의 섭리를 짓밟은 죄로 인간은 스스로 멸종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 시인들의 책무는 과연 무엇일까? 자연을 탐미의 대상으로 삼아 낭만의 노래로 심금을 울리는 것으로 붓끝을 멈추고 만다면 시는 영화, 사진과 회화 繪畵와 같은 영상 장르에 교훈과 서정적 정화의 기능을 내어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연을 서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깊은 심미안으로 완성도 높은 언어미를 창출한 자연의 찬미하는 시는 많을수록 좋다. 다만 오늘의 삶의 양식 樣式 - 자연과 대응하는 - 의 갈등을 정치적 구호가 아닌 시인의 내지른 비명과 탄식, 고발과 반성의 목소리가 대중(독자)에게 더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경외와 공포에서 시작하여 도전과 정복의 대상을 지나쳐 온 지 오래되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과학에 기반한 문명은 자연의 치밀한 위대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자연의 반격에 흠칫 놀란 나머지 인간 중심의 환경보호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 또한 부족한 인식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누려야할 이익은 포기하기 않은 채 생태生態의 영역- 자연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이 때,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이치를 깨닫고 온갖 생명의 존귀를 체화하는 시들의 드러남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자연에 맡긴 상태에서는 이러한 만물동근, 생명의 존귀함을 체득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명의 편리함을 버리고 난 후에 얻는 평화와 안온을 노래한 시는 참으로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시화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의 대중은 잠시잠깐 도시를 떠나 휴식의 대상으로 자연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일에 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그 발길 때문에 우리의 산과 들이 이차 훼손과 오염에 시달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됨을 도외시 할 수 없다.

 

오월의 눈부신 햇살은 삽 끝에 매달려 반짝거릴 뿐

페허 속에는 쥐새끼같은 바람만 남아

검붉은 눈을 치뜨고 있다

다락방 교회 낡은 십자가

육중한 크레인에 실려갈 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퀭한 눈동자가 부서진 골목길 여기저기

유리구슬처럼 굴러다니고 어디선가

삶이었을 듯한 곳에서 비명이 찢어진다

뭉개진 하늘 귀퉁이에 가시내의 브래지어가 펄럭일 때

헛간과 장독대도 찌그러지고

태양을 향해 뜀박질하던 유년도 천국도 박살났네

여름을 식히던

느티나무 아래 서늘한 그늘도 쓰러져

숨을 곳 없는 북한산 땅거미 절뚝거리다

홀쭉 배 꺼진

똥개에게 툭 - 한마디 던진 뒤

헐린 골목 삐꺽이는 기억의 계단을 찾아든다

치사한 시대와 손잡은

수상한 노을의 따귀를 갈기고 손 털고 돌아선 여기저기

넝마 같은 살점들 투덜거린다

 

* 은평구 재개발 지구를 지나며

 

- 김자현 , 「폐허에서」 전문

 

시 「폐허에서」는 뉴타운의 미명 아래 처참하게 무너진 마을 공동체의 스산함을 보여주고 있다. 좁고 긴 골목길, 다닥다닥 어깨를 잇대고 살아가던 동네는 우후죽순 공룡처럼 들어선 콘크리트 숲의 신기루로, 허망한 욕망이 좌절되고 난 후의 공동체의 따뜻한 마음을 상실한 유랑의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도시가 인공 人工의 산물임은 틀림없지만 몸 편히 뉘일 집을 재화로 인식하고 부의 축적수단으로 물질화하는 세태의 끝은 정신의 해체와 마을 공동체의 이산임을 「폐허에서」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삶은 수많은 필요조건을 요구한다. “다락방 교회 낡은 십자가/육중한 크레인에 실려갈 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절규는 “치사한 시대와 손잡”은 도시민의 음울한 이면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냉혹한 도시의 폐허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 저 너머에는 우리가 일찍이 떠나온 땅이 있다. 그 땅은 가난과 간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지만 관상 觀賞과 효용이 판치는 도시와 달리 농어촌의 삶은 직접 자연과 대면하는 근육의 공간이다.

 

분얼 分蘖

김신영

 

키가 벼보다 크게 자란

무논에 뿌리를 내린 피와 수중 풀과

겁푸레기 풀을 뽑아 대지에 던져 놓고

녹음이 짙은 논에 물을 대는 이른 아침

논과 언덕에 뜨거운 햇살이 내리기 전

콩을 심자고 흙을 파니 숨어있던 돌이 얼굴을 내민다

볍씨를 뿌리면 어느새 사방팔방 분얼하여 자라나

푸른 들이 되고 꽃이 피어 향기를 내니

말이 가져오는 온갖 풍설마저 남김없이 향기로워지는

대지의 흙냄새가 진하게 언덕을 올라온다

바랭이, 강아지풀, 개망초까지 뽑다보면

어느새 뜨거운 여름의 대낮인 것을

낫에 비친 뜨거움이 내 가슴보다

더 뜨거운 홍염의 대낮이니

살갗이 데이고 얼굴이 검게 그을리는

신선한 대지를 경작하기 위해 김을 맨다는 것은

기름진 이 땅의 이름들이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빛난다는 것

백배, 이백배, 오백배의 헌신을 넘어

천개의 씨앗을 내는

 

이토록 선한 뜻을 이어받아

오늘, 논밭에 나가 김을 매고 둑에 씨앗을 뿌렸으니

대지의 풍요에 머리를 숙이며,

온갖 말이 가져오는

풍상을 담아내던 내 시를 지운다

상처로 얼룩져 서러운 마음을 지운다

오로라에서 벗어나 막힘이 없는

무간 無間바람을

푸른 대지에서

아름 속으로 맞아들인다.

 

* 벼의 핵분열식 성장법

 

김신영의 「분얼 分蘖」은 농부의 파종의 일상을 그린 시다.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련의 노동은 남김없이 자연에 기대지 않고는 어림 없는 일이다. 해 비추이고 비 내리고 바람 맞는 들판의 일은 저절로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고개 숙이게 하는 경건 그 자체이다. “말이 가져오는 온갖 풍설마저 남김없이 향기로워지는/ 대지의 흙냄새가 진하게 언덕을 올라온다”는 자연과의 일체감은 아스팔트로 뒤덮힌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생명의 울렁임이지 않은가! “신선한 대지를 경작하기 위해 김을 맨다는 것은/기름진 이 땅의 이름들이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해와 같이 별과 같이 빛난다”는 깨달음은 학교에서도 어느 성소 聖所에서도 체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고백은 “온갖 말이 가져오는/ 풍상을 담아내던 내 시를 지운다/상처로 얼룩져 서러운 마음을 지운다”는 하심 下心일 뿐이지만 그 말의 농도는 짙고 푸르다.

 

길바닥에 딱딱한 복숭아씨 하나 버려졌다

그 패인 골로 빗줄기도 흘러가고

돌개바람도 산 너머 갔다

날이 개어서

홀로 아스팔트 길에 나섰는데,

어라, 지나가는 이 없다

농공단지 뒷길

늘 거기 매였던 개는

더운 털옷 벗지도 못하고 쳐다보는데

요걸 들고 찰까 재다가

주워서 두둑한 산비탈에 던져준다

바짝 마른 너,

몇 년을 기다려도 좋으니

화사한 복사꽃으로 만나자

물씬한 복숭아면 더 좋고,

하는데

빵~, 비키란다

- 임술랑 「복숭아 씨」 전문」

 

이런 낮은 마음에는 하찮은 생명에도 눈길이 가고 기꺼워하는 따뜻한 눈길이 있다. 이 따뜻한 눈길이야말로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측은지심이다. 길에 버려진 복숭아씨를 산비탈에 던져주는 그 마음은 “바짝 마른 너,/몇 년을 기다려도 좋으니/화사한 복사꽃으로 만나자”( 임술랑의 시 「복숭아씨」 부분)는 느림과 기다림의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변화가 미덕이 되고 속도의 빠름이 성공의 기준이 되는 요즘의 일상에서 느림과 기다림의 자세는 생멸 生滅의 과정을 관조하게 만들어주고 삶에 대한 조급함과 분노를 가라앉히는 힐링의 조건이 된다.

 

당신은 지금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셨습니까?

당신은 숲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바로 숲의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있어 숲이 되었고

당신이 함께 있어 어우러진 까닭입니다

 

- 이인평, 「숲」 전문

 

우리는 힐링Healing을 원한다. 힐링은 사회와 타자, 더 나아가 자신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우리는 둘레길을 걷고, 명사들의 잠언을 들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러나 힐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조와 진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도로 徒勞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이인평 시인의 「숲」은 자신이 숲이고 나무이며 그 숲과 나무는 느림과 기다림 속에서 생장한다는 자아 존중감이 자연과 생명을 거둬들이는 소중한 자산임을 나지막이 전해준다. 숲은 한 그루의 거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과 풀과 그것에 깃든 날것들이 모여 이루어진다는 단순한 진리가 공동체가 허물어지고 익명 속에 타자화되는 자신을 돌보는 유일한 길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시 신화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여전히 자연은 재해 災害의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인간의 마을에 토테미즘totemism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를 버리는 대신 자연의 비의 秘意에 고개를 숙이는 밝은 눈을 얻을 수 있다. 최근의 눈부신 생물학의 발전은 식물도 곤충이나 짐승과 상호 교감을 이루며, 자신의 생명을 보전을 위하여 능동적인 방어 기제를 갖추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우리가 그저 볼 품 없고, 하찮게 여기는 풀과 나무들이 감정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름의 의사표현을 구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한 자연의 비의는 고영의 시 「건넌들 마을」에 눈부시게 발현되고 있다.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그 자연의 섭리를 뛰어넘으려고 과학의 권세를 애써 믿고 싶어하지만 자연의 섭리로부터 해방되는 그 날을 염원하는 것보다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일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은 아닌가!

 

 

전부를 건너도 다 건너지 못하리

춘천과 화천 사이

강물과 강물 사이

 

연꽃과 연꽃 사이

연밥과 연밥 사이

 

내 전부를 걸어도 나 당신을 건너지 못하리

 

오리가 연꽃을 건너는 사이

사이가 사이를 건너는 사이

 

평생을 건너도 다 건너지 못하리

눈물과 이별 사이

이별과 영원 사이

 

나 끝내 당신을 건너지 못하리

 

* 건넌들 마을 :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서오지리에 위치한 연꽃마을

 

- 고영의 시 「건넌들 마을」 전문